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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4 성령강림후 7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7. 20. 12:00
성서일과 본문
1독서 | 호세아 1:2-10
응송 | 시편 85
2독서 | 골로새서 2:6-19
3독서 | 누가복음 11:1-13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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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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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들어주시는 우리 하나님
1
장맛비가 맥없이 물러나고 무더위가 여름의 위세를 실감하게 하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태울 듯이 쏟아지는 태양을 버티면서 땅에 심기워졌던 것들이 알차게 내실을 채우고 있음을 알기에, 여름은 소망의 계절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교회력의 시간도 벌써 성령강림 7주를 맞습니다. 거룩하신 성령께서 찾아오셨으니, 우리 마음과 생각, 삶의 모습도 예수님을 닮아 익어져가고 있어야 할텐데, 가뭇없이 흘러버린 시간이 아쉽기만 합니다. 그러나 계절이의 힘이 자랄 것들을 넉넉히 키워내듯, 성령께서 우리의 걸음을 듬직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키워내실 줄 믿습니다.
오늘 1독서 구약 본문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호세아는 불신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당시의 이스라엘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시청각 교제의 역할을 부여 받았습니다. 호세아는 주님의 명령때문에 음란한 여인 고멜과 혼인까지 하였지만, 결국 고멜은 아이 셋을 남기고 다른 남자를 찾아 도망쳐버렸습니다. 고멜이 호세아의 애닳은 부름을 외면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모습은 하나님을 배신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줍니다. 고멜과 달리 선지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호세아는 안타까울 정도로 신실하게 ‘아멘’으로 응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이들의 신앙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은 바알과 같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에 빠져, 제가 원하는 것을 줄 것이라는 달콤한 말에 속아 그 앞으로 달려가고, 혹여 노여움을 사지는 않을까 두려워 굽신 거리는 비굴한 삶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노예였던 그들을 구원해내시고 약속의 땅을 살아가는 자유민으로 불러주셨지만, 어느새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가나안의 우상들의 노예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저 ‘돌아만 오라’는 하나님의 말씀 조차도 듣지 못하는 귀머리가 되고 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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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호세아는 묵묵히 그 말씀을 따라갑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가혹하게 보이고, 듣기에도 힘겹고, 따르기에는 더욱 거칠고 쓰린 말씀이지만 용케도 그는 꾹꾹 말씀을 삼켜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이제 하나님도 자신들을 포기하셨음이 틀림이 없다고 절망하던 때에도, 하나님의 속 마음을 헤아릴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돌아보지도 않으실 것처럼 내치시던 매섭고 강렬한 심판의 말씀 뒤로, ‘하나님께서 버리신 백성’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그 땅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속 마음을 읽어냈기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예표로, 하나님은 음란한 중에 낳았던 세 자녀의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축복이 담긴 이름이 아닌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과 저주가 담긴 이름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로 만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대신 심판을 택하였고(이스르엘),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지 않았고 (로루하마), 하나님의 백성되는 것을 거부(로암미)했던 겁니다. 오히려 세 자녀의 이름 하나 하나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이 시리도록 아프게 베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이름이 주어졌던 것처럼 돌이킬 수 없는 그들의 운명 조차도,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아직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그들은 ‘로암미’라는 이름으로 버려진 그 땅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암미’라는 이름을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땅위에 순백의 꽃이 피어오른 듯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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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는 하나님만이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신다’ 이름의 뜻처럼, 그는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붙들었습니다. 그 믿음이 이스라엘과 달리, 말씀에 순응할 수 있게 해준 겁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믿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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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복음서의 말씀은 비교적 짧은 분량이지만 그 안에는 세 덩어리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첫번째는 기도를 가르쳐주시는 대목입니다. 평행본문인 마태복음 6장과 달리 하나님께 구해야할 내용들만 비교적 간략하게 담겨있습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두개의 비유 말씀은 하나님께 구하는 자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비유는 오늘도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설교중에 ‘비유’나 ‘예화’를 드는 것은 잘 사용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사용하지 않음만 못할 만큼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시의적절하지 않고 쌩뚱맞은 비유나 예화가 오히려 본문의 내용을 가리우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드신 비유가 꼭 그렇게 보입니다. 급한 대접을 위해 빵을 나누어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귀찮아하는 벗에 관한 이야기는 누가복음 18장 불의한 재판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조르다보면 귀찮아서라도 들어줄 것이라는 내용에 이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면 응답받을 수 있다는 비법을 가르쳐주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 교회안에는 금식기도, 40일, 100일, 1000일 작정 기도가 계속됩니다. 들어주실 때까지 말입니다. 게다가 말씀대로라면, 우리의 기도나 간구는 하나님께 달갑지 않은 불편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이렇게 맺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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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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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악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악한 우리도 자녀에게는 좋은 것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선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겠느냐는 물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모든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늘 기도하시는 분이셨지만, 떼를 쓰듯 조르면서 매달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기도는 늘 사랑과 신뢰와 확신에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버지시기에 언제나 좋은 것 주시는 분이시라는 그 믿음이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는 고백과 함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를 멈출 수 있게 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멈춤이 우리를 죽음에서 살려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오늘 우리 자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믿고 있는 걸까요?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던 이유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구하다 보면 지쳐서라도 언젠가는 들어주실 것이라는 내 바램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또한 그렇게 기도하지 않던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귀찮아 하신다거나, 내게 좋은 것 주시기를 아까워하는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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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님은 우리의 기도안에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가 전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안에 그 핵심이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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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 |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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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기도의 본질은 누구를 향해서 기도하고 있는지가 결정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를 받으실 하나님이 기도하는 나에게 누구이신지, 나는 그분께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위대함은 바로 그 첫문장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이 기도를 따라 함으로써 비로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라고 배웠으니, 이제 우리는 기도의 응답 이전에, 먼저 주님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고 있는지 답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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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비유나 18장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해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친구라하더라도 귀찮아하고, 재판관이라하더라도 의롭지 않은 것이 세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시다는 겁니다. 당연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비유에서 보는 그런 사이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조르고 떼를 써야만 마지못해 손을 내어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을 아끼지 않고 주시는 분이시라는 분명한 확신이 기도의 출발이고, 기도일 수 있도록 해주는 근거입니다. 떼를 써야만 하고, 값을 치루고, 자격을 갖추어야만 준다면 ‘부모’라 부를 수 없습니다. 내것을 다 내주어도, 내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 이가 부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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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두번째는 ‘기도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입니다. 대체 우리는 왜, 무엇을 구하려고 기도해야하는 걸까요?
세상의 모든 종교가 기도를 가르치고, 또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라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딱히 종교를 갖고 있지 않는 이들이라도 먹고 사는 문제, 어려움의 해결을 구해야할 때가 이르면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내용에 있어 우리와 다른 종교인들의 기도는 무엇으로 구별될 수 있을까요? 다시 마지막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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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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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통해 결국 주님께서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끝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아버지께 구해야 할 한가지가 ‘성령’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것에 만족할 수 있을까요? 정말, 하나님께서 돈문제, 건강 문제, 기타 당면한 문제의 해결 대신에 ‘성령’을 허락하신다고 해도 기꺼이 감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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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엇 때문에, ‘성령’을 구하라 하신 걸까요? ‘성령’은 예수를 주로 믿는 이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분은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셔서 말씀의 씨앗이 심기워지고 은혜의 양분을 먹으며 자라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현실의 권력 너머로 하나님께서 가져다 주실 것들을 보고, 그 약속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지금 여기에 계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도우시고,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님이 주인 되시는 나라를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겁니다. 수 없이 많은 말씀을 들어도 메마른 이야기 이상이 되지 않는 것은 ‘성령’에 의해 보는 눈, 듣는 귀가 열리지 않은 탓이고, 단 한마디 말씀에도 억눌렸던 삶이 용납되는 구원을 경험하시는 것도 모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결코 들으려하지 않는 분도 계시지만, ‘이제 내가 주님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소망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분들도 있지만,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삶을 건져올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도는 단순히 불안한 자기 감정의 위안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지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고 그래서 오늘이 불안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와 간섭하심안에 있으니 내 영혼은 안전하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우리가 뛰어난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없이 무능할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은 지능이나 지식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도 우리의 능력이나 자격안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성도를 성도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응답되어지는 기도, 말씀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신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실 때,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벗어내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해주실 때에만 가능한 겁니다. 결국 가리워졌던 것들이 밝혀지고, 닫혀 있던 것들이 깨어지는 사건이야 말로 ‘성령’을 체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찾아오시면 더 이상 거짓에 속지 않고, 썩어 없어지는 것을 향하던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시대의 정신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될 만큼, 우리의 정신과 이성을 거룩하고 새롭게 변화시켜주십니다. 그래서 독일어 성경은 ‘성령’을 Geist 즉, ‘정신’이라고도 풀이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알게 되고, 주님만을 내 구원이라고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런 우리임에도 여전히 성령의 위로를 경험하거나, 그 가르침과 역사를 따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 음식규정, 절기규정과 같은 '자기 의’를 드러낼 수 있는 것들이나, 천사 숭배와 같은 헛된 것들에 눈이 팔리고 귀가 팔린 탓이라고 지적합니다. (골로새서 2:8~16) 이런 것들은 대부분 오늘 ‘이렇게 살아라, 그렇게 해야만 살 수 있다’고 하는 세상의 가치와 가르침들입니다. 어느새 우리들도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사로잡히고, 한번 거기에 붙잡히고 난 이후에는 좀처럼 벗어나질 못합니다. 가장 좋은 것, 하늘에 잇대어 살아가는 기쁨,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만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삶을 구원하는 모든 능력되시는 하나님과의 소통에 있어서 우리를 묶어주는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끈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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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깨어진 세상을 건져내고 사람사는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든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다시금 생명의 소통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성령이 세속에 찌들고 사로잡혀있는 우리의 정신을 맑게 해주시고, 닫혀 있는 눈과 귀를 열어주실 때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움은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던 겁니다. 부와 명예를 구하며 세상을 따르는 이들과 달리, 우리의 기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여기에 계심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으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른 것을 보화로 삼고 찾고 구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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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송인 시편 기자가 서있던 삶의 자리는 무척 사나왔습니다. 포로에서 갓 돌아온 땅은 황폐하기 그지 없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잡아도 훼방하고 괴롭히는 이들의 방해마져 삶을 힘들게만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힘을 갖고, 부와 명예를 얻으라고 유혹합니다. 우리도 그런 유혹에 솔깃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만 듣고, 주님의 말씀만 양식을 먹듯 따르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지금 보이지 않아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믿으며 살겠노라고 인생을 거는 이들에게 성령은 찾아오십니다. 평화가 온통 깨어져버린 것 같은 그 땅에서도 시편 기자는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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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내가 듣겠습니다’ | 시편 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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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고백은 허무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복음서에서 읽은 주님의 말씀이 응답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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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 누가복음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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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말씀하시든 주님께 듣는 이들에게는,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마다 모든 좋은 것을 아낌없이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삶에 채우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언제나 당신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의 부르짖음과 기도를 먼저 듣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사람들은 간절함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오히려 뱀이나 전갈을 던져주는 불의한 세상과 달리, 언제나 모든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며 살아갑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토록 사나운 시간속에서도 기도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뜨거운 햇볕아래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가듯, 주님의 마음을 관통하는 기도가 익어가는 성령충만한 믿음의 걸음이 되기를, 마침내 온 누리에 우리의 기도를 통해 주님의 나라가 무르익어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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