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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6/05 성령강림절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6. 1. 13:39

    성서일과

    • 1독서 | 사도행전 2:1-21 또는 창세기 11:1-9
    •   응송 | 시편 104:24-34, 35b
    • 2독서 | 로마서 8:14~17 또는 사도행전 2:1-21
    • 3독서 | 요한복음 14:8-17(25-27)

     

    설교음원

    http://naver.me/IIZ3WoYR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oPUvNM2PhCY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함께 나누실 수 있습니다 

     

    조셉 이그나즈 밀도퍼, ‘성령 강림’

     

     

    쌓아올리는 인간, 낮아지시는 하나님

    1

    지난 주일은 ‘주의 승천주일’이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사람들을 지켜내시기 위해 하늘로 오르신 ‘상승’이 지난주의 이미지라면, 오늘 성서일과 독서안에는 마치 야곱이 보았던 하늘에 닿아있는 사다리처럼, ’상승’ 과 더불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이미지도 담겨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오늘 본문에서 하늘로 오르려는 것은 인간이고, 기꺼이 땅으로 강림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시작은 하늘을 향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약 창세기 본문으로 시작합니다. 홍수가 끝나고 난 이후, 동쪽으로 이동하던 사람들이 시날 땅 평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탑을 높이 쌓기 시작합니다. 조금 올리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까지 닿을 만큼 높이 쌓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높이 쌓아야 했을까요?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 창세기 11:4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 표면적 이유입니다. 전대미문의 ‘홍수’속에서 생존한 이들은 또 어느날 갑자기 홍수로인해 재산, 생명 모든 것이 휩쓸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트라우마로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애당초 하나님처럼 높아지는 것이 아닌, 그저 ‘내일’이라는 막연한, 그러나 언제일지 모를 재난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입니다. 무지개를 걸어두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없던 연약함이 생존에 대한 강박으로 이어진 탓에 그들은 자꾸만 높이 높이 탑을 쌓고 있습니다.

     

    2

    그런데 궁금합니다. 흩어짐을 면키 위해 하늘 어디까지 닿으면 사람들은 만족하게 될까요?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높아지면 흩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홀로 높은 곳에 올라 모든 것을 내려다 볼 때 ‘전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들어 곳곳마다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는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질 않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따지고보면 ‘하늘까지 닿겠다’는 말은 어떤 힘에 의해서도 휩쓸리지 않을 만큼 스스로가 전능해지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 처럼’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이들을 둘러 보시던 하나님께서 저들이 ‘이제 더 못할 것도 없겠다’고 우려하셨던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처럼’이라는 말을 우리는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인류를 불행으로 내몰았던 에덴에서 들었던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에서 사람에게 주셨던 유일한 질서는 ‘선악과를 따 먹지 마라'는 말씀뿐이었습니다. 이 금지명령안에 담겨있는 분명하고 절대적인 경계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인간은 말씀을 듣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말씀’이야 말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과 경계를 가늠하는 본질인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하나님처럼’이라는 유혹앞에서 하나님과의 약속과 경계였던 ‘말씀’을 깨트렸고, 에덴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외견상으로는 탑을 쌓고 있지만 또다시 사람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처럼’이라는 불신앙의 탑을 쌓아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잊은 인간에 의해 초래되는 결국은 늘 이렇게 흘러가고 맙니다. 그래서 스스로 신이 되고자하는 욕망이 어디로부터 비롯했는지를 유심히 들여다 봐야합니다. 첫시작은 ‘흩어짐을 면하자’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다보니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시선을 두리번 거리다보니 하나님의 자리가 눈에 들어온 겁니다.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잊은 탓입니다. 

    이런 유혹에서 자신을 지켜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경계를 기억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으로 둘러쌓인 삶에서 오히려 ‘하나님은 창조주시다’라는 찬미를 올려드리고 있는 시편 기자와 신앙공동체의 간절한 마음과 지혜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자 찾아온 두려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혼돈’으로 몰아세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거리마져 망각하게 된 인간의 탐욕 탓에, 아무 죄 없는 그 땅이 ‘혼돈’이라는 뜻의 ‘바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우리의 죄로 인해 만물이 신음하고 있다’는 바울 사도의 고발은 옳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처럼 될 수 없습니다 그리 되어서는 않되기에 하나님께서 탑을 쌓고 있는 세상을 향해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이 강림하시자 하늘까지 닿겠다는 세상의 계획은 송두리째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늘로 쌓아올리는 그림을 뒤집어 놓으신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망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은 심판이 아니라 ‘혼돈’에서부터 만물의 ‘창조’를 이루셨던 첫 창조의 날처럼, 땅이 땅에, 하늘이 하늘에 있는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고, 두려움으로 비롯한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해 내기 위한 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흩어짐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흩어짐을 무너짐이나 실패라 생각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쌓아 올리려고 하지만, 높이 쌓을 수록 중심을 잃을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언젠가는 무너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더 높이 쌓을 수록 무너짐은 더 치명적일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흩어주시는 것은 오히려 복이 됩니다. 그렇게 강박과 강요에 내몰린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우리가 무너진 그곳에서만 하나님의 일하심과 계획이 쌓아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서신서인 사도행전은 오순절 일어난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순절은 ‘추수절’입니다. 추수는 ‘마지막 때’를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벼락이 내린다거나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질서와 계획이 회복되는 마지막의 때이며, ‘심판’의 때입니다. 그날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편에 서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될 자리로, 없어야 할 것들은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당신을 쫓는 이들에게 먼저 그 날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읽게 된 ‘성령 강림’의 사건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령께서 강림하시게 되면 일어나는 일들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터위에 세워진 신자들 가운데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각 사람안에서 곧장 성령의 강력한 통치가 시작되었고, 제일 먼저 그분의 능력이 드러난 곳은 말의 변화였습니다. 욕심과 탐욕을 이루기 위해 거짓과 기만과 폭력으로 얼룩졌던 입에, 성령이 주도하시는 거룩한 언어, ‘방언'이 담기기 시작했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방언이 ‘거룩한 언어’인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로운 말이어서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미’가 내용물로 담겨 있기에 거룩한 언어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염려, 두려움, 걱정, 미움, 시기, 질투, 증오로 얼룩졌던 우리의 말이 상황과 여건과 관계 없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차게 되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다락방 너머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창밖으로 흘러나온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통역 없이 온갖 도시, 다양한 나라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소리를 알아듣게 된 겁니다. 바벨탑 이후로 인류의 언어는 다시는 악을 도모하거나,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에 하나되지 못하도록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세상은 늘 불통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반목하게 됩니다. 평화가 깨어진 이유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강림하시자 경계를 넘고, 차별을 넘고, 선입견을 뛰어넘어 비로서 우리의 말이 전달되고 소통하고 들리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말씀 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듣는 존재로서의 자리에서 이제야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겁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 사도행전 2:21

     

    사도 베드로가 군중들을 향해 ‘요엘’ 선지자가 전했던 하나님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성령이 임하시면 완고하고 교만하며 믿음없던 우리 입술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겁니다. 내 입술을 열어 주님을 찬미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얻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쌓아 올리려던 바벨탑을 무너트려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불신과 배신의 대상으로 삼던 하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의 변화가 아닙니다. 상대와의 ‘대화’가 변한다는 것이고, 상대와 나와의 관계가 바뀌는 겁니다. 비로서 하나님과 남이 아닌 한 몸이 되어 소통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소통하게 되면, ‘나’ 자신을 왜곡되고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정하는 소통이 일어나고, 경쟁의 대상, 투쟁의 대상으로만 삼던 타자와도 소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만 이루실 수 있는 참된 구원의 사건입니다. 말이 바뀌니, 관계가 바뀌고, 하나가 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예언의 말씀처럼, 성령이 임하시는 사람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란, 결국 한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은총과 동의어인 겁니다.

     

    4

    복음서 말씀은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의 요구에 대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아직은 ‘믿지 못하겠다’는 빌립의 이 질문을 통해 곤고한 우리 삶의 근원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실재로 무엇이 없어서, 무엇을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잃어버린 탓에, 주님을 믿을 수 없기에 우리 삶이 곤고해 질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주신 것은 ‘말’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 요한복음 14:10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마주 대하듯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늘 하나님과 함께 하시며 소통하시는 분이셨기에, 그분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뜻과 일치된 말씀이었고,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는 겁니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 요한복음 14:11

     

    그래도 주신 말씀으로도 하나님께서 주님안에 함께 계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일을 행하셨을까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 누가복음 4:18~19

     

    주님은 입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단 하루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으시고 주어진 온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드려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외쳐진 하나님의 ‘몸 말(씀)’이 되셨던 겁니다. 우리도 비록 ‘방언’을 말할 수 없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하는 일, 살아내는 모습안에 주님을 믿는 믿음안에 살고 있음이 드러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세상을 향한 ‘몸(의)말’로서의 방언이고, 거룩하고 신령한 언어를 넣어주신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5

    오늘 본문들을 통해 우리는 쌓아 올리려는 인간과는 반대로 ‘성령’을 통해 주님의 나라와 그 나라를 가지고 강림하시고 낮아지신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한 언어로 저들끼리 뭉치던 세력들은 흩어지고, 오히려 각 언어로 흩어졌던 이들이 생명의 말씀안에서 통하게 됩니다. 죽었던 피조물이 창조의 능력안에서 회복되고, 웅크렸던 제자들은 능력의 종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의 몸된 교회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 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도록 가르쳐주시기 위해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신 겁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아만 가는 세상의 불의함과 패악함, 그리고 오만함, 그러나 마지막 때가 올 수록 희망을 볼 수 있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셔서 모든 불의를 갈아엎으시고, 창조의 질서안에서 공평과 정의가 강같이 흐르게 하실 겁니다. 말씀을 이렇게 정리해야겠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셨으니, 우리가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망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우리안에 강림하신 분으로 인해 말 뿐만 아니라 삶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거룩하게 빚어가실 것입니다. 그가 계시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회복시키고, 마땅하고 바른 길로 이끄시는 창조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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