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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8 성령강림후 24주 | 추수감사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0. 11. 11. 16:17

    성서일과

    • 1독서 | 사사기 4:1 ~ 7 혹은 스바냐 1:7, 12 ~ 18
    •   | 시편 123 혹은 시편 90:1 ~ 8 ( 9~ 10), 12
    • 2독서 | 데살로니가전서 5:1 ~ 11
    • 3독서 | 마태복음 25:14 ~ 30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UScOKmuMbNmGY5jBkDK7HhRxdlIR0TAe/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5unEJq3cWmo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셋'중, '하나'일 수 있는, '은혜'

     

    1

    시절이 가을 끝을 향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 어렵지 않을 만큼 아침 저녁으로 공기가 쌀쌀해졌습니다. 떨구어버리고 싶었건만 코로나의 위협은 여전히 우리 곁을 망령처럼 맴돌고 있음에도, 그런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 없는 () 공간에 있는 것처럼 계절은 유유히 흘러 겨울의 입구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자칫 만물의 덧없음이 상념이 수도 있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때는 어김이 없다 말씀이 정신을 일깨워주는 요즘입니다. 바라기는 흩어지고 사라질 무상의 삶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영혼의 때를 주목하고, 보석처럼 빛나는 매일을 건져올릴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일과 독서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시기입니다. 본문은마지막 때라든가, ‘주님의 날이라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언급하며 우리의 시선을 이끌어갑니다. 특별히 복음서가 전하는 내용은달란트 비유입니다. 24 이후로 주님의 시선은 일관되게주님의 날 주목하고 있음에도, 무슨 연유에서인지 우리는 달란트 비유의 말씀을 각자에게 주어진 재능이나 능력, 그리고 주어진 사명을 고취시키는 내용으로 읽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문의 의도에서 벗어나 예외 없이 함정에 빠지고 마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비교 익숙하고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 본문에는 한명의 주인과 세명의 종이 등장합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맡겼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하나, 어떤 이는 , 따른 이에게는 다섯 달란트, 각자의 손에 맡겨진 재산이 달랐다는 것과, 그리고 받은 것이 달랐던 것처럼 주인이 돌아왔을 그들 각자가 주인에게 돌려준 결과물도 달랐다는 것이 우리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2달란트를 받은 이는 4달란트를, 5달란트를 받았던 이는 무려 10달란트까지 종들은 원금과 함께 두배의 결실을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몫을 톡톡히 해낸 셈입니다. 만일 순위를 매긴다면 1등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대부분 10달란트를 남김 종이야말로 1등이라는 생각하게 겁니다. 하지만 하인들 덕분에 이득을 주인과는 달리, 우리는 애당초 특별한 이유없이 재산을 맡김에서 차등을 두었다는 , 그리고 결과물의 차이로 비교되어지는 이런 모양새가 불편합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다 생각된 자신의 모습에 감정이입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종들을 대하는 주인의 처신은 우리의 불평을대체 무슨 이유로?라는 의문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첫번째, 주인은 2달란트를 남긴 이와 5달란트를 남긴 이들을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평가와 함께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동일한 보상으로 공평하게 대우했습니다. 결실의 차이 만큼 칭찬이나 보상이 다른 것이라는 우리 생각과 다른 주인의 처신에서, 그가 이윤이나 결실의 양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주인의 처사가 불공평해 보이고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우리들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5달란트를 남긴 종의 결실은 압도적입니다. 그러니 사실 그를 1등으로 세워도 뭐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속상해 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1등과 2등을 구분하고 비교하는 틀안에 사로잡힌 우리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칭찬과 타박, 부러움과 시기, 열등과 우월의 평가안에 고스란히 갇히고 맙니다.

     

    두번째, 세명의 종들 중에 한달란트 받았던 종에 대한 주인의 처우입니다. 한달란트를 받고 땅에 묻었던 종은 유대 관습에 따르면 분명 재산을 지켜내는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했고, 결과적으로 주인에게 아무런 손해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인으로부터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을 받음으로 그는 본문에서 유일하게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 기준에 따르면 종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사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인 것이지 주인의 재산을 함부로 굴리다가 손해라도 끼쳤으면 어찌했겠는가 생각해보면, 2달란트와 5달란트를 받았던 종들의 무모함은 꾸짖음 받아야 마땅하다 싶습니다. 주인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마치 만날 없는 평생선처럼 어긋나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제 주님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결실 양에 온통 빼앗겼던 시선을, ‘주인 이해하는 것으로 바꾸어 보아야 차례입니다.

     

    2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재산의 단위는 달란트였습니다. 달란트는 오늘로 환산하면 어림잡아 14억이나 20 정도되는 돈입니다. 그러니 사실 2, 5달란트와 비교해서 보니 작아보였을 , ‘왜 나는 1달란트만 주었느냐?편애하는 주인이라 타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실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다면 1달란트 받은 종을 타박할 주인의 말처럼, 주인 입장에서는 누군가에게 빌려주는 편이 원금에 이자까지 받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안전을 위해서였더라면 더욱이 피붙이인 식구들이나 친한 친구에게 맡기는 편이 타당합니다. 그런데 그는 8달란트나 되는 재산을 모두 종들에게 맡기고 길을 떠났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인이 자신의 종들을 어떻게 여기는지 헤아릴 있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종들이라면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줄 사람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종들은 주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1달란트를 받았던 종이 변명했던 24절을 읽어봅시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 마 25:24

     

    말뜻은 심지 않고도 거두고, 자신이 해치지 않은 것을 끌어 모으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런 사람들이란, 강도나 사기꾼, 혹은 남의 것을 힘과 권력으로 강탈하는 사람들 뿐입니다. ‘굳은이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스클레로스’ 종이 자신의 주인이 이런 악인들처럼 강팍하고, 냉혹한 사람이라 여겼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주인은 지금 투자는 적게하면서,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종들을 채찍질하고어떻게 해서든 이익을 내오라 가혹한 상황으로 몰아세우는 악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두려워하여’ … 두려움이 주인의 신뢰를 져버리고 배신하게 만든 셈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그것 때문에 종을 책망한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주인이 종들을 편애 한 것만은 사실이 아니냐? 불편한 마음을 가질 있습니다. 사람은 2달라트 사람은 5달란트나 주었으면서 나는 1달란트만 받았으니불공평하다는억울함때문입니다. 알게 모르게 세상을 향해 이런 식으로아무도 나를 몰라준다 억울함과 서운함을 너나 없이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입니다. 1달란트 받은 종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15절을 보면 분명히 주인은 그들 각자의재능대로나누어 주었을 뿐입니다. 오히려 종들에게 버거운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주인의 배려가 돋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주인이 평상시부터 자신의 종들을 살피고 헤아려 왔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야만 재능도, 능력도 보이게 됩니다. 자식의 재능을 발견해내기 위해서도 오랜 기간을 애정을 가지고 돌보아 가능한 것이고보면, 주인은 틀림없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종들을 살펴주던 사람이었을 겁니다. 세상은 언제나 기준을 정하고 그것에 맞는 인간이 되기를 강요하고 비교해서 열등감과 소외감으로 내모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는 고사하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능 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세상에 순응하며 내몰려 살다보니 어느새 주인의 고마운 마음은 보지 못하고, 불공평함에 불퉁거림만 남게 것은 아닐까요?

     

    3

    이제 정말 중요한 내용을 살펴봐야할 차례입니다. 분명 본문의 맥락은주님의 ’, ’종말 닿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은각자의 능력이나 재능, 혹은 그것으로 얼마나 결실을 많이 남기는 종이 될 것인가? 재촉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충성된 종들이 씩이나 결실을 남겼다는 업적에서 이제는 그만 시선을 거두어야만 합니다. 본문의 핵심은 19절안에 있는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 

     

    종들은 모두 각자 소유를 맡긴 주인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인에 대하여 아는 바대로 행동했습니다. 1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두려운 대상으로 알고 있는 그대로 안전하게 땅에 묻었고, 나머지 종들은 자신들을 무한히 신뢰한 주인이 베푼 은총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행동했습니다. 어쩌면 1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에게 무슨 유익을 남겨주려고 굳이 위험을 무릎쓰는 것이냐고 다른 종의 행동을 비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각자의 믿음대로 선택한 행동들이 옳은지 아닌지, 칭찬받을 것인지 아닌지가 드러날 날이 왔습니다. 주인이 돌아왔고, 나누어 주었던 재산을 어찌 다루었는지 셈을 하는 날이 찾아왔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지금 우리는 저마다 주님을 이해하고 아는 수준, 자신이 믿는 바대로 정확히 만큼의 몫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24절에서 한달란트 받은 종이 자신의 행동, 자신이 살아온 걸음은내가 주인이 그런 분임을 알았으므로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는 자신이 아는 그대로 주인을두려움 대상으로 보고 있었고,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다음에 이런 기회가 와도 그는 이런 선택을 하며 살게 될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아는 만큼의 수준에서만 우리는 주님을 믿을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지금 주님을 향한 우리의 앎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즐거움이 아닌 두려움으로 몰아넣곤 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은, 종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것인지를 결정하게 겁니다. 주인을 떠올릴 때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이들에게 주인이 돌아와 셈을 하는 날이야 말로 절망과 공포의 시간일 겁니다. 종말을 향해가는 주어진 순간이 고통스러울 밖에는 없습니다. 마치 하루 하루 시험이 다가올 학생들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이미 자신을 향해 무한한 신뢰를 전해준 고마운 주인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어떨까요? 종말은 나를 믿어주었던 몫과 주인을 향한 나의 신뢰가 얼마 만큼인지 여실히 드러나게 되는 즐거움의 날일 밖에는 없습니다. 날까지 이런 이들은 주어진 매일안에 무엇을 채우며 살아갈까요?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 고전 13:12

     

    역시 바울처럼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생명에서 소외되어 있던 제가 바울의 말처럼 그분으로 인해 빛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어제까지 걸어온 걸음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따지지 않고 지금도 내게오늘 허락되어 있다는 사실이,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도있는 그대로의 무한한 당신의 신뢰로 덮어주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있게 해줍니다. 그러니 저는 맘으로 날을 고대할 밖에 없고, 날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매일이 기쁨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4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의문이 있습니다. 대체 어떤 마음이었길래 주인이 아낌없이 재산을 맡길 있었는가와 2달란트와 5달란트 받은 종들이 무슨 생각으로 주인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칠지도 모를 무모한 행동을 것일까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본문에는 주인이 얼마나 부자인지 아무런 정보가 담겨있지 않습니다. 그가 맡긴 것이 전재산인지, 일부를 맡겼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종들이 장사를 하다가 몽땅 탕진하여 손해를 끼친다고 했어도 크게 개념치 않았을 만큼 부자였을지도 모릅니다. 주인은 종들을 칭찬하면서 자신이 주었던 것이적은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21, 23) 하지만 주인에게적은 이었다고, 종들에게도적은 수는 없습니다. 주인이 하나, 하나가 종들 입장에서는 주인의 모든 것과도 같은 겁니다. 1달란트 받은 종만이, 주인이 적은 것을 주고 많은 것을 거두려고 하는 이라고 불퉁거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나는 대체 몇 달란트나 받았을까' 에서 머물고 마는 우리인데, 주님의 말씀안에서 지금 우리들 중에 누구라도 주인앞에 있는 세명의 종들중에 하나라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크게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형편없어 보이고, 나락에 떨어진 것만 같은 삶이라고 해도, 주안에서 신실하게 살아왔든, 헤매이고 방황하면서 지내왔든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신뢰와 함께 아들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전히 주인에 대한 감격보다는나는 얼마 만큼의 달란트를 받았을까?라는 생각으로는 결코 헤아려 없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져있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주님은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하는가?’,  왜 내게만이라며 불평하는 우리를 향한 무한한 신뢰를 지금도 거두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나온 한해의 시간을 셈하여 보는 오늘처럼, 모든 삶의 시간을 셈하게 되는 주님의 날을 마주하게 겁니다. ‘주님의 재림, 혹은 각자에게 찾아오는죽음 우리를 주님께로 이끌고 갈겁니다. 그리고 그날, 주님은 우리 개개인에게 아낌없이 주셨던 생명, 시간, 재능, 장점, 직업, 직분, 재물 등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며 살아왔는지를 물으실겁니다. 여러분은 답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인은 2달란트와 5달란트를 남긴 이들의 성과 때문에 그들을 칭찬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미 모든 것에 풍성했던 주인에게 그런 성과 자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주인은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며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종들, 그들 자신을 칭찬하셨던 겁니다.

    과연 우리는 오늘 무엇을 위해 주님이 주신 것들을 소비하며 살고 있는 걸까요? 각자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저로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들을 있도록 감동주셔서, 주인의 날을 기쁨으로 바라보며 있도록, 주님을 향한 신뢰를 올려드리며 있기를 간구할 뿐입니다. 매일을 종말의 날로 살아가는 걸음마다, 아낌없이 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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