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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2 성령강림후 1주 (삼위일체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6. 7. 20:54
성서일과 본문
1독서 | 잠언 8:1-4, 22-31
응송 | 시편 8
2독서 | 로마서 5:1-5
3독서 | 요한복음 16:12-15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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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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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Matisse, Dance Ⅱ, 캔버스에 유채, 1909~1910, St. Petersburg, The State Hermitage Museum / ⓒ The State Hermitage Museum / Photo by Vladimir Terebenin '함께' 춤추는,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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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도 이상의 고열을 발생해 몸에 닿기만 하면 주요 장기와 뼈까지 태워 결국 죽게 되는 ‘백린탄’, ‘소이탄’이라고 하는 무차별적 살상무기가 우크라이나에 뿌려졌다고 합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총기난사 사고로 초등학생 포함 21명이 살해당했다는 참담한 소식도 들려옵니다. 연일 계속되는 우울한 소식들을 접하고 난 이후, 그만 마음에 병이 생겼습니다. 야만적인 폭력에 물들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후 없다는 절망, 이런 현실을 방관하시는 듯한 하나님을 향한 야속함이 뒤섞인 탓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후 2주 ‘삼위일체’주일입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해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제자답게 해주시려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시려고 성령께서 강림해 주셨지만, 거대한 악 앞에서 교회는 무력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또 다시 ‘대체 이런 세상에도 희망은 있는가?’라는 물음을 붙들고,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여전히 우리의 희망은 성령을 보내주신 주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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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성령강림절을 시작으로 성령강림의 절기가 시작되는 첫 머리에 ‘삼위일체’주일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삼위일체’, 한분이시지만 세분의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이라는 정의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입니다. 그래도 찬찬히 그리고 한걸음씩 나아가보겠습니다.
언급했다시피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그러나 하나되시는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로마 전역을 통해 복음이 퍼져나가고 교회가 세워져가면서, 성부이신 하나님과 성자이신 예수님과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과 성령과의 관계에 대한 정립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관계를 설명해보려다가 ‘에비온주의’(Ebionism), 영지주의(Gnosticism), 마르시온주의(Marcionism), 몬타누스주의(Montanism)와 같은 온갖 이단 사설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이단들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참 인간이심을 부정하고, 극단적인 종말론과 예언, 열광적인 신비에 심취해 있다는 겁니다. 건강하지 못한 신앙, 왜곡되고 일그러진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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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과 달리 교회 전통은 교부였던 ‘터툴리안’을 통해 정립된 ‘삼위일체’ 교리를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tres Personae, una Substantia!)는 하나의 본질, 세 위격, 다시 말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시지만 세 신은 아니고, 언제나 하나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자나 성령이 성부에게 종속되어있지도 않습니다. 분명히 우리 말로 쓰고 읽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통 눈에 들어오지 않고 아득하기만 합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실상은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구약은 성부의 시대, 신약은 성자의 시대, 그리고 지금은 교회안에 거하신 성령의 시대라는 표현을 익히 들어보셨을 겁니다.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성자가 땅에 내려오시고, 성자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께서 내려오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서로 다른 세 분의 신(三神)이 될 뿐더러, 성부가 계신 곳에 성자와 성령이 계시지 않고, 성자가 계신 곳에 성부와 성령이 계시지 않고, 성령이 계시는 곳에 성부와 성자가 부재하게 되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해내려던 대부분의 시도는 단일신론이나 양태론과 같은 이단 사설로 끝나고 맙니다.
‘물 컵으로 바닷물을 재려한다는 심정으로 밖에는 말할 수없다’던 교부 어거스틴의 말이 오히려 반가울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력이 오늘 ‘삼위일체’를 절기로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나아가는 신앙의 길에 반드시 지켜내야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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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교회전통은 ‘삼위일체’를 공동체적인 친교, 공동체적인 연합이라는 헬라어 ‘페리코레시스’(περιχορησις)라는 관점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캅바도기아의 교부들이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변증하면서 나온 이론인데, '서로의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듯 둘러싸며 춤을 추는 모습'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뿐만 아니라, 성서일과 본문 전체를 아우르는 ‘삼위일체’의 핵심도 ‘이것은 무엇이다’는 식의 ‘정의’가 아닌 ‘관계성’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하나됨의 관계안에서 서로에게 속하여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남다르다고 해도 아들이 없이는 아버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성부는 성자에게 또한 성자는 성령과 함께만 계실 수 없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각각은 같은 분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안에서 삼위의 세 인격을 지니고 계시지만, 존재하시는 방식은 한 분이십니다.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좋겠습니다. 춤을 추고 있는 원안에는 서로 다른 이들이지만, 손을 맞잡은 그들은 춤을 추는 하나입니다. 아담과 하와, ‘잇쉬’와 ‘잇샤’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신 이후 그가 홀로 있음이 좋지 않아 그의 갈비뼈를 통해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하와가 아담으로부터 나왔으니, 아담과 땔래야 땔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제 아담은 하와가 있음으로 온전한 아담, ‘사람’이 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들은 서로 다른 인격이지만 ‘한 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공동체인 ‘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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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는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드리는 설명도 여전히 한계를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곳 까지 통달하시는 성령을 통해 빛처럼 밝혀질 때만 그저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신비가 가지고 있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으로 삼위이신 하나님은 단 한순간도 떨어져 계시지 않고 ‘하나’로 연합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한 처음의 때에 이루어진 창조의 신비 역시 삼위 하나님의 연합과 공동체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 창세기 1:1~3
성부이신 하나님의 창조안에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생명을 불어넣으셨고, 성부의 창조는 ‘있으라’는 말씀이신 성자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독서인 잠언 8장은이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 | 잠언 8:22
그리고 응송 말씀은 이처럼 놀랍고 신비로우신 창조의 일을 성자와 함께, 성자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을 향한 시편기자의 찬미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 시편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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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2독서인 로마서 5장에서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롬5:1) 여기에서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요? 그것은 또한 오직 성자이신 우리 주님을 통한 믿음으로 얻게 된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롬5:2)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로 인해서 환난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단련된 인격을 낳고 그렇게 단련되고 성숙한 인격이 결국 소망을 낳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질 이 모든 일을 알고 믿게 된 것이 ‘성령’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롬5:5)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은혜를 누리며 소망안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일체로 연합하고 계신 덕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 없고 잃어버림없이 ‘지금, 여기’에 삼위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신다는 위로이며, 신앙의 교훈을, 교회의 신비를 가져다 줍니다.
결국 ‘삼위일체’의 본질은 비록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여도 우리의 걸음, 교회의 오늘이 서로가 연합하여 하나되시는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하셔서 하나되어 걷고 있는 길임을 믿게 하는데 있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의 손을 잡고, 주님께서 우리의 세계를 붙잡고 계시므로 우리는 오늘도 주님과 하나이며,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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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절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위치하게 된 이유가 이제야 분명해집니다.
‘사람 속에 있는 그 사람의 영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 고린도전서 2:11
하나님의 영이 아니시고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삼위가 일체이신 하나님은 교리안 갇혀서 스스로만 하나됨을 누리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만 이루실 수 있는 그 온전한 하나됨안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나 됨, 생명이 흘러넘치는 춤 안으로 우리를 초대해 주셨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주님의 호흡을 맞추며 더불어 춤을 추면서, 한데 어우러진 우리도 주님을 닮아가는 날이 오게 될 겁니다. 존재함 만으로도 기쁨과 평화가 넘쳐나는 충만한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는 춤 사위 안에는 우리 뿐만 아니라,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높은 하늘과 맑은 공기에 이르기까지 제 힘으로는, 저 스스로는 설 수 없는 모든 연약한 생명들도 함께 초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것을 모두 함께 소유하고 계시는 주님으로부터, 죽음조차 걷어내는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요한복음 16:15) 성령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의 춤 사위는 종말의 날까지 초대에 응답하는 우리를, 또한 그 안에서 우리가 손을 맞잡은 세상을 주님의 몸으로 하나되게 해주시는 환희와 감격과 축제의 마당으로 이어지게 될 겁니다. 급급하게 살아가던 우리의 삶이 생명을 살리는 주님의 길이 되고, 세상을 향한 하늘의 복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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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방식에 길들여진 세상은 사나운 이빨을 들이대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야만적인 세상입니다. 그러나 성령안에서 눈을 뜨고보면 우리는 어둠을 몰아내고 평화를 일구어 내시는 주님의 은혜와 섭리가 기적처럼 흐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게 됩니다. 지금도 거룩한 생명의 춤을 이어가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 영상 소개 _ KBS 우크라이나 침공 100일 특집 다큐멘터리 ‘포화속으로’ 중에서)
포화가 쏟아지고 있던 우크라이나 한 복판에도 꽃은 피고 있습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폭력 앞에서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사람들속에서, 남겨진 이웃 할머니의 생일을 축하하는 아파트 지하안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는 할머니의 기도안에서, 그리고 잔혹 무도한 전쟁의 폐허 틈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의 마음안에서 억만금을 주고도 피워낼 수 없는 희망의 꽃이 피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교회위에 임하신 성령께서는 여전히 그리고 분명하게 인류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세계의 ‘청지기’로 지명하신 의지를 철회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포기하시지 않으셨음을 알게 되었으니 더 이상 불의함, 죄와 사망의 권세앞에 주눅 들거나 낙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깨어진 생명들이 다시 일어나고 만물이 함께 손을 맞잡고 생명과 환희의 춤을 추는 그 날까지, 아픔과 절망, 상처와 고통, 좌절에 짓눌려 제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는 이들의 연약한 손을 붙잡고 더욱 힘차게 그리고 온전한 믿음안에서 ‘이제 서로 하나가 되자'는 주님과 더불어 신명난 소망의 춤, 생명의 춤을 추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주여! 주님의 이름은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 시편 8:1
삼위일체 하나님께 몸으로 드리는 우리의 찬미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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