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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부활후 2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4. 7. 23:47
성서일과
1독서 | 사도행전 4:32 ~ 35
응 송 | 시편 133
2독서 | 요한일서 1:1 ~ 2:2
3독서 | 요한복음 20:19 ~ 31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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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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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Tissot (French, 1836-1902). The Appearance of Christ at the Cenacle 다시, 하나가 되는 길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후 두번째로 맞는 주일 아침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무너트리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으니, 이제 이 생명 사건에 참여하고 살아내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풀어야만하는 커다란 신앙의 숙제가 남아있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함께 부름을 받고 주님의 교회로 하나된 우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활의 능력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납해주시는 은총을 힘입고 그분과의 일치를 경험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치’되었다는 말은, 주님이 내안에 내가 주님안에 거하게 되는 ‘하나됨’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하나됨을 경험할 때 비로서 우리는 서로의 사이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게 되고, 그런 다음에야 비로서 세상과 만물이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부활의 사건을 지나왔음에도 세상은 오히려 분열과 갈등이 날마다 깊어져가는 형국입니다. 거창하게 세상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매우 슬픈일이지만 부활의 증인인 우리 안에서도 여전히 서먹하고 불편한, 서로를 향한 보이지 않는 두터운 벽이 드리워져있음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요 자매라고 고백하지만, 순간 순간 마음안에서 들려오는 ‘정말 그러하느냐?’는 물음앞에서 우리는 늘 달리 우물쭈물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제 자식을 대한다면 스스로가 참아주고 용납해줄 텐데, 기준에 맞지 않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우리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경계밖으로 상대를 밀쳐내고 맙니다. 따지고보면 그 기준이나 기대라는 것도 전적으로 ‘나 자신’ 속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무관심하고 냉담한 관계를 가족이라 할 수 있을까? 싶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실은 가족은 아니었던 걸까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예수 구원의 감격을 함께 나누어야 할 이곳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 걸까요? 신앙의 본질이 아닌, 변죽만 울리고 있는 걸음이라면, 이제는 복음의 말씀앞에 멈추어야 할 때입니다.
2
그 동안 인류는 갈등과 깨어짐 안에서 어떻게 하면 세상이 하나가 되고 평화를 성취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애써왔습니다. 종교, 철학, 정치, 교육, 역사 모두가 그런 걸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과 기억은 이런 노력들이 모두 수포로 그치고 깨어졌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1독서 본문인 사도행전 4장 말씀이 보여주고 있는 초대교회의 삶의 모습은 마냥 꿈만 같고 부럽기만 합니다. 34절은 그들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으며, 더 많이 가진 이들이 더 없는 이들을 위해 자신들의 밭과 집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었기 때문이었음을 소개합니다. 무관심하지 않고 더 가진 이들의 눈에 더 가난한 이들이 들어왔다는 것이 더 놀랍습니다. ‘왜? 같은 주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없을까?’ 싶으니 안타까움과 서글픔이 함께 밀려옵니다. 물론 오늘도 이런 삶을 표방하는 신앙 공동체들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이런 나눔의 삶을 사는 분들은 많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허락된 여유를 나누는 것도 쉽지 않은데 전재산을 팔아 나보다 못한 이들을 위해 나눈다는 것은,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성공이나 자기 구원으로 삼는 우리시대에는 보통의 경우는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이렇게 자신의 것을 모두 나눌 수 있게 되면,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세상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또한 아닙니다.
그 동안 인류는, 그리고 지금도 섬김, 사회봉사, 인도주의적 활동들, 그리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제도나 이데올로기들을 통해 가난과 소외로부터의 인간을 해방시켜 보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안에서 우리는 그런 선한 동기들이 결국은 모두 실패했고 오히려 허무와 갈등, 반목과 상처를 양산하는 일을 되풀이하고 말았다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과연 인류 모두가 한 가족처럼 평화하는 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날은 올까요?
3
사도요한은 자신의 첫번째 서신서에서 세상의 구원과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근거를 신앙안에서 제시해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한1서 :3
온전한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서 사도 요한이 우리를 초대하는 자리는 성부 하나님, 성자이신 그리스도와의 사귐의 자리입니다. 어설픈 신앙이 아닌, 인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소망이 하나님과의 사귐의 자리에서만 가능함을 꿰뚫어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요한 사도의 말씀안에서 곧장 ‘십자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십자가’는 언제나 수직과 수평의 두개의 나무로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십자자 밑에 이르러 올려다볼 때 우리의 시선을 이끄는 것은 하늘로부터 땅으로 이어지는 수직의 기둥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의 바른 기둥을 세우라는 엄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모든 허물을 사랑으로 덮으시고 용납해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르게 회복하지 못하면서, 울타리와 담으로 둘러쌓인 타자와 자신과의 관계를 평화로 회복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조건없이 순결한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자신의 연약함과 상처를 드러내고 상처입은 타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바로 이 사실을 경험하고, 또한 하나님과의 화해로부터 시작해서 나를 둘러싼 세상을 하나님과의 화해의 자리로 초대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결국 세상의 평화와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을 향한 믿음의 문제를 지나야 한다는 사도요한의 통찰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4
3독서 복음서 기자인 요한은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던 그 날 오후의 제자들 행적을 좇고 있습니다. 곧 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실망과 더불어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 그들은 문을 걸어잠근채 유대인들의 낯을 피해 숨어 있습니다. 발각이라도 되면 자신의 스승처럼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가 그들을 짓눌렀을 겁니다. 현실이 가져다주는 공포와 더불어 스승을 배신했다는 죄책감과 치욕으로 온 방안이 뒤범벅되어 있었을 겁니다. 부끄러움과 책임감 때문에 아무도 말을 못하고 침통한 침묵만 가득합니다. 결국은 스승의 죽음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함께 숨어들어 벌벌 떨고 있던 것 뿐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실망스럽게 합니다. 죽었다고 여겼던 주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을 박차고 나오셨건만, 이 사실을 모른채 죽음의 힘에 눌려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무덤’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덤에 있어야할 주님은 무덤밖에 계시고, 무덤 밖에 있어야 할 이들이 무덤에 갇힌 꼴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홀연히 그 방안에 나타나셨고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는 축복의 말씀이 방안의 무거운 침묵을 깨트렸습니다. 놀랍습니다.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는 쳤지만 사람들앞에서 자신을 부인했던 베드로 뿐만 아니라, 자신을 죽음 가운데 버려두고 도망친 그들이 모두 그곳에 모여있습니다. 정작 그들과 마주했을 때 얼마나 야속하고 미웠을까?싶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거나, 배신했던 그들 하나 하나를 지목하며 핀잔을 주셨어도 속이 풀리지 않았을 텐데, 믿음에 실패하고 숨어있는 그들을 지금 주님은 위로하고 계신 겁니다.
요한은 제자들을 위해 ‘평강’을 빌어주시는 말씀에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샬롬’이 아닌 ‘에이레네’(Είρήνη)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이레네’안에는 특별히 ‘관계’ 가운데서 누리게 되는 온전함과 평화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평강’을 전하셔야 했던 이유는 지금 제자들이 깨어진 관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무너지고, 두려움과 공포, 죄책감에 짓눌려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과 소명마져 모두 잃어버린 것도, 살아있지만 무덤안에 갇혀있는 죽은 사람들처럼 짓눌려 있게 된 것도 모두 주님과의 관계성이 깨어진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제 나와 다시 하나가 되자’는 요청인 겁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제자들을 당신과의 관계안으로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평강안에 머물게 될 때 비로서 어둠만 가득했던 그들의 영혼안에 생명의 기쁨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시고, 이런 모습일지라도 지금의 삶이야말로 주님이 용납하시는 은총의 선물임을 믿게 될 때, 놀랍게도 찢어지고 갈라지고 나뉘었던 삶 뿐만 아니라, 영혼도 주님과 한몸을 이루게 됩니다. 죽음의 겁박에서 해방된 풍성한 생명을 경험하고 누리는 참된 평강입니다. 이천년전 예수의 제자들처럼, 교회는 성찬의 빠스카 안에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평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식탁은 상황과 환경에 의해 찢기고 깨어졌던 주님과의 생명관계를 회복하는 은총의 자리, 주님의 초대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5
며칠후 주님은 다시금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들을 다시 만나셨던 곳은 여전히 죽음을 피해 숨어들었던 빈무덤같은 방안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고 기쁨을 얻었던 기억이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중 누구도 단박에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하루만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안에 감추어진 억울함, 치욕, 상처, 무력감, 고통과 자기 연민으로부터 온전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해보지 못한 채 닿으려는 설익은 우리의 평화가 결국 늘 가식이나 위선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말하는 평화를 보증하고 지켜낼 힘이 우리안에는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못자국난 손과 옆구리에 제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던 도마에게도 찾아가주셨습니다. 믿음의 관계가 온통 깨져버린 제자를 다시 당신과 하나됨의 자리로 이끌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사실 도마는 우리들 모두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하고 증인의 길에 초대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9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은, 실상은 보지 않고도 주님을 믿으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할 우리 모두를 향한 위로와 축복의 말씀입니다. 보는 것보다,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과 신앙은 보지 못하니 믿지 못하고, 보아야만 믿겠다는 도마의 불퉁거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정말 보아야만 믿을 수 있는걸까요? 보는 것이 먼저입니까? 믿는 것이 먼저입니까?
‘보여줘야만 믿겠다’는 말을 들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관계에서 듣게 되는 말입니까? 상대와의 사이에 앎의 관계가 없거나 깊지 않을 때나 상대방을 믿지 못할 때, 세상에서의 맺어지는 관계안에서 마땅하고 당연하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연인 사이에서, 부모 자식 사이에서, 가족 사이에서는 이런 말은 오히려 무례함이 되고 맙니다. 이런 특별한 관계 안에서는 그런 요구나 조건없이도 상대를 믿을 수 있고, 또 그렇게 믿어야만 합니다. ‘사랑’이 근거가 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그 나라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발견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주님을 믿게 되는 겁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증인들이 모두 주님을 사랑했던 이들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이 배신으로 깨져버리고 말았던 베드로가, 또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해서 목숨까지 내어던지는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까?
먼저 찾아오셔서, 손을 내미시며, 당신의 풍성한 사랑의 관계안으로 초대해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그 일을 이루시는 겁니다.
세상의 평화와 구원을 위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하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먼저 자비로우신 한이 없는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배신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의 평강안에 거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에 잇대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과 하나가 되는 관계안에 거하는 길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목사는 이 사실을 ‘믿음의 도는 점점 하강하고, 사랑의 도는 점점 상승’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모습이라고 말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하나가 되자’는 요청과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든 이들에게, 또한 그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다함이 없는 은총과 능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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