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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2 성령강림후 마지막 주 | 왕국절성서의 거울 앞에 2020. 11. 18. 17:12
성서일과
- 1독서 | 에스겔 34:11 ~ 16, 20 ~ 24
- 응. 송 | 시편 100 혹은 시편 95:1 ~ 7a
- 2독서 | 에베소서 1:15 ~ 23
- 3독서 | 마태복음 25:31 ~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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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동 쪽방촌 '작은자교회', '혼자드리는 예배' 만물을 '충만' 하게 하는, 사람들
1
요즘같은 시대에는 ‘신은 없다’거나, ‘자기 자신만을 믿는다’고 말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돈, 재물, 명성, 권력, 평안, 행복등 하나님을 대신하는 다른 이름의 신을 믿고 있는 것일 뿐, 사실 우리는 모두 그리고 늘 자신의 삶을 구원해줄 무언가를 믿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삶에 가장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고 있는 믿음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일 겁니다. 잘 될거라는 기대, 또는 반대로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의 생각에 사로잡히고, 그것을 굳게 신뢰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대체 어떤 근거와 기준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좀처럼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수 많은 생각들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들일까요?
2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이 땅의 교회들은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지고 경험될 그 날을 함께 고대하고 있으며, 신앙은 현세적이든, 내세적이든 결국은 모두 ‘종말’로 귀결됩니다. 오늘 비유는 바로 ‘그 날’에 대하여 주님이 전해주셨던 열 처녀와 달란트 비유에 이은 마지막 비유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종말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 기대를 뒤흔들 만큼 당혹스런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우선 마태가 전하고 있는 복음서의 청중들이 누구였을지를 생각해 봐야합니다. 지금 마태는 일반 회중들에게 복음 전도를 하기위해서나, 혹은 후대의 우리들에게 전하기 위해 이 말씀을 기록했던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는 일차적으로 당시의 교회 공동체 구성원에게 읽히는 것을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사도들과 부활의 첫번째 목격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언하고 가르쳐야만 했던 교회의 필요에 따라 기록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우리들과 달리 오늘 비유의 말씀을 포함한 복음서의 말씀이 전해졌을 때,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모두 어렵지 않게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받아들이고 이해했을 겁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 오늘 말씀을 따라오셔야만 합니다.
본문은 주님이 오시는 날, 그날에 있을 이야기를 비교적 생생한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천사들에 둘러쌓인 영광 가운데 계시고, 그 앞에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일단 주님과 그들 사이에 오고 갔던 대화를 보면 서로가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글이 목적으로 하는 대상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고려하고 보면,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그룹의 사람들은 모두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던 사람들인 겁니다.
3
그렇게 고대했던 주님이신데, 재림의 날, 주님께서 곧장 하셨던 일은 뜻밖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함께! 모두가 다 같이! 기쁨에 참여할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펼쳐진 겁니다. 주님이 이들을 가르고 구분하신 기준은 당신께서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어있고, 병들었으며, 옥에 갇히셨을 때 어떻게 대하였는지에 관한 6가지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준은 어떤 이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드리고, 영접하고, 옷을 입히고, 돌보아주고, 돌아보는 것이 예수님께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기준들은 딱히 대단하거나 거창한 일들은 아닙니다. ‘얼마 만큼’이라는 조건을 빼고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기준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구나’라고 안심하려는 순간, 오히려 그렇기에 이 기준에 떳떳할 사람이 많지 않다는 좌절감이 올라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말씀하셨던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못 본체하며 쉽게 지나쳤던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안쓰럽게 여기고 연민을 가지지만 또 그렇게 지나쳐버리고 마는 일들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것이 종말의 기준이라는 말씀하셨으니, 과연 우리 중에 누가 ‘나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구원을 온전히 이루었다’ 큰 소리칠 수 있을까요?
4
이 찔림으로부터 우리는 곧장 “그렇다면, 이제부터 사회 사업을 하고, 구제에 힘쓰며‘선행’을 통해 ‘구원’을 이루자”는 차원으로 치닿고 맙니다. 그리고는 누구를 구제하고, 누구를 도울까 두리번 거리게 될 겁니다. 주님이 자신과 동일시(同一視) 하셨던 ‘작은 자’를 찾아야만 합니다. 과연 이들은 누구일까요?
일차적으로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이웃들을 생각할 수 있지만, 신앙을 지켜가고 있는 교회공동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보게 되는 초대교회의 삶이 믿음의 지체들을 돌보고 지키는 것을 사명처럼 여겼다는 사실과 더불어,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작은 자’를 ‘내 형제’라고 칭하셨던 것도 근거가 됩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 요 17:9
게다가 요한의 복음서 역시 부활후, 제자들을 떠나시던 주님의 관심이 온통 남겨진 당신의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작은 자’들은 유대사회에서 이교도로, 로마에 의해서는 눈엣가시로 핍박받고 있는 남겨진 교회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이들을 자신을 대하듯 돌봐주어야 하는 ‘작은 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5
제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주님을 찾아와 ‘하나님을 사랑하듯 내가 사랑해야하는 ‘이웃’이 누구입니까?’ 물었던 율법학자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네가 가서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라’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네가 이웃’이 되라시던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네가 작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너희야 말로 ‘작은 자’라는 주님의 말씀앞에서, 내게는 없어도 그만인 것들을 가지고 ‘작은 자’들을 돌보겠다고 기웃거리던 우리의 오만함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습니다. 늘 나보다 나은 이들을 향해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 나보다 못한 이들 앞에서는 스스로는 꽤 괜찮은 사람처럼 여겼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경제적인 도움이나 구제, 복지 차원의 것은 당장의 한끼와 오늘의 시간안에서만 유효합니다. 이런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음 끼니를 걱정하게 될 때, 또 내일이 찾아왔을 때, 곁을 지키는 이들의 빈자리가 크게 보일 때 섣부른 우리의 도움이 오히려 깊은 상처와 아픔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이런 도움은 굳이 기독교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어도 가능한,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누구라도 마땅히 해야할 일들일 뿐입니다. 이런 것들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며, 헐벗음에서 벗어나는 ‘구원’의 경험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바울은 엡 1:2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시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한 몸을 이루는 곳이 ‘교회’라는 바울의 정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한 몸이 되시기 위해 자신을 비워내신 것은, 스스로를 우리와 ‘동일시’하셨던 겸손한 마음의 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님이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그의 몸으로 초대해주셨고, 기꺼이 자신을 우리에게 맡기셨으니, 적어도 주님께는 그리스도의 몸을 대체할 다른 몸은 없습니다. 주님은 장식용으로 우리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신 주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 에베소서 1:23
만물 가운데 버려진 자들 같은 작은 자들을 택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삼으셔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기꺼이 우리를 한몸으로 삼아주신 주님의 목적입니다. 헬라어 ‘플레로마’ 로 번역된 ‘충만함’이란 것이 부자가 되고, 무언가 부족한 것이 매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늘 결핍과 부족함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살아온 우리에게 ‘충만’은 잘 와닿지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충만’은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결핍과 부족의 경험과 반대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없어서 공허하고, 무엇이 결핍되어 두렵고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없음에도 풍성하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되는 것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세상을 이런 충만으로 채울 수 있을까요? 아무리 구제를 하고, 선행을 베풀어도 이 결핍은 결코 메꾸어질 수 없으며, ‘충만’은 신기루처럼 희미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백 데나리온으로 ‘왜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느냐’ 불퉁거리던 유다의 마음이 아니라, ‘작은 이’들을 돕는 진정한 길이, 스스로가 그 길이 되어 눌린 자, 갇힌 자, 보지 못하고, 걷지 못하는 이들의 복음이 되셨던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복음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그것이야 말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여전히 문제가 있어도, 주님앞에서 기도할 때, 그의 성호를 찬양할 때, 그의 말씀을 가슴에 담을 때 알 수 없는 평안과 평화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가 엄마 품안에서 잠들어 있는 것처럼 다른 무엇이 없어도 경험하게 되는 이것이 교회안에 담아놓으신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우리는 성찬상앞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생명의 떡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음료로 먹고 마심으로, 예수 사건이야 말로 영생의 기쁨을 맛보는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충만’의 핵심은 ‘그리스도’입니다. 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안에 있습니다. 이 말이 뻔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 외에 죽음의 구렁 조차도 채우고 남는 ‘충만’을 경험할 길은 없습니다.
6
오늘 성서일과 독서의 핵심 키워드는 ‘종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종말은 ‘그분의 날’일 뿐입니다. 종말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도 그분의 일이고, 구분하는 기준도 또한 그분에게만 달려있는 일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 ~ 23
주님의 기준은 양과 염소로 구분된 두 그룹의 사람들 모두를 당혹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한편도 마땅하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겁니다. 주님의 기준, 주님 나라의 문이 이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왜 이런 기준인가?’, ‘왜 그리스도께서 심판주가 되시는가?’ 라는 반문을 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속해 있는 배타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통치행위에 간섭할 수 있는 존재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은 배타적이기에 또한 은혜가 됩니다. 오늘도 탐욕과 유혹에 무너지고 깨어지고 마는 우리입니다. 어둠의 힘에 짓눌리고, 세속의 길에 쉽게 물들고, 믿음의 길에서 신속하게 무너지는 우리를, 타협하지 않는 사랑으로 모든 핍박과 환란과 시험속에서도 건져내시고야 마는 것이 주님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7
성경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신앙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세워지는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최선이며 모든 것입니다. 구원의 본질 자체가 주님을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되는 것, 주님의 몸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친밀한 앎 가운데 있는 사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의 사랑안에 거하는 사람이되는 겁니다.
이제 다시 본문속에 주님이 기준 삼으셨던 여섯가지 행위와 그런 상황을 돌아봅니다. 그렇게 주님과 한 공동체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주님의 시선이 멈추어 있는 곳을 외면하고, 그분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곳을 등지고, 그분이 친구가 되어주시고자 찾는 이들을 감히 외면하고 거부할 수 있을까요? 악수를 나누고 웃음을 짓고 친절하게 대한다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선행을 삶 가운데 가득 채운다고 해서 ‘나’와 ‘너’, ‘우리’를 향한 구원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사랑’은 순전하고 깊은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삶의 언어일 뿐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의 구원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이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허무로 떨어지고, 기대하고 의지했던 모든 구원의 이름들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작은 자들을 못 본채 지나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가벼이 여기던 세상이 모두 주님앞에서 두려움에 고개를 떨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무능한 이들, 그 부끄러운 손을 그리스도의 은총에 기대었던 이들은, 그 날에 우리를 자신의 몸으로 삼아주신 주님, 영원토록 같은 운명안에 머물기로 작정하신 예수님께서 내미시는 손을 붙잡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권세나 불의함도 우리를 구원해내시는 그분의 손을 가로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온 땅과 열방과 민족 가운데 다시 오실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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