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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6/19 성령강림후 2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6. 15. 15:42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이사야 65:1~9
    •   응송 | 시편 22:19~28
    • 2독서 | 갈라디아서 3:23-29
    • 3독서 | 누가복음 8:26-39

     

    설교음원

    http://naver.me/5jYlTAdv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eClUTt7i95E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년 / 나치의 스페인 게르니카 무차별 학살 참상을 묘사한 그림

     

    죽음의 땅위에, 생명을 피우다

     

    1.

    요즘 세상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억울함, 분노’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 개인의 경험을 너머 집단의 상처와 공동체의 열패감이 오래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상처가 오래되면 어느새 굳어지고 길들여져 돌이키거나 회복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이야기는 이처럼 오랜 아픔에 시달린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건너가셨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복음서마다 다루고 있는 평행 본문의 말씀(마태복음 8:28~24, 마가복음 5:1~20)이지만 약간씩 차이가 있으니 비교하면서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도착해서 주님이 처음 만난 것은 옷도 입지 않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몸에 떼가 묻고, 눈은 무언가에 홀린 듯 풀려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무덤가를 배회하고 있는 그 모습은 생각만 해도 오싹하기까지 합니다. 본문은 그가 귀신에 들려 그리 되었다고 소개합니다. 귀신에 들렸다는 것은 어떤 영적인 존재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제 정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귀신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 보다는, 어쩌다가 맨 정신을 잃고 귀신에게 마음과 생각을 빼앗기고 말았을지 안타까운 생각이 먼저듭니다. 대체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2.

    복음서안에는 그가 어쩌다가 귀신에 들렸는지에 대한 언급은 나와있지 않습니다. 단지 그가 머물더 ‘거라사’ 지방이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돼지떼를 키우던 곳이라는 점에서 이방인의 땅이었다는 것과 그러나 주님과 그 사이에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 조금은 엿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연유에 대해서는 뒤에서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튼 어떤 상처와 아픔 때문에 귀신에 들렸는지 자신의 몸을 헤치고 무덤가를 전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한번 귀신에 붙잡힐 때마다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한바탕 소동이 일었을 겁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제 멋대로인 이런 사람을 대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고립이나 격리시키는 것 뿐입니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그를 데려다가 쇠고랑으로 묶어 두고 감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그가 묶여있던 쇠고랑을 끊어내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귀신이 그를 자유케 해주기 위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귀신은 그를 오히려 더 절망적인 고립의 자리인 ‘광야’로 내 몰았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 사람들은 그를 완전히 포기해버리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버려졌던 그가 내몰린 마지막 장소가 ‘무덤’가였던 겁니다. ‘무덤’가는 죽은 사람들만 머무는 곳이지만, 꼭 숨이 끊어진 사람만 죽은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깊은 외로움, 상실감, 절망, 왜곡된 이념이나 종교, 사회가 만들어낸 차별로 내몰려 숨쉴 수 없는 이들이야 말로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무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가 제 발로 무덤가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를 죽은 사람 취급하던 사람들로 인해 ‘무덤’으로 내몰린 겁니다. 이제는 더이상 사람들 틈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 그는 이제 완전히 귀신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3.

    서로가 서로를 마주할 수 없고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그렇게 무덤가에 버려진 채 흉한 몰골로 헤매이고 있던 그에게는 찾아오는 사람도, 그에게 손을 내밀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다릅니다. 주님께서 그의 걸음을 막아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를 꺼려해서 회피하거나 길을 내어줄 마음이 전혀 없는 모습입니다. 덕분에 무덤가를 제 집처럼 활보하던 그가 한 걸음도 나아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 제 아무리 오래되고, 깊은 상처라고 해도 이제 그분이 찾아오셨으니 그는 치유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신도 만만치 않습니다. 쉽게 그를 놓아줄 마음이 없는지 주님 앞에서 피하지 않고 서 있습니다. 그때 였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제 소유권을 주장하며 맘껏 그의 인생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에게 오히려 당신의 지배권을 행사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는 버려질 사람이 아닌 찾아야할 사람이었고, 포기되어야할 사람이 아니라 살아야할 사람, 구원받아야할 잃어버린 당신의 자녀일 뿐입니다.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 납짝 엎드린 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이 말이 귀신이 한 것인지, 그 안에 있는 사람이 한 말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귀신의 말이라면 빛 되시는 주님이 앞에 서계시니 괴롭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귀신에 사로잡혀버린 이의 절규라면 이보다 서러운 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도 너무 힘들고 고통이 심할 때는 위로도 내미는 손길도 다 귀찮아하는데, 대체 얼마나 귀신에 휘둘리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냈으면 주님이 찾아오셨음에도 ‘차라리 이렇게 놔두라'고 했던 걸까요? 

     

    4.
    이름이라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창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축귀(逐鬼)사역’은 그 안에 도사리는 귀신의 이름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귀신의 이름을 알아차리고 정체를 꿰뚫어보는 것은, 이미 귀신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주님은 직접적으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이 물으셨으니 그 누구라도 응답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본래부터 간사하고 교묘하게 주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존재인 마귀나 귀신이 곧이 곧대로 답할리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군대’라고 밝혔습니다. 이미 이름을 빼앗겨 버릴 만큼 귀신에 사로잡혀 버렸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여튼 ‘군대’는 그 사람의 이름도 아니지만, 또한 귀신의 이름도 아닙니다. ‘군대’안에 있는 것은 맞지만, 귀신의 이름 자체는 아니니 진실인 것처럼 교묘히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군대’ 라는 헬라어 단어인 ‘레기온’은 3,000에서 6,000명 정도되는 로마 1개 군단을 지칭하는 단어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어쩌다가 이 사람이 귀신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로마군에 의해 아내나 자녀, 사랑하는 가족을 희생당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로마군에 의해 가족이 살해당하는 일을 겪어야 했다면 맨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비참하고 억울하지만, 로마에 의해 자행된 살육앞에서 억울함을 신원받을 길은 없습니다. 속이 타들어가고, 숨이 막히고, 정신은 아득해져갔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하나 그 억울한 마음을 위로해줄 수도 공감해주지도 못합니다. 그의 영혼은 점점 ‘고통의 심연’으로 잠식되어 갔을 겁니다.
    자신의 정체를 꿰뚫어 보시는 주님앞에서 귀신은 ‘지옥’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얼마나 급했는지 귀신이 주님께 부탁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지옥’은 귀신에게도 가기 싫고 두려워하는 곳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하지만 귀신이 무서워할 만합니다. 본래 ‘지옥’은 하나님께서 마귀와 귀신과 같은 어둠의 권세들을 가두기 위해 준비해두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9:1, 20:1~3) 여기에서 ‘지옥’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비소스’ (βυσσος)는 밑바닥이 없는 무저갱, 지하세계와 깊은 심연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가만히 그 뜻을 곱씹어 보니, 천국이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닌 것처럼 이런 지옥도 죽음 이후에만 존재하는 곳은 아니다 싶습니다. 귀신들렸던 그 사람의 삶이 그렇듯, 오늘 이 곳에서도 ‘지옥’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해고를 당한 노동자, 아무리 남들보다 노력하고 애를 써도 빚더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 가난한 집, 병든 부모를 책임지며 꿈조차 저당 잡혀버린 젊은이들, 마실 물 조차 없는 황폐한 땅, 전쟁의 공포속에 사로잡혀 죽음을 직면해야만 하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삶의 기반이 뒤흔들리고 내일을 세워가야할 오늘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람들이 처해있는 곳이야 말로 밑바닥이 없는 무저갱의 허무, ‘지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지옥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허무의 지옥은 대체 누가 만든 것일까요?

     

    5.
    지옥에 가둬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귀신은 궁여지책으로 ‘돼지떼’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지체 없이 귀신은 돼지떼에게로 들어갔고, 귀신이 들리자 돼지들도 제 정신을 잃고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 (바다)로 빠져들어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곳이든, 누구에게든 마귀나 귀신은 제 집으로 삼는 곳마다 결국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내모는 존재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둠이 그 사람에게서 사라지고 군대 귀신이 떠나고난 이후 그 사람의 빈 마음과 영혼안에 주님의 빛이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을 파괴하고 억누르는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참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겁니다. 참으로 기쁘고 복된 일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이니, 만민이 마땅히 함께 즐거워해야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후의 상황은 너무나 뜻밖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귀신에게서 해방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반가워해야할 사람들의 표정안에 두려움과 놀라움과 더불어 무언가 불편함이 섞여있습니다. 귀신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복된 일이지만, 그 일로 돼지를 치던 이들은 하루 아침에 모든 소유를 다 잃어버리게 되었으니, 불편했던 겁니다. 율법에 따르면 ‘돼지’는 본래 되새김을 못하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돼지를 먹지도 않스니다. 그러니 그들이 기르고 있던 ‘돼지’는 모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이나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건 밥줄이 끊어지는 것에 그칠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자칫 화를 당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더이상 주님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싶었는지 사람들은 주저함없이 자신들의 마을에서 주님께서 떠나주시기를 요구합니다. 이건 해도 너무한다 싶지만 우리라고 그들의 상황에 놓인다면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정의와 평화, 자유와 인권,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일이 귀하다 말은 하지만, 내가 혜택을 받을 수 없고, 내가 부담해야할 세금이 조금 더 오르고, 나는 여전히 불편하다면 차라리 모두가 다 피해를 입고, 모두가 다 혜택을 받지 못하는 편을 선택하고 마는 것이 우리의 나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6.
    여튼 주님은 그들의 요구에 말없이 응하시곤 배에 올라타셨습니다. 마치 복음을 전하러 건너오셨던 주님의 전도 사역이 이렇게 실패로 끝나 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십니까? 그럴 듯한, 효율, 눈에 보이는 업적이나 성과를 중시하는 것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에는 수천마리의 돼지떼를 잃은 손실이 커보이고, 교회를 세우기는 커녕 전도한번 못해보고 쫓겨나는 모습이 불편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시선에는 주님을 통해 그리스도로 옷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갈3:26~27) 참평화를 얻게 된 한 사람의 행복이 눈에 가득 들어왔습니다. 귀신에 씌여 굴복하던 그가 주님의 발앞에 엎드려 말씀을 듣고, 주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었으니 이보다 귀한 전도 사역이 또 없는 겁니다. 애초부터 부정한 이방인의 땅으로 향하셨던 목적이 이 한 사람을 구원해 내시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으니, 뭉클해집니다. 극심한 고통에 내몰린 이들의 아픔과 절망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시편22:24), 고통에 내몰려 미쳐 당신을 찾지도 못하는 이들을 찾아오시는 주님,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내시는 주님의 다함이 없는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따르겠다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시면서, 주님은 귀신에게 놓임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그가 다음으로 화해를 이루어야할 곳,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음’을 전해야하는 ‘땅끝’이야 말로 가장 가까운 이들, 가족의 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곳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는 것이야 말로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使命)입니다.

     

    7.
    의인은 병자를 위해, 주님은 죄인을 위해 보냄을 받으신 분입니다.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곳이 하나님나라이며, 그곳에서는 가장 작은 것이 가장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물질과 업적으로 가치를 평가받는 세상이 완전히 전복된 나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도 그런 시선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을 닮아가야 할 우리는 여전히 세속의 가치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해방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을 만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세속의 가치와 힘에 사로잡혀 귀신들렸던 이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 눈으로 보니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과 850대 1의 대결에서 승리한 엘리야를 기억하고 승리에 도취되어, 도망자 엘리야의 아픔과 절망, 그를 찾아가시는 하나님의 위로도 눈에 잘 들어오질 않습니다. 한 사람을 살려내시기 위해 손을 내미시는 주님, 나를 찾아내신 주님 때문에 오늘 우리가 살게 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자리에, 감사와 은혜가 채워질리가 없습니다. 유혹과 기만에 제 정신을 잃고 희뿌옇게 퇴색되어버린 우리 마음을 하늘에 닿은 성령께서 맑고 투명하게 닦아내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8.
    오늘 본문을 통해 제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결국 마귀와 귀신이 머물 곳이 ‘지옥’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최종 심판의 날이 이르기까지 어둠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떼에게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처럼, 주님의 빛을 피해 이 땅에서 자신들이 머물고 숨을 곳을 찾을 겁니다. 귀신은 홀로 존재할 수 없어 머물 집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찾는 집은 고통속에 버려져 깨어진 누군가의 마음일 수도 있고, 깊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받지 못했거나 오랜 아픔을 곱씹는 이들의 삶이나, ‘차별받음’을 세상을 향한 분노로 곱씹고 있을 누군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늘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와 좌절로인해 귀신에게 짓눌린 이들, 따듯한 손길, 품어줄 수 있는 가슴과 기댈 수 있는 어깨가 절실했을 이들을 ‘부정하니 저리로 가라 우리에게 오지 마라’ 결국 죽음이 머무는 무덤으로 내몰았습니다. (이사야 65:4~5)
    그러니 그때나 지금이나 누군가에게, 혹은 우리 자신을 향해 이 땅에서 ‘지옥’을 만들어주는 것은 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에게서 나가라’는 주님의 엄한 꾸짖음이 우리를 향하지는 않을까 두렵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고, 사람을 업적이나 성과의 가치로 평가합니다. 말씀은 이런 세상이야 말로 제 정신을 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귀신들린 세상’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요즘 세상의 모습은 마치 군대귀신이 지배하고 무덤가를 활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도, 어떤 상황이라도 희망이 있습니다. 오히려 희망을 전하는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귀나 귀신은 외로움이나 슬픔, 절망과 허무, 상실 같은 고통의 무덤으로 우리를 내몰아갈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떨어트리고 차별과 고독으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를 찾아내시고 구원해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위엄을 간직한 채 ‘복음’을 전하는 복되고 가치있는 삶으로 초대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만나고 난 뒤, 자신의 마을,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가 주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전하는 ‘사명자’가 되었던 행복한 그 사내 처럼,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하고 전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산 사람을 무덤으로 내모는 세상에서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해방과 구원, 새로운 삶, 내일에 대한 희망을 증거하고, 주님으로 인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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