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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2성령강림후 13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8. 18. 15:42
성서일과
- 1독서 | 열왕기상 8:(1,6,10-11)22-30, 41-43 혹은 여호수아 24:1~2a, 14 ~ 18
- 응송 | 시편 84
- 2독서 | 에베소서 6:10-20
- 3독서 | 요한복음 6:56-69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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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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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도리와
신앙생활에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1997년에 재정된 감리회 신앙고백 4조의 내용입니다. 이 고백안에는 감동을 받든 무덤하게 읽든 성경이 그저 읽고 지나치는 책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안에 참여하는 삶을 요구하는 책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우리는 하나님앞에 내 자신이 용납되었다는 넘치는 은혜를 깨닫고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면 않됩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도리가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므로 더욱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구원받은 신앙의 삶을 살아가도록 날마다 읽혀져야만 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 따스한 봄볕처럼 부드러운 위로를 받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참여와 응답을 요구하는 거친 함성을 들어내야만 합니다. 성경이야 말로 지금 살아서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 오늘 성서일과 말씀들은 모두 우리의 응답과 참여를 요청하는 본문들입니다. 1독서 선택본문인 여호수아서의 배경은 약속의 땅에 도착하고 거주할 땅을 지파별로 분배하는 일이 마쳐진 직후입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지도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그 모든 일을 마치고 그는 백성들을 ‘세겜’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지도자로서 꼭 전해야할 마지막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겜’은 그들에게 매우 특별한 장소입니다. 세겜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을 이끌고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날 때, 당신과 ‘함께’ 길을 나서는 그에게 그 후손들에게 이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맺어주셨던 곳입니다. 여호수아로서는 마지막 설교를 하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가 없습니다. 이 땅은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너희는 섬길 자를 택하라’
그러나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이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구원자로 따르며 사십 년동안 광야를 행진해 온 이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을 잇는 후손들이었고, 하나님이 구원해 내신 하나님 백성들입니다. 마치 매주 열심히 교회 다니고 계신 분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 외침은 대단히 뜬금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로서는 지금이야 말로 더욱 큰 소리로 외쳐야 할 때였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체결되었던 언약의 결과위에 서 있을 뿐이며, 이 언약은 이미 가나안 도착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내기 위해서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그들의 걸음을 지키시고 인도하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제 그들은 아브라함이 아닌 스스로 하나님 앞에 언약의 상대로 서야만 합니다.
# 1독서 계속본문인 열왕기서의 내용은 솔로몬에 관한 것입니다. 성전 봉헌이후 솔로몬은 다윗성에 있던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겨왔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장적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과 구조가 재미있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아버지 다윗과 하나님 사이에 체결되었던 언약을 민족의 기억에서 소환냅니다. 하지만 곧장 27절부터는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처럼 자신과 자기 백성이 드리는 기도를 들어달라는 간구로 이어집니다. 이제는 다윗이 아닌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사이에 새로운 언약의 상대로 서겠다는 솔로몬의 신앙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언제나 방관자로 머물기 쉬운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어주는 자리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호수아나 열왕기서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은, 언약과 말씀은 언제나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로 갱신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어제가 아닌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나의 이야기’를 씌여져야만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언약을 세워가는 일, 내가 그 언약의 상대가 되는 일에 우리가 너무 쉽게 실패한다는 겁니다. 나 자신의 하나님 이야기를 써내려가지 못한 채 우리는 자꾸만 어제의 하나님, 누군가 타인의 하나님 이야기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도 아니면 마치 그것이 내 이야기 인양 착각할 때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앞에 서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응답하지 못하는 걸까요?
단적으로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땅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냥 그렇게 의미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원인입니다. 눈에 보이는 배후, 그 음습한 너머에서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배하는 거대한 힘이 있습니다. ‘세상이 본래 그렇다!’ 라고 말하면서 쉽게 지나쳐 왔지만, 자세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모두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권세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도 자꾸만 허무와 절망이 사람들의 삶을 뒤덮고 맙니다. 사회의 제도와 시스템은 모두가 사람들을 줄 세우는 식으로 작동하고 있고, 그 와중에 내몰리고 소외된 이들은 자꾸만 박탈감과 열등감에 짓눌리고 맙니다. 밑빠진 독에 물 붓듯, 복지에 힘을 쓰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분투하고는 있지만, 고통과 눈물은 더 깊어만 가고 있습니다. 거리를 지나면서 슬며시 올려다보면 사람들의 모습속에 하나님의 형상은 간곳 없이 깨어져 나뒹굴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짐승처럼 노예처럼 살도록 억압당하고 있는 짐승을 가둬두는 울타리 같은 세상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 에베소서 6:12바울의 시선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이 위협을 받고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모든 힘은 악마적인 것들일 뿐입니다. 악한 영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거들먹이는 이들은 하나님과 언약의 상대로 서지 못하도록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빼앗갑니다. 하지만 ‘악한 영’이라는 말을 신화적으로만 들으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우리의 방법이나 힘으로는 싸워이길 수 없는 근원적인 이유나 원인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어둠의 힘앞에 굴복하거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갑주’여야만 하며, ‘하나님의’라는 말은 ‘하나님의 방법’으로라는 뜻으로 읽으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사특하고 음습한 세력들과 싸워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전신갑주들은 성령의 ‘검’을 제외한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가 모두 방어용이라는 겁니다. 막는 싸움이라는 겁니다. 사탄의 모든 권세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 모든 악령을 단번에 무너트릴 수 있는 성령의 검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에 따르면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칼 보다 날카롭고 예리해서 마음을 꿰뚫고, 영혼과 정신을 가르며,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히브리서 4:12) 반드시 그리하는 이 칼은 대체 무엇을 베고, 잘라내고, 찌르기 위해 존재하는 걸까요?
악을 저지르고 행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사실 늘 우리들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제 힘으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에 속아 넘어간 결과입니다. 이 말씀의 칼은 늘 우리들 자신을 조준한 채, 꼭꼭 감추고 내면화시키는 어두운 마음과, 왜곡되고 사특하고 불순한 의도와 탐심을 들춰내고 잘라냅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이 예리한 검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내면의 마음을 찌르고 잘라냅니다. 말씀의 검은 우리가 품고 있는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내기 위한 무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검을 들고 허공에 휘두르며 보이지 않는 악령을 향하거나, 타자의 마음을 찌르는데 사용했습니다.
악한 영과 준동하는 세력들과의 영전투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말씀의 검으로 우리에게 들려오는 악령의 거짓된 유혹이나 나 자신의 그릇된 마음과 생각을 분리해낼 때만 가능해지는 겁니다.
우리는 전신갑주 모두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성령의 검도 손에 쥐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들고 움직이고 휘두를 힘이 없으면 그저 무거운 짐이 될 뿐입니다. 감당하지 못하고 제 풀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이 전신갑주에 대한 설명에 앞서 ‘주안에서 강한 힘을 받고 굳건하게 서라’ (10)라고 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어둠과 맞서 전신갑주를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에 대한 바울의 결론입니다.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면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 에베소서 6:18성령안에서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면 기도지 ‘성령안에서’는 무엇이고, 어떻게 기도하라는 말인지 의문이 듭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일까요? 실은 지난 5주간 요한복음의 말씀을 나눠온 것이 이 ‘안에서’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깨우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령안에서’라는 바울의 말이나,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당신이 우리안에, 우리가 당신안에 거하게 된다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은 동일한 말입니다. 지난 설교를 통해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주님께 의존되어 한 몸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빌 바를 알지 못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뜻과 성령이 비추시는 방향을 좇아 한 몸이 되어 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 거룩한 하나됨입니다.
# 요한복음 6장의 발단이 되고 눈에 드러난 사건은 ‘오병이어’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5주간의 요한복음 6장 말씀을 정리하면서 ‘오병이어’사건의 핵심을 관통하고 지나야만 합니다.
‘오병이어’를 목격하며 몰려들었던 수 많은 제자?들은 예수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는 그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66절)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허망하게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제서야 누가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사람인지 실은 주님이 아닌 오병이어의 먹거리에만 마음을 쏟고 있던 것은 아닌지, 누가 구경꾼이었고 누가 제자들이었는지가 드러나게 된 겁니다. 세상의 유혹과 시련이 찾아오고, 코로나가 드리워진 이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을 굳게 붙들고 있어야 할 자리를 더욱 견실하게 지켜가는 사람들과 주님을 등지고 휘청거리며 세상을 향하고 마는 이들이 갈라지는 지고 있습니다. 과연 이 땅의 교회안에는 함께 가자는 주님의 요청에 응답하는 제자는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남은 이들에게 주님은 물으셨습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 요한복음 6:67
때로는 눈물이 날만큼 두렵고 헛헛했던 마음을 부여잡고 당신앞에 나온 우리를 향해서도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의 선택을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과 또 초대교회 믿음의 선배들과 맺으셨던 십자가로 함께 떠나는 생명의 언약을 주님과 사이에 세운 ‘나’의 언약으로 갱신할 것인지 택하라는 말씀입니다.
#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무엇을 선택해야 할른지 바른 길을 제시해 줍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니 어디로 가오리까?’ | 요한복음 6:68
주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어디로 가시렵니까? 어떤 길을 선택하고, 누구를 믿고 의존하며 사시겠습니까? 겉으로는 들리지 않는 우리 내면속의 응답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지금 나는 예수님 자체에 대해 관심이 있는지를 질문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주신 생명은 무엇이고, 그분이 짊어지신 십자가는 어떻게 통과해야하는지, 부활에 대한 기대가 있는지, 그분의 다시오심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지 아니면, 주님으로 인해 얻고 싶고 얻게 될 무언가에 대한 기대와 바램, 욕망과 탐심의 실현에만 집중하고 있는지를 묻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쉽게 분리되고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교회를 위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종교적 열심으로 감추는데 능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스스로도 그런 자신에게 속고 맙니다.
만약 우리의 기대가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면, 예수님 곁을 떠났던 이들처럼 언젠가 우리도 예수님께 실망하고 떠나가고 말게 될 겁니다.
#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자유이지만, 그에 대한 결과와 책임은 반드시 내 몫입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저 베풀어 주신 은총, 또 우리가 바라는 무엇인가를 얻고 만족하며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늘 우리의 선택과 참여와 응답을 듣고자 하십니다. 신앙은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영생을 얻도록 주신 살과 피를 내어주셨으니, 이제는 주님을 양식삼아 먹고 더불어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겁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매개로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언약궤보다 더 생생하고, 지금 여기 내삶에 살아 역사하시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생의 말씀이십니다. 모든 사특하고 음험한 어둠의 세력을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하나님의 검입니다. 그런 주님과 함께 하고, 그런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내 자신을 향해 전혀 쓰지 못해 녹이 슬고, 유혹앞에만 서면 허망하게 무너졌던 걸음에서 이제는 벗어나야할 때입니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이 사실이라면, 삶을 짓눌러 오는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과, 절망을 주님의 말씀으로 베어내십시오. 신앙하는 삶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날마다 확증될 것입니다.
이런 세상은 이런 사람들이 선택한 결과이며, 이런 삶은 이런 내 선택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 이제 ‘기도하면 무엇하느냐?’며 돌아서는 것이 아닌 주님을 향한 기도의 자리를 선택하십시오. ‘주님을 믿으면 무엇하느냐?’는 체념이 아닌, 주님의 약속에 믿음으로 응답하며 사십시오. 썩어 없어질 떡과 함께 주님을 등지고 떠난 이들은 스러졌지만, 주님께 응답하며 사는 이들을 반드시 다시 살려내시겠다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그날, 부활의 생명을 주실 주님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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