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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8 성령강림후 11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8. 4. 11:47
성서일과
- 1독서 | 사무엘하 18:5 ~ 9, 15, 31 ~ 33 혹은 열왕기상 19:4 ~ 8
- 응송 | 시편 130 혹은 34:1 ~ 8
- 2독서 | 에베소서 4:25 ~ 5:2
- 3독서 | 요한복음 6:35, 41 ~ 51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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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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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듣겠습니까?
성령강림후 9주 주일부터 3주째 복음서 말씀으로 요한복음을 읽고 있습니다. 따지고보면 5주간 계속되는 설교는 요한이 전하고 있는 ‘예수는 생명의 빵이시다’라는 말씀에 대한 주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해는 되는 듯 싶지만 실감은 잘 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역시 ‘사람은 사람이고, 빵은 빵’일 뿐이라는 생각을 넘어서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주님이 (생명의) 빵이시라는 것을 믿는다 해도, 그 다음은 대체 어떻게 양식으로 먹는다는 것인지의 의문을 넘어서야만 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상징적이고 상투적인 표현 즈음으로 여기고 넘어가고 맙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도 이 문제 때문에 넘어졌으니, ‘사람이 어떻게 빵이 될 수 있느냐?’는 생각은 이천년전 사람들에게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 앞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에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얼핏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쳤지만 생각해 볼 수록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주님이 떡일 수 있느냐?’는 물음도 그렇지만, 당신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말씀은 더 당혹스럽습니다. 지금 그곳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주님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출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니 사람들은 모두 어이가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스스로가 ‘하나님 같은 존재’라는 말씀인데, 이건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용납할 수 없는 신성모독행위 일 뿐입니다. 나사렛 출신의 시골뜨기가 그 무엇으로도 형상화할 수 없는 바로 그 하나님이라니,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건 사이비 교주나 정신이상자의 발칙하고 시덥잖은 말일 뿐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허기사 우리도 성경을 읽다가 ‘주님이 하늘로 들리셨다’는 부분이나, 다시 오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에 넘어지곤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구름을 탈 수 있느냐?’고 정색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편적 과학지식에 비추어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한 반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하늘로부터 오신다는 것이나,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성경의 기록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모른 채, 주님이라면 가능하실 것이라 덮어놓고 믿으려고도 합니다. 어떤 쪽이 되었든 사람은 하늘로부터 올 수 없고, 빵도 될 수 없다는 생각 만큼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는 스스로가 볼 수 없고 경험하지 못한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실 수 있느냐?’는 질문이나, ‘어떻게 예수께서 빵이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은 똑같이 곧이 곧대로 들리지 않는 말씀일 뿐입니다.
주님이 빵이시다라는 말씀은, 우리를 위한 먹거리가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인간은 먹고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지요. 스스로 제 힘으로는 살 수 없고,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의 소비와 희생에 전적으로 의존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살아있음을 제 덕으로만 여기고, 오늘이 주어진 것을 마땅히 여기는 오만함 탓에, 저 혼자 사는 것처럼 타자를 업쑤이 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제 힘으로 사는 것처럼 우쭐거리고 뻐겨도, 서너끼만 굶으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 우리입니다.
여튼 주님이 우리를 위한 빵이 되셨으니, 영생을 위해 우리는 주님을 빵으로 먹어야만 합니다. 돼지는 돼지가 먹을 것을, 소는 소가 먹을 것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사람은 주님을 먹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내 생명은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있다는 의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 그렇다면, 가만히 눈을 감고 ‘내 삶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이라고 질문해 보십시오. 밥 한끼만 먹지 못하게 되어도 어찌해야할까 고민하는 우리인데,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해도 그닥 달라질 것이 없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과 별개로 살아왔는지 분명해집니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은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아닌, 배부른 이후에 찾게 되는 간식 정도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물질관에 익숙해 살아왔으니, 살고 죽는 것이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이 실감날리가 없습니다. 밥이 없으면 살 수 없듯, 하나님께서 주님을 양식으로 삼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창조하신 우리인데,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오늘 1독서로 선택한 연중독서 선택본문인 열왕기상 말씀에는 북왕국에서 활약하던 불세출의 영웅 엘리야 선지자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엘리야는 아합왕 앞에서도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 850명과 싸워 승리했던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 열왕기상 16:39
그의 믿음을 보고 백성들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칭송하게 되었습니다. 영광에 도취될 찰라,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로부터 편지 한장을 받게 됩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제사장들을 죽였으니 그를 죽여 반드시 앙갚음을 하겠다는 섬뜩한 살해협박입니다. 다음 순간 엘리야가 보여준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이질적이고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살기어린 이세벨의 협박에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다 결국은 탈진해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실망스럽다 생각했는데 가만히 읽다보니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과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는지 놀랍기까지 합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의욕은 넘치며 하늘 끝이라도 닿을 것 같던 신앙이, 한순간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연약함을 드러낼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얼마나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 구할 것이 없어 ‘차라리 죽여달라’는 수준까지 떨어진 엘리야의 모습은, 절망앞에서 포기하던 우리의 모습입니다. 엘리야나 우리나 현실의 두려움앞에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무너지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호흡은 가빠지고 정신은 아득해집니다. 마음을 사로잡은 공포와 두려움에 의해, 영혼 뿐만 아니라 육신도 곤비함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본래 선지자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 하나님께로부터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잘 들어야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엘리야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왕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바알의 제사장들과 늠름하게 싸울 수 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습니다. 가서 전해라 말씀하셨을 때 그는 왕앞에서도 말하였고, 제단을 수축하라 하셨을 때 목숨을 걸고 그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세벨의 협박 편지를 받아든 순간부터, 그는 제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외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현실에 시선을 빼앗기고 나니, 자신을 찾아내신 하나님 앞에서 엘리야는 온통 제 말만 쏟아놓고 있습니다. ‘넉넉하니 이제는 죽여달라’고 말합니다. 더이상 비참하고 험한 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말의 끝은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다’ (4)는 자기 비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 엘리야 본인의 생각입니다. 우리도 늘 세상이 그리말하고, 삶이 가져다 주고 있는 상황앞에서 깨어진 엘리야처럼 자기 감정에 사로잡혀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엘리야처럼 왜곡된 눈으로 ‘세상이 이렇다’거나 ‘현실이 이렇다’는 투정에서 시작해서 ‘나는 별볼일 없다’는 자기 비하로,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지금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겁니다. 이런 삶에 익숙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습니다. 무미건조한 소리로 흘려듣고, 시끄러운 제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악순환이 계속될 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이세벨의 손에 떨어지지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버려두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만 되었다’거나,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듣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마음과 감정안에서 일어난 제 자신의 소리일 뿐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마음은 작은 파장에도 심하게 요동치고, 그릇된 생각에 쉽게 눈이 가리워지고 맙니다. 어제 분명하게 여기던 것이 오늘 형편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일쑤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들리는 그대로 듣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죄로 인해 우리의 마음판이 타락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야 말로 우리 마음(렘17:9)이라고 말했던 것일까요? 이것은 그 동안 들리는 것이나 보이는 그대로를 사실로 믿으며 선택했던 삶에 얼마나 많은 후회와 아픔이 상처처럼 새겨졌는지만 돌아보아도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마땅히 하나님께 들어야하고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들은 말씀을 통해 정의하며 살아야 함에도, 현실이 내 안에서 두려움을 일으키킬 때마다 여전히 우리는 다시금 자기감정에 귀를 기울이고 맙니다. 가나안 족속보다 작을 뿐인데, 스스로를 메뚜기처럼 여기는 감정에 속고 말았던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은 우리안에서 늘 반복됩니다.
바울은 비록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주님의 교회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런 연약함 때문에 자기감정에 휘둘리고 만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간절한 맘으로 박해와 핍박이라고 하는 극심한 현실앞에 서 있는 에베소 교우들이 오히려 주님께 집중할 수 있기를 외치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고, 해가 질때까지 노를 품지 말라’ | 에베소서 4:26 ~ 27
노여움을 일으킨 상황이나 사건은 이미 지나갔음에도 무엇이 우리 마음안에 일어난 노여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게 만드는 것일까요? 노여움이라는 자기 감정을 놓지 못하고 그것에 사로잡히고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것이야 말로, ‘사탄’이 원하는 것, ‘사탄’에게 틈을 내주는 결과입니다. 이 틈은 성도를 넘어지게 하고 교회를 무너지게 할 만큼 치명적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앙으로 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니 주님이나 주님의 일을 믿지 않는 불신이라는 것도,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는 자기감정에 사로잡힌 탓이 분명합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을 거슬려했던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주님 안에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일 수 없다는 자기 감정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스스로가 예수를 잘 알고 있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수군거리며 주님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말씀을 통해, 이제 우리는 자기감정의 기만으로부터 무엇을 향해 돌이켜야 할지를 배워야 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 6:44
주님은 믿음없는 그들을 책망하시지도, 스스로 자신을 변명하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마음을 열고 당신을 믿으며 말씀앞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는 것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언제나 먼저 손을 내미시는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은혜입니다. 이 고백에서부터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 달려있으니, 하나님께 물어야 하고, 하나님께 들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을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먹어야 합니다. 억울함, 노여움, 불안, 염려, 두려움이라는 자기감정은 사라지고 충만한 위로가 채워집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먹고 쉼을 얻은 후에야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제 감정에 속아 기진했던 엘리야처럼, 믿음에서 무너지는 우리를 회복시키고 다시 소생케 하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먹을 때 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먹고 엘리야가 다시 서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을 먹어야만 자기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먹어야 합니다. 그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먹은 그것이 나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었지요. 내가 먹은 그것이 내안에서 변화되어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안에서, 또한 예수께서 우리안에서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야 말로 ‘예수를 생명의 빵으로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의 말씀이 내 말이 되고, 그의 걸음이 내 삶이 되는 것, 말씀이 삶으로 성육신으로 육화됩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외에 다른 양식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그를 양식삼았으니 이제 주님을 의존하며 사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자기감정도, 세상의 이야기도 우리의 양식이 아닙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요한복음 6:46
하나님께 듣고 배울 때만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더욱더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자기 감정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만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만 묻고, 주님의 말씀만 듣는 겁니다. 매 끼니의 밥을 먹듯, 말씀이신 주님만을 의지하는 겁니다. 주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으며 사는 길입니다.
세상 없는 권세도 모두 사라졌고,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재물도, 양식 삼으라 강요하던 제국의 힘도 모두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 것들입니다. 그러나 영생하도록 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양식이 되어주셨으니, 그를 먹고 마실 때 기꺼이 우리 자신이 되어주신 그리스도 인해 마지막 날에 다시 사는 ‘부활’의 생명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살리는 생명의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신 이 만을 믿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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