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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5 성령강림후 12주 (*남북평화통일공동기도주간)성서의 거울 앞에 2021. 8. 11. 23:00
성서일과
1독서 | 열왕기상 2:10 ~ 12, 3:3~14 혹은 잠언 9:1 ~ 6
응송 | 시편 111 혹은 34:9 ~ 14
2독서 | 에베소서 5:15 ~ 20
3독서 | 요한복음 6:51 ~ 58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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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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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기억하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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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에덴에서 일어났던 인류 최초의 범죄인 선악과 사건이 결국 하나님처럼 지혜롭고자 했던 욕망에 사로잡힌 결과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읽게 됩니다. ‘지혜’를 향한 인간의 갈망과 욕망이 태초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더 많이 안다는 것이 능력이고, 복처럼 여겨지는 세상, 지혜와 지식, 정보 자체가 돈이 되고 권력이 되는 세상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부자가 되고, 저렇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 것처럼 탐스럽게만 보이는 현대판 선악과들이 여기 저기에 산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처럼 달콤해보이기는 해도, 세상이 말하는 지혜라는 것은 늘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에 차이와 차별을 부추기고, 일단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어 보려고 손을 내밀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를 무엇이 옳은 것인지 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에 빠트리고 맙니다.
무더위와 자연재해, 바이러스의 공격을 통해 눈 앞에 보이는 몇푼의 돈 때문에 환경을 오염시키는 일에 주저함이 없던 결과가 삶의 근간 자체를 파괴하고 말았다는 것을 뼈져리게 배우고 있는 요즘입니다.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집값을 잔뜩 올리려고 재개발이나 재건축, 투기에 혈안이지만, 결국은 저 자신도 비싼 집값에 내몰리고 마는 다같이 고통받는 신세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공부만 잘하면 되고, 능력 있고 돈 잘 벌면 최고의 결혼 상대라고 하더니, 결국 제 부모 등에 칼을 들이대고, 아내와 제 자식을 무참히 죽이는 인간들을 양산해 내고 말았습니다.
지식은 산더미 처럼 쌓았는데 막상 마땅히 보아야 하고, 들어야 하는 지혜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살다보니, 삶이 자꾸만 무질서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바람이 불고, 조금만 환란이 닥쳐와도 삶의 방향을 잃고 이리 저리 감정에 휩쓸리고 맙니다. 물 위에 떠도는 부유물처럼 ‘그냥’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과거 수천년간 쌓아 올린 인류의 지혜보다 많은 양의 지식이 매일 쏟아져나오는 세상이지만, 과연 우리 세대를 지혜롭다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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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잃어 버리고만 우리 시선은 이제 더 중요한 것, 더 본질적인 것들은 쉽게 놓치고, 쓸모 없이 사라지고 말 허무함을 쫓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일상을 그렇게 살다보니 가장 고귀한 것을 추구해야하는 신앙 마져도 터무니 없이 왜곡되어갈 수 밖에는 없습니다.
1독서 열왕기상 말씀에 등장하는 솔로몬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그런면에서 우리 민낯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해줍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들 대부분은 솔로몬을 부러워 합니다. 아이들은 그의 지혜를 부러워하고, 어른들은 가장 번성했던 시절을 누렸던 그의 성공을,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다 가졌던 그의 부유함을 부러워들 합니다.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그를 흉내라도내서 그것들을 가져야겠다는 탐심은, 신앙적 열심의 모습으로 변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도 솔로몬을 우리처럼 평가하고 있을요?
‘그가 하나님을 버렸다!’ 이것이 솔로몬에 대한 성경의 최종평가입니다. 솔로몬은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맞으면서 어느새 그녀들의 신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고, 하나님을 등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말년에 이르러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서 떨어졌으며,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분열되고 패망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의 인생 전체를 향한 성경의 신랄한 평가입니다. 지혜의 상징이었던 이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그였지만, 그는 아버지 다윗에게 있던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지금 우리는 다윗이 아닌, 솔로몬을 닮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솔로몬에게 찾아왔던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라는 마음은 어느새 감사할 것도, 감사할 이유도 보이지 않는 무료하고 무력한 시간이 되어버렸고, 그는 결국 삶 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 시편 111편 4절
하나님을 향하고 있던 시편 기자는 솔로몬의 실패야 말로 ‘오늘도 하나님을 기억해내야하는 단 한가지 일’이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응송인 시편 34편과 111편의 결론은 오늘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이 말씀을 지키고 율법과 계명을 따르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것, 주님을 기억하는 것만 빼고,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을 해낼까? 내가 가진 어떤 것을 드러내야할까?라는 열심에 매몰된 우리를 향한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오늘 하나님은 없다’ 말하는 세상속에서 ‘지금, 여기에 계신 하나님’을 기억해내는 투쟁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해 낼 때 삶이 환희와 기쁨으로 이어지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순간이면 삶은 온통 싸늘한 어둠과 절망, 그리고 혼돈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하나님을 기억해낸다는 것이야 말로 삶을 구원해내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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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복음서 말씀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내실 것’ (54절)이라고 하시면서, 오늘도 당신을 영생의 양식으로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먹으라’는 표현이 색다릅니다. 그 동안 ‘먹으라’고 하실 때마다 헬라어 ‘파고’ (φάγω)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오늘은 ‘트로고’ (τρώγω)라는 낯설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우연일까요? 아니면 무엇인가 더 특별한 의미를 담아내려고 했던걸까요?
‘트로고’라는 단어의 구체적인 의미는 ‘잘근 잘근 씹어 먹는다’는 뜻입니다. 쩝쩝 소리를 내면서 맛있게 먹는 모습이 마치 눈에 보일 것처럼 생동감 넘치는 모습입니다. ‘당신을 먹으라’는 주님의 말씀이 상투적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깊이 깊이 꼭꼭 되새기라고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를 십자가에 내몰아 죽였다는 것, 그리고 그를 희생시킴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다는 것을 뼛속까지 깊이 곱씹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씹어 먹을 때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 죽이고 나서야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해 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우리는 주님의 다함이 없는 용서와 사랑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생명의 빵과 피가 되어주신 주님을 삶으로 곱씹으며 바로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해내는 것입니다. 성찬을 제정하시면서 당신을 기억하며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그 식탁이야 말로 부활하신 당신과 제자들이 만나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기억해내는 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닌, 바다 속 깊은 밑바닥에까지 침잠되어 있는 것 같은 어제의 이야기를 뒤흔들어 살아 있는 이야기로 오늘에 현실화될 수 있도록 생명을 부여하는 것, 곧 주님과 만나는 성례전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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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 57절
주님은 직접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대하며 사셨던 당신의 삶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고 말해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주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로 인해 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모든 삶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먹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죽고 사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 달려있고, 하나님안에 있으니 의미가 있는 겁니다. 주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께 잇대어 살아가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영생하도록 주시는 생명을 얻는 참된 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르며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써보낸 서신서 5:17말씀이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에베소서 5:17
주님의 뜻을 모르며 사는 것이 어리석음이고, 반면에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뜻을 ㄴ잘 알고 계십니까? 주님의 뜻을 알게 된다면 좀더 지혜롭고 복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곧장 이어지는 18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 에베소서 5:18
바울이 말하는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삶이란 결국 술 취하는 방식으로 살지 말고, ‘성령에 취한 사람처럼’ 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술 취하는 것’과 ‘어리석음’이 이어지고, ‘성령의 충만’은 ‘세월을 아끼고, 주님의 뜻을 이해하며 사는 것’과 이어짐으로 서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표현을 누가가 기록했던 사도행전에서도 보았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게 되었을 때, 그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했던 말은,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 행 2:13
였습니다. 술에 취하는 것이나 성령에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이 사실상 술이나 성령에 의해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내 몸에 들어온 술이 나를 사로잡은 것이 술 취함입니다. 일단 술에 취하게 되면, 제 아무리 나는 술 취하지 않았다고 말해도, 말하는 것이나, 걷는 것, 행동, 눈 빛만 보아도 누구라도 단박에 술 취한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술의 힘이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에 의해 사로잡힌 사람에게도 ‘성령’의 능력과 위엄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술에 취하면 내 뜻과 관계 없이 술의 힘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처럼, 애당초 무언가 애를 쓰고 힘을 쓰는 것일 수 없습니다. 성령이 주도권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생각, 기대, 말하는 것과 지식도 또한 성령의 바라는 바를 자연스럽게 닮아가게 되는 겁니다. 성령께서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이며 지혜라는 것을 증언하고 깨닫게 하시는 영입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지향하시는 목적지입니다. 결국 ‘성령충만’, 또는 ‘성령’에 의해 사로잡혔다는 말은 결국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간다는 뜻으로 읽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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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십자가로 향하신 주님의 길을 조롱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사로잡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걸어가신 주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께 이어진 삶이야 말로 사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썩어 없어질 것을 심고, 썩지 않을 생명을 얻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살려내는 ‘지혜’로운 길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길은 늘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 사실을 배우고 따르는 길이야 말로 영혼의 때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엘리야의 이야기를 말씀으로 나누면서 내일의 한걸음도 어찌될지 모르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거나, 허탄하고 사특한 길로 이끄는 세상에 집중할 수록 삶은 자꾸만 혼란과 허무로 떨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삶을 구원해내기 위해서는 먼저 내면의 기쁨을 회복하고 영혼을 튼실하게 가꾸어야만 합니다. 업적을 쌓고 소유를 늘리라고 강요하는 삶의 방식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풍성한 식탁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이미 주님으로 준비되었으니 일상이 성찬의 성례전으로 회복되기 위해서 우리가 준비해야할 것은, 처해있는 상황, 내게 주어진 삶에서 주님의 말씀을 곱씹음으로, 여기에 계시는 주님을 기억해내는 것 뿐입니다.
‘먹는 것이 내가 되는 법’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영생의 양식으로 곱씹으며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되면, 어느새 우리도 주님을 닮아가게 될 겁니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셨습니다. 가장 외로울 때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십자가 위에서도 여전히 주님은 하나님께 잇대어 계셨습니다. 주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의지하며 살아야할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생명의 양식이 되셔서 우리와 하나되셨으니, 이제 우리의 내일은 하나님을 대하며 사셨던 주님처럼 하늘이 열리는 경이로움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세월을 아끼고, 죽음에 눌린 세상을 구원하는 지혜로운 삶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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