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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 성령강림후 23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11. 4. 17:57
성서일과
- 1독서 | 여호수아 24:1 ~ 3a, 14~25 혹은 아모스 5:18 ~ 24
- 응 송 | 시편 78:1 ~ 7
- 2독서 | 데살로니가전서 4:13 ~ 18
- 3독서 | 마태복음 25:1 ~ 13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fX0szdCe2dP83CDeC2c2r3665rKsKvSq/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UELNCu_gGFE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Phoebe Traquair '열 처녀의 비유' 함께, 나누어 질 수 없는 것들
1
이제 우리는 추수감사절인 다음 주일과 왕국절인 그 다음주를 지나고 나면 대림절 첫주를 맞이하게 됩니다. 어느덧 ‘성령강림절기’가 마무리되고 ‘대림절’이 목전에 있다는 생각이 드니, 갑작스레 아무렇지도 않게 잊고 지내던 기다림이 떠올라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본래부터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의 핵심은 ‘그리스도’입니다. 12월을 마주하는 요즘 같은 시기면 또 다시 무르익어가는 년말 성탄의 분위기에 휩쓸려, 분명한 그분의 약속이 있었음에도 재림은 우리안에서도 그닥 실감나거나 매력적으로 들리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어진 모든 삶을 ‘주님의 다시 오심’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왔을까요?
2
서신서인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오늘 우리 눈에 낯설고, 귀에는 희미한 재림의 그 날과, 그 날에 이루어질 일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이미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남아 있던 이들과 함께 모두가 공중으로 들림을 받게 된다는 ‘휴거’에 대한 이 말씀을 여러분은 어떻게 듣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우선 이런 말씀들은 단순한 비유일 뿐이라고 치부하는 경우입니다. 믿지 않는 겁니다. 반대편은 문자 그대로, 그리고 공중으로 들려질 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기다리는 경우입니다. 어느 것이 되었든, 공중에 올라가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 재림사건의 핵심이 다른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 있는 중입니다. 당시는 삶에 채이면서도 함께 믿음을 지키며 살아오던 이들이 하나, 둘 자꾸만 성도들의 곁을 떠나는 일이 흔해지고, 지연되는 주의 재림에 모두가 지쳐있던 때였습니다. 남아 있는 이들의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믿음으로 삶을 지탱하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고, 신앙의 길을 지켜낼 자신은 자꾸만 사라져만 갑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위로는 단지 주님이 오실 ‘그 날’로 돌아가라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 날’을 떠올릴 때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관용구 처럼 사용합니다. 오늘 3독서 복음서가 전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3
오늘 복음서의 내용은 달란트 비유 만큼이나 유명한 비유의 말씀인데, 결혼이라는 잔치가 배경이며 매개입니다. 매우 즐겁고 복된 날입니다. 유대 풍습에서는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가서 종교적 예식에 따른 결혼식을 치르게 됩니다. 그리곤 해가 질 무렵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며칠 동안 함께 춤을 추고 노래 부르고 흥겨운 혼인 잔치를 벌이게 되는데,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올 때 사람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나가서 그들을 마중하게 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열 처녀는 신부를 데려오는 신랑 일행을 기다렸다가 혼인 잔치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이들입니다. 그런데 신랑 일행이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습니다. 길이 좋지 않아서인지, 출발이 늦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예정된 시간보다 도착시간이 자꾸만 지연됩니다. 어둠이 내리고 모두들 등불을 켰는데,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신랑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늦어도 ‘이때 쯤이면 되리라’ 생각한 만큼 기름을 준비했던 이들의 등불은 속절없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넉넉하게 준비한 이들에게 좀 나누어 달라 부탁해보았지만 그러다가 정작 신랑이 도착했을 때 등불이 모두 꺼지면 낭패인지라 그들의 요구는 거절당하고 맙니다. 부랴 부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그만 신랑 일행이 도착했고 뒤늦게 돌아온 여인들은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끝에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우선 주님의 말씀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습니다. 기름을 나누어달라는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한 동료들 사정이야 이해할 수 있다고는 해도, 뒤늦게 기름을 구해 돌아온 이들을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내친 주인의 야박함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셨지만, 분명 5절에 열처녀 모두 잠이 들었다고 하셨으니 말씀의 의도 역시 선명하게 들어오질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본문의 말씀을 기도하고, 말씀읽고,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야 말로 깨어있는 것이라 쉽게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는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던 다섯 처녀들이 문제가 됩니다.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점에서 보면 그들은 분명 깨어있었습니다. 게다가 ‘기름’을 ‘성령’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애당초 성령은 우리가 준비할 ‘무엇’이 아닌 우리를 채우시는 하나님이실 뿐입니다. 또 무엇을 준비해야하고, 또 어떤 점에 깨어 있어야만 하는 걸까요? 이 정도 신앙생활로는 부족한 무엇이 있는 걸까요?
4
먼저 주목해아할 것은, 1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 마 25:1
신랑을 기다리던 여인들은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는 매개체들인 셈입니다. 지금 어떤 능력이나 업적에 대한 평가로 그녀들을 지혜롭다거나, 미련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곳이 ‘천국’일리가 없습니다. 제 잘난 대로 평가받고 우대받는 곳은 이미 이땅에도 즐비합니다. 아니 사실 세상은 늘 그런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여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차이는 ‘기름을 넉넉히 준비했다’는 것에서 갈리는데, 바로 그 차이가 천국을 가능하게 해주는 겁니다. 신랑일행의 걸음이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다만 얼마나 늦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기다리는 이들로서는 신랑의 행렬을 앞당길 재간이 없으니 기다리는 것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때 기름을 얼마나 넉넉하게 준비하였는지는 신랑을 기다리는 마음의 정도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지 않았던 이들은 제 시간에 오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신랑이 돌아올 그곳의 방관자들일 뿐입니다. 신랑 일행이 반드시 돌아올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또 자신들이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면 ‘될대로 되라’거나, ‘어찌되어가는지 두고보자’는 식으로 있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전에 보온밥솥이 흔치 않았을 때 우리네 어머니들은, 밖에 나갔다 돌아올 식구들의 귀가가 늦어질라치면 준비했던 밥이 식을까, 신주단지 모시듯 제일 따듯한 아랫목에 밥그릇을 품어두셨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이들이 밥그릇을 열었을 때 갓지은 듯 모락모락 올라오는 온기안에서 어떻게 해서든 따듯한 밥 한끼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을 먼저 마주치게 됩니다. 시간이 아무리 늦어져도 식구들이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했기에 그럴 수 있던 겁니다.
그러고보니 뒤늦게 기름을 사러갔다가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들은 사실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던 여인들은 모두 각자 자신이 마음을 담은 만큼의 결과를 받아 쥐었을 뿐입니다. 마치 열심히 시험을 준비했던 이에게 합격이 달콤하고 치열한 삶을 통과해온 이들에게는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추억이 감동이 되는 것처럼, 신랑이 돌아올 것을 마음에 귀히 담고 있던 이들에게는 뒤늦게 도착한 신랑일행은 오히려 넘치는 기쁨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깨어있음’은 천국은 갈망과 진실함 앞에 드러나는 나라라는 가르침입니다.5
주님은 아무도 그 날과 그 때를 알 수 없으니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날과 그 때를 향한 기다림의 마음을 지키며 사는 것은 여전히 힘이 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독서는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가 지파별로 살게 될 땅의 분배까지 마친 여호수아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섬기고 믿을 대상을 선택하라는 유언에 회중들은 모두 ‘하나님만을 믿겠노라’고 확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답변에 여호수아는 뜬금없이 너희는 하나님을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에 찬 말을 던집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믿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매우 도발적입니다. 아마도 다들 여호수아가 노망이 난 것은 아닌가 싶고, 격려는 못해줄 망정 꼭 망하라는 것처럼 말하는 그가 밉살스럽게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여호수아의 말처럼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는 일에 기웃거리는 이들이 되고 맙니다.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여호수아기는 훗날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는 시대에 씌여졌다고 합니다. 비록 포로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호령하는 바벨론 제국에서 남부럽지 않을 만큼, 아니 어쩌면 이스라엘에 있었을 때보다 더 풍족하고 그럴듯하게 살게 되면서 그들의 신앙은 점점 무뎌지고 퇴색하게 됩니다. 바벨론이 보여주는 풍성함에 마음을 뺏긴 겁니다. 그런 풍족함과 안락함을 위해 살아가는 것 이라는 바벨론의 질서와 가치에 동화되어간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나안에 들어선 이스라엘도 풍요와 다산을 약속해 주는 바알에 신앙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오늘 우리도 이런 현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출세와 성공을 향한 길, 안정과 넉넉함을 얻는 방법, 그럴듯하게, 제 하고 싶은대로 살고, 제 만족을 이룰 수 있는 오늘의 일에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며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이렇게 살 수 박에 없는 삶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만을 중심으로 사는 삶의 문제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문제에 빠져드는 순간 답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지나치게 현실의 문제에 탐닉하고 과도하게 열중하며 빠져들게 되면, 인스턴트에 길들여져 결국은 깊은 손 맛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을 보는 눈이 가리워지고 맙니다. 가나안의 바알이나, 바벨론의 마르둑과 같은 우상들은 오늘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역사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더 필요했을 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다른 것을 필요로 하며 기웃거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돈도 필요하고, 성공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지만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오늘 섬길자를 택하라’는 여호수아의 질문앞에서 쭈볏거리고 있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6
아직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는 완전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종말’입니다. 꿈이 없다는 것이야 말로 오늘의 힘앞에 굴복하고 내일을 포기한 자임을 인정하는 것처럼, 종말을 잊고 기대감을 상실한 채 살아간다는 것은 이 불의함과 죽음의 땅에 영합하고 타협하며 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겁니다. 어둠에 굴복하는 빛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교회는 하늘을 포기하고 땅에 머리를 파묻고는 살 수 없습니다. 어떤 현실앞에서도 ‘다시 오시마’ 하셨던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종말’은 교회의 기다림이며 주님의 교회에 주어진 꿈입니다.
그러나 또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마지막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 말씀 그대로 그 날과 그 때 역시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는 그 날에 대한 기대와 갈망을 매일 매일 ‘오늘’의 시간안에 담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때를 알수 있으면 믿음안에서 더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날을 모르고 있기에, 주어진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시간으로 경험하며 살 수 있는 법입니다. 늘상 허무와 결핍만 나뒹구는 것처럼 보이던 삶 안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죽음의 날을 알게 되면 남은 시간 매일이 특별한 의미로 채워지는 것처럼, 종말이 삶을 이끄는 근거가 될 때 마침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것들을 발견하는 눈이 열립니다. 비로서 우리의 오늘이 감사와 환의의 날로 구원되는 것입니다.
대체 어떻게 든든하게 ‘종말’에 잇대어 있는 신앙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열처녀의 비유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결코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기름은 나눠줄 수 있어도, 신랑을 향한 갈망이나 그로 인한 기쁨까지 나눠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날을 향한 영적인 선택,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누구도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온 마음을 집중하며 깨어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7
오늘에 절망하는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위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 날이 오늘의 모든 눈물을 닦아낼 만큼의 위로가 되고 있나요? 그 날이 오면 먼저 죽은자들과 남아있는 이들 모두가 공중에 들림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이 땅을 덮을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죽음도 이것을 가로막을 수가 없습니다.
상식과 경험, 돈이 자랑하는 성공신화를 따르는 삶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입니다. 폭력과 불법, 기만과 속임, 절망과 좌절, 죽음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날, 다시 오실 주님의 날에는 모든 것이 뒤바뀔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무력하고 헛되다고 여겨졌던 믿음이 삶의 방식이 되고, 불의에 고개를 떨구며 살던 연약한 의로움이 존중을 받고, 죽음이 힘을 잃고 영원이 일상이 되는 생명의 날, 꿈만 같던 하나님의 통치를 삶의 희열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와 부활안에 담겨있는 예수 사건에서 그 날을 맛 보았습니다. 아무리 원해도 주님의 날을 우리 맘대로 당겨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기다려야하는 것은 기다려야만 채워지는 법입니다. 우리는 이제 오지 않을 날을 막연히 기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서 그 날이 우리의 역사안에 와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초대교회 성도들과 오늘의 우리들 중에 어떤 편이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이 더 힘들고 어려울까요? 대부분 초대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환난이나 핍박이 가득했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무엇이 주님을 믿는 것이고, 무엇이 어둠에 속하는 것인지가 분명했습니다. 문제는 오히려 우리 쪽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이 주님의 일인지, 무엇이 복음인지, 무엇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인지, 또 어떤 것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인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기복주의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기대감을 빼앗고, 주술이 신앙을 밀어내고, 교권이 생명의 영을 질식시키고, 율법이 복음을 짓누르며, 종말론적 기대감에 천착해야할 교회가 세속 질서에 영합하는 오늘에 우리의 교회는 놓여 있습니다. 강한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적과 나의 구별이 어려운 전쟁이 가장 치명적인 전쟁입니다.
우리가 지금 기다려야할 것도, 우리가 믿어야 할 이도 분명합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지키고 세워줄 수 있습니다.
그 날의 주인이 오고 계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재림의 그 날이 바로 오늘인 것처럼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깨어있는 겁니다. 무언가를 더 준비하고, 이루고, 해내겠다는 조급함이 아닌, 우리의 기다림 뒤편에서 영생하는 생명을 무르익게 하시는 성령께 주목하십시오. 두려움이 밀려올 때 다시금 바울의 위로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날에 주님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겁니다. 죽음이 삼킨 이들까지,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모두 불러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억누르는 모든 권세를 상대화시키고 자유케 해줄 것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 집중하고 그분이 주시는 생명에 휩쌓일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우리는 그 힘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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