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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부활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4. 2. 11:36
성서일과
1독서 | 사도행전 10:34 ~ 43 혹은 이사야 25:6 ~ 9
응송 | 시편 118:1~2, 14 ~ 24
2독서 | 고린도전서 15:1 ~ 11 혹은 사도행전 10:34 ~ 43
3독서 | 요한복음 20:1~ 18 혹은 마가복음 16:1 ~ 8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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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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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은 알고 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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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를 뚫고 꽃봉오리를 터트리는 봄의 기운 앞에 그렇게 매섭던 겨울도 온데 없이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대지를 둘러볼 수록 죄와 죽음을 깨트리고 생명의 문을 열어젖히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감격하게 됩니다.
하지만 해마다 목사로서 맞이해야하는 부활아침은 또한 어렵고 힘들기만 합니다. 그 이유는 우선 ‘부활’을 설교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의 빛 안에서 희미하게 바라보았을 뿐, 손에 잡은 것 같지 않은 입장에서 또한 다 아는 듯 설교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답답하고 두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살리는 것 보다는 오히려 죽음에 익숙한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영원한 생명을 설명한다는 것은 아득한 일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살려내셨다는 ‘부활’ 소식이 기쁨이 아닌, 왜? 자신은 피눈물을 삼키며 죽음의 현실을 지나야하는지 막막한 이들이 곳곳에 있는 한 예수 부활의 소식은 어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이런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것인가라는 물음앞에서 절망할 수 없는 우리이기에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이 서려있는 예수 부활의 사건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것은 ‘부활’은 ‘십자가’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증인으로 증언해야하는 복음은 이 두가지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야 전하기 어렵지 않은 사실이지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은 건전한 이성과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믿을 수 없는 일이니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들어도 말이 되지 않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이며, 우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여전히 말도 않되는 이 사건을 증언해야만 하는 갈등 사이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덮어놓고 믿으라’는 것은 우리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왜? 교회공동체가 부활의 증인일 수 밖에 없었는지, 예수의 부활안에서 교회는 무엇을 경험한 것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증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아직 부활이 믿어지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상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기 이전까지는 제자들도 주님이 말씀하셨던 ‘십자가에 달려 죽은뒤,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을 믿지 못했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죽은 줄 알았지만 사실은 아직 살아 있었던 경우는 있어도, 호흡이 멎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과 경험은 이 사실을 단단히 붙들고 있습니다. ‘부활’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고 돌무덤안에 안치되어 죽음이 확정된 이후에 제자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죽음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 본문은 여전히 인류에게 낯설은 사건을 소개합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첫 목격자는 ‘마리아’라는 여인입니다. 일전에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내어좇아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던 그녀입니다. 복음서 기자가 가뜩이나 믿기 어려운 부활을 전해야만 하는 입장에서 마리아를 부활의 제1 목격자로 기록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여인들의 증언은 재판에서 효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이들로부터 비웃음이나 비난을 받는 빌미가 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전하는 것과 믿게 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복음서 기자나 초대교회 입장에서는 누구나 신뢰할 만한 증인을 내세우거나 사실을 그럴듯하게 조작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오늘도 비일비재합니다. 하지만 교회공동체는 이 사실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없다고 해서 그럴 듯하게 지어낼 수도 없고, 자신들을 조롱하거나 비난한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증인은 본 것을 그대로 증언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빈무덤을 처음 발견했던 마리아의 반응을 비교적 세심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기쁨이나 환희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평행본문인 마가복음에 따르면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으면 무덤에서 도망친 여인들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막 16:8) 죽은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죽은 자는 무덤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말할 수 없고, 움직이지 않음이 정상인데, 그 상식과 일상이 전복되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마리아나 제자들 모두 빈무덤을 보면서 모두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빼돌렸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무덤까지 찾아왔던 제자들은 황망한 마음에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여전히 무덤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힘앞에서 억울하고 허무하게 살해당하셨던 주님인데 이제 그 시신마져 잃어버렸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마리아에게 주님은 너무나 특별한 분이셨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망과 무력함에 사로잡혀 울고 있던 그녀가 부활을 목격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지 못하고 돌아갔던 제자들과 그녀는 무엇이 달랐던 걸까요? 시간이 지나기는 했어도 이후에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했던 제자들과, 오늘 우리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그리고 부활주일 아침, 예수 부활의 이 놀라운 사건을 경축하기 위해 모인 우리와 이 신앙의 밖에 있는 이들과의 차이는 또 무엇일까요?
3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달리 마가복음을 기록했던 마가는 마리아의 시선을 예민하게 주목하고 따라갑니다. 마리아가 무덤의 문이 열려진 것이나, 무덤안을 들여다 보는 장면에서 요한복음은 ‘보다’라는 단어로 ‘주의’를 기울이며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살펴본다는 뜻의 헬라어 ‘블레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16장 4절 마리아가 돌무덤의 문이 열려져있음을 보았다는 대목에서 ‘보았다’는 뜻의 동사로 ‘아나블레포’ (ἀναβλέπω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앞선 8장 24절 주님께서 소경을 고쳐주셔서 눈이 열리게 되었을 때 사용되었던 그 단어입니다. 마땅히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이제 보게 되었다는 뜻을 가진 이 단어를 마가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열어젖혀놓은 돌무덤의 문을 마리아가 보고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당사자인 마리아 본인은 정작 자신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 있으면서도, 아직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의 시신에 관해서만 질문하고 있는 대목을 보아도, 그녀가 천사들이나 주님을 눈으로 보고는 있으나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날이 너무 어두워서 그랬을까요? 사실 천사를 본다는 것이나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선뜻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설마 그럴리 없다’며 눈을 부비거나 이내 곧 체념하는 것이 자연스운 행동입니다. 마치 일상에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눈으로 보면서도 깨닫지도 믿지도 못하며 아무일 없는 듯 무심히 지나치고 마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눈은 뜨고 있으나 보지 못하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야’ 부르시는 말씀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분명 지금까지 보고 있던 것이었음에도 그녀의 눈에 전혀 다른 것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된 겁니다. 처음 시신의 행방을 물을 때 동산지기인줄 알았던 그이를 향한 호칭은 ‘주님’(키리에)이었는데, 지금 자신의 이름이 불리워진 이후 그녀는 ‘랍오니’라는 호칭으로 그를 대하고 있습니다. ‘주’(키리에)라는 호칭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특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들을 대할 때 ‘아무개 님’하고 부르듯 상대를 높여부르는 평범한 존칭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라는 뜻의 ‘랍오니’는 스승과 제자라는 특별한 관계안에 있는 사람만 부를 수 있는 호칭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이전의 주님을 대할 때 보다 더욱 생생한 관계의 경험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잠들은 영혼을 일깨우고, 죽어있는 생명을 살려내는 주님의 말씀이 그녀를 불러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난 이후 그제서야 무덤문이 열렸던 것이나,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모든 상황이 하나님이 행하신 사건임을 알아채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부활을 목격한다는 것이 전적인 은총 사건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이 마리아가 주님의 은총을 입게 했던 것일까요?
길을 지나는데 노란 개나리가 눈에 들어왔고, 벌써 봄이구나 싶었을 때 갑작스레 가슴이 답답해져왔습니다. 해마다 앓게되는 답답함입니다. 누군가에게는 흐뭇하고 기대감이 서린 봄이지만, 벌써 7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이 봄이 끔찍하고 잔인한 고통으로 새겨질 세월호 유가족들 생각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돈이 많고, 출세하고, 성공을 해도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인간의 행복이 그런 것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분들 보다 더 잘 아는 이들은 없을 겁니다. 세상에서 아파본 사람들,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끌어안고 고통 가운데 머무르는 이들입니다. 빈무덤앞에서 절망하며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 같은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안에서만 위로와 복을 경험하는 애통하는 이들입니다. 그런가하면 다른 한편에는 여전히 ‘아직도 세월호냐’ 혹은 ‘이제 그만 잊으라’ 윽박지르고 강요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잃어버린 그것의 가치를 고스란히 애통하는 사람들과 달리 덧없는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며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등진채 생명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셨고 그것이 되돌릴 수 없는 현실임에도, 주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멈추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위로안에서 삶의 구원을 경험했었기에, 주님외에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을 잃는 순간 세상 전체를 잃는 것과 같습니다. 그녀에게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는 은총이 주어진 것은 주님을 갈망하는 이에게 주어진 하늘의 선물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왜? 특별한 사람에게만 부활은 사건으로 경험되는 것인가?라고 따져물을 자격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경험을 부러워는 했지만, 그토록 주님을 만나는 것을 갈망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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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통해 생명사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부활 사건의 실체를 좇아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듣고 흘려버리는 소리가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마리아’를 부르시듯 ‘나’를 부르시는 육화되는 말씀 사건이 되는 것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죄’를 알아야 하듯,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죽음’에 예민해져야만 합니다. 사람들을 짓누르며 곳곳에 도사리는 ‘죽음’이 보여야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를 죄 아래 ‘죽었다’라고 선언하는 말씀을 전혀 공감하거나 내 이야기로 실감하지 못한 채 흘려버립니다. 여전히 살아있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0년을 더 살고 100년을 더 산다고 해도, 가난하게 살든지 부자로 살든지, 원하는 것을 이루든 그렇지 못하든과 관계 없이 누구도 다가오는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루 세끼만 있어도 걱정없이 넉넉히 살 수 있음에도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것 때문에 불행하고 불평하며 삽니다. 제 나라 국민에게 총을 들이대어서 권좌를 얻으려는 이들이나, 제가 낳은 자식을 불편하다고 때려 죽이는 이들까지 우리는 너나 없이 모두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우리가 죄와 죽음의 힘 아래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불쌍하고 불행한 실존이며, 그런 우리를 절망으로 억압하고 짓누르는 힘이 바로 죽음입니다. 생명의 주인을 잃어버렸으니 죽음을 직면하고 난 이후 인간은 내일에 대한 불안증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스스로를 구원해 보려고 일상의 과잉에 스스로를 내몰고 몸부림칩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 부족함과 허무뿐입니다. 끊임없이 내일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음을 인정받아야만 만족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정을 얻었는지 확인하는 손쉬운 ‘비교의식’에 빠져드는 이유입니다. 비교하려는 마음의 정체는 타자를 나보다 못하다 불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정죄하는 형벌일 뿐입니다. 게다가 비교가 치명적인 것은 타인을 향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늘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나는 겁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을 성경은 살아 있다 말하지만 죽음의 지배안에 갇혀 있으니 ‘너는 죽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생의 전부를 가난하고, 버림받았으며, 상처와 배신을 당했고 불행의 밑바닥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짊어지셨던 삶은 우리가 가장 절망스런 밑바닥의 삶이라 비교하며 떠넘기려하던 모든 것입니다. 우리의 비교에 내몰리고 손가락질을 받고 꺼림을 당하게 되는 그 절정이 바로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끌어안으셨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 주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 사도행전 10장 34 ~ 35
부활은 비교에 내몰려 소외당한 땅에서 마리아처럼 지키시고 구원해 주시는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눈이 띄어지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 편의 어떤 노력이나 애씀이나 수고함도 필요로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오직 ‘믿음’만을 의로움으로 삼으시고 우리를 인정해주시고 받아주셨다는 사실에 영혼의 눈이 띄여지는 순간부터, 일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평상시 눈에 띄이지 않던 모든 것들안에서 우리의 살아감과 세계의 모든 것들을 지켜내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손길을 발견해내는 겁니다. 벚꽂의 봉오리를 보면서 찬란하게 흩날릴 봄을 기다리는 것도, 그렇게 피어 흩어지고 마는 순간 조차도 제 힘으로 피워낼 수 없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며 솔로몬의 화려한 의복보다 귀하게 보입니다. 곧 시들고 내년에 다시 필 것이라 죽음에서 눈이 띄어지는 것이 ‘부활’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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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꼭 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서신서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들의 명단을 소개하는데, 7, 8절이 눈에 띕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야고보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제자였으며, 게다가 바울은 주님을 뵌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부활의 증인이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걸까요?
예수 부활의 사건은 예수님이 생리 의학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다시 사셨는지를 연구하고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 부활의 사건이 소수의 무리에게만 드러났고, 경험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물음은 예수의 부활이 믿을 만한 것이냐?가 아니라, 과연 비굴하고 겁많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무엇을 경험했기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었는지를 물어야만 합니다. 억만금을 얻고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고 그만큼의 세상이 되어도 여전히 사람하나 바꿀 수 없고 구원은 요원하기만 우리시대가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 길을 가보지 않고 옹달샘이 있는지, 노루가 있는지 어찌 믿을 수 있느냐? 되묻는 물음에 저는 다른 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길은 앎이 아닌, 따라 걸어갈 때만 의미가 있는 겁니다. 처음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마리아와 제자들, 그런 목격자들로부터 부활을 전해들었던 교회공동체, 그리고 오늘 예수 부활의 말씀을 전해들은 우리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모두 부활의 증인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깊은 관계 안에 참여하고 들어선 이들에게만 목격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붙잡으려 하고 세상이 이야기해주던 것들이 구원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하는 삶속에서도 다시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은총, 죽음을 거스르시는 예수 부활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갈급한 이들에게,
빈무덤 같은 인생 한복판에 선 마리아의 눈을 열고 부활의 신비를 목격하게 하셨던 성령께서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해듣는 우리를 부활의 증인으로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신비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멘.‘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는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 고린도전서 15:12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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