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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7/31 성령강림후 8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7. 27. 13:11

    성서일과 본문

    1독서 | 호세아서 11:1-11 혹은 전도서 1:2, 12~14, 2:18~23

      응송 | 시편 107:1-9, 43

    2독서 | 골로새서 3:1-11

    3독서 | 누가복음 12:13-21

     

    설교음원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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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mmbrant, The Parable of the Rich Fool, 1627

     

    '부자' 그리고  '부요한 자'

    1.

    예언자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습니다. 주어진 말씀이 비록 자신들의 허물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은 누구도 원망할 없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아무리 부드러운 말씀으로 이끄셔도 듣지 않고, 깨어나라는 엄한 말씀도 무시한 것이 자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심판은 저들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였고, 자초한  미래였을 입니다. 만일 우리 사는 세상이었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무시했던 배은망덕한 이들은 진작에 버려졌을 겁니다. 이제 정말 하나님이 포기하시면, 그들은 그대로 끝장입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것처럼 스스로를 회복할 없으니, 그들의 운명은 그들 자신이 아닌 순전히 하나님께만 달려있는 겁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살아있고, 그래서 희망이 있습니다. 이들을 다시금 하나님 백성답게 회복시키시고, 당신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따끔한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매섭고 아픈 심판의 회초리는 자신의 백성들이 참된 생명이 누구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아직 이스라엘을 포기하시지 않으셨다는 이보다 분명한 증거는 없습니다.

    알아듣지를 못하는 그들을 살려내시기 위해 하나님은 도무지 아끼는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가르쳐도 되지 않으니 손으로 거두시는 밖에는 어찌할 없습니다. 발로 걸어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없어 친히 이스라엘을 자신의 등에 업고 가셨고, 젖을 먹여 살려내셨습니다. 백성을 향한 사랑은 버릴 없는 사랑, 지독할 정도로 포기하지 않고 끌고 가시는 사랑, 그러니 주님의 사랑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끙끙 앓는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그런 백성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들 때문에 이처럼 아프고 상해 끙끙앓고 계시는데, 잠시 자신들에게 주어진 찰라같은 시간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돌이킬 줄을 모릅니다. 무엇이 귀한 것인지, 생명이 어디에 달려있는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2.

    그런데 바울사도의 눈에는 신약의 때도, 구약시대와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시대에도 여전합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에는 무관심하고 땅에 있는 것들에 대한 육욕과 탐욕은 더해만 갑니다. 우리 시대라고 다를 바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탐욕에 빠진 이런 모습을우상숭배 같다고까지 말합니다. 탐욕이 우상숭배일까요?

     

    오늘 사람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형이 몫을 나눠주지 않아서였던 것인지, 몫까지 욕심을 냈던 건지 수는 없지만, ‘형에게 나와 유산을 나누게 해달라 부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유산분쟁의 위기 한복판에 예수님이 계신 겁니다. 그이는 주님이 자신의 편이 되어주시기를 바라고 있지만, 주님은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당신은 분쟁을 해결하는 랍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편이나 편도, 그의 형이나 자신의 편도 아니십니다. 우리가 말씀이신 주님의 편이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이 속해 있는 곳은하나님 나라뿐입니다. 

    이어지는어리석은 부자 관한 비유의 말씀은, 바로 사실을 가리켜주는 말씀인 셈입니다. 비유속에 등장하는 부자가 소출을 많이 거두었습니다. 말씀안에서도빈익빈, 부익부 자본주의의 신화가 고스란히 적용되는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가 도둑질을 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았다는 언급이 없으니 직접적으로 부자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1독서와 서신서 말씀과 관련성안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신 까닭이 그의탐욕때문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의 눈에도 예수님께서 부자를 어리석다고 하실 만큼의탐욕스러워 보이시는지요? 그는 오늘로 치면, 주식투자나, 부동산, 비트코인에 투자해서 크게 성공한 사람일른지 모릅니다. 제게 주어진 몫을 활용하고 열심히 살아 수익을 얻었으니 요즘 같으면 오히려 성실하다고 칭찬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몫을 성실하게 일하여서 소출을 많이 거두게 되었고, 이제 그것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넓히고 많이 보관하는 것이 그가 전부였지만, 여전히 책잡을 만한 것이 두드러져 보이질 않습니다. 

     

    3.

    우리가 부자의 모습안에서 딱히 뭐가 문제인지 찾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는탐욕과는 관계가 없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부자가 아니라는 생각, 탐욕은 자신 밖에 모르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 여기는 탓입니다. 자신은 비유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사람일리가 없다는 안도감에 취해있다보니, 일그러진탐욕 모습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던 겁니다.
    부자의 모습안에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있습니다. 첫째, 부자는 지금껏 가지고 있던 창고가 채워진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부자 되고 싶어합니다. ‘부자 된다는 것은, 궁박에 내몰리지 않고 선택권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부자가 되고나면선택권 사라지고, 자유도 결핍됩니다. 실재로 오늘 본문의 부자는 여느해 보다 많이 거두게 풍성한 소출을 해결할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명기 24:19 말씀처럼, 추수할 미쳐 거두지 못한 곡식단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두어도 됩니다. 어차피 제가 먹을 몫이 아닙니다. 감을 수확할 까치밥은 남겨두려고 했던 우리 조상들처럼, 많이 나누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오늘 창고를 채우고 남은 마져도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 창고를 짓겠다는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을 뿐입니다. 강요된 선택일 뿐이니, ‘자유 아닙니다. 

    탐욕이라는 것은내게 허락된 ’, ‘정당한 이상을 갖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정의 합니다. ‘탐욕 밖에 있는 것을 가지려는 악착같은 모습으로도 드러나지만, 안에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대부분의 마음도탐욕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회는 오히려 자기 이상을 탐하는 헛된 마음을 부추기고, 그러면서도 반대로 마땅히 정당한 자기 몫을 요구하는 이들은 비난하려고 듭니다. 모든 이들의 것을 마치 본래부터 것인 처럼 쌓아두려는 이들을 우러러보면서도, 척박한 근로환경에서 수고하는 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노동의 가치는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4.

    두번째, 본질적인 부자의 어리석음은 19절에서 발견할 있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 19절b

     

    예수님께서 그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저축하고 쌓아두는 것이 문제가 될리도 없습니다. ‘? 쌓아두려고 했는가 대한 답이 문제인 겁니다. 응당 재물이란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뿐입니다. 돈이란 필요할 사용되어져야 것이지, 장롱 깊은 금고속에 모셔두어야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창고 가득 쌓아두기만 했습니다. 그리곤 만큼 쌓아두었으니 여러 동안 걱정 없이 있다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살려 것이라는 바로 헛된 믿음이 문제입니다. 생명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이 계심에도 손으로 쌓아올린 재물에 생명을 의지하였으니, 세상은 모두 그를 부러워할른지 몰라도 주님의 눈에는 그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우상숭배자일 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그것만 있으면', '그것이 없어서라고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 것들이 내가 의지하는 나의 우상입니다. 결국 이미 창고를 가득 채웠으니 한해 넉넉했을 테고, 오늘이면 족했을 텐데, 그는 주어진 너머까지쌓아 두고야 말겠다 탐욕으로 몰렸습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의 결과인 셈입니다. 

    어쩌다가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숭배의 길을 따르게 되었을까요? 돌아보니 세상에서의 바쁜 걸음위에, 그것만 가지면이라는 탐욕을 쫓고, 하나님께서 선물처럼 주신 것들은이것 이라며 주님의 손을 멸시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가끔은이건 아니다싶은 생각도 들지만, 언제부터인가 좋으면 좋은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하나님 없이 홀로 힘겨워하는 시간에 쉽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내가 지금 주님의 은혜로 살아있다는 ,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시간이 은혜였다는 고백은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전도자의 고백(1:2), ‘너는 다 이루어보았으니 그런 소리를 하는 것 아니냐 배부른 소리 취급해버리고 맙니다. 안타깝지만 그렇듯 지나고 이후에야 손에 들리워졌던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깨닫고 맙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기 직전까지 생각과 바람대로 있으리라 착각했던부자 바로 우리들자신입니다.

     

    5.

    주님으로부터생명 허락받았다는 , 내가 주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고, 아닌 것들에 시선을 빼앗긴 바쁘게 쫓기다보면, ‘우상숭배인지도 모른 , 세상 염려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호세아 말씀처럼 이스라엘을 두고 보실 없던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잃고 길을 잃어버린 우리를 그대로 두고 보실 수가 없습니다. 굶주린 시간에 이르러야 일용할 양식이 무엇보다 귀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처럼, 생명의 감동과 환희를 기억해내는 것은 생명을 위협받게 되는 안타까운 순간에만 가능합니다. 그러고 보면, 오히려 포로기의 아픈 시간, 하나님이 드시는 아픈 매를 맞는 시간이 약이야 말로, 탐욕을 벗어낼 있는 약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고난이나 고통의 시간을 다시금 돌아봅니다. 쓰디 아픔의 시간은 누구로부터 비롯한 걸까요? 하나님이 주신 걸까요? 아니면 내가 선택한 결과일까요? 그도 아니면 전도자의 독백처럼 설명할 없는 허무하고 헛된 현실일 뿐일까요?

    모든 것이 헛될 뿐이라고 말하던 전도자는 결국 허무로 가득차 있고, 결국 허무로 끝나버릴 인생을 살아가게 만드신 하나님을 이해할 없다고 한탄했습니다.(전도서 1:13) 그러나 세상을 얻은 같고, 모든 지혜자 가운데 지혜자라고 불리웠던 그도 미쳐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그의 허무가 하나님의 은총과 우상숭배의 사이에서 우상을 선택했던 그의 선택으로부터 비롯했다는 , 그리고허무 삼키워지지 않도록 본래부터 먼지였던 우리 인생을 함이 없는 사랑으로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될 있는지 그는 맛보지 못했습니다.

     

    6.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상숭배하던 어리석은 사람의 삶을 벗어내라고 외칩니다. ‘ 사람이란 하나님을 구원으로 삼지 않고, ‘이것이 없어서불행하다 불평하고, ‘저것만 가지면이라고 불안에 사로잡혀 살던 자신만을 믿으며 살아왔던 시간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잇대어 풍성한 생명안에 거하는 , 십자가라는 죽음이 짓눌러도 죽을 없는 넘치는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부활 보여주신 겁니다.

    일단 탐심과 자기 자랑으로 껴입던 세상의 옷들을 벗고, 하나님의 은총의 옷인 예수 그리스도를 입게 되면 비로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신비를 느낄 있게 됩니다. 구원을 경험한 응송인 시편 기자는 만방을 향해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안에는 헛된 구원, 헛된 길을 찾아 헤매이다 결국은 배고프고 목이 마르고 기력이 빠진 , 고통과 부르짖음이 허무로 끝나버릴 인생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을 향해 돌이키라는 확신에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헛된 것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인 생명에 천착하는 이들입니다. 생을 다하여,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야 말로 생명을 구원해 내는 길이라는 참된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제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 누가복음 12:21

     

    주님의 말씀은, 너희는 하나님께 대해서 부요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세상 모든 것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앞에서부자 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랑할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누어 드릴 것이 있는 사람이라니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 잠언 19:17

     

    가난한 이들 돈이 없는 이들만이 아닙니다.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힘으로 누리며 살아갈 없는 모든 연약하고 소외된 이들입니다. 이들을 위해 손을 펴는 것이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과 같은 겁니다. 쌓아두는 것은 부요함이 아닙니다. 움켜쥐는 것은 아직도 안이 비어있다는 증거입니다. 반면에 나눠 있음은, 오늘 주어진 몫이 감사하고, 자유롭다는 반증일 겁니다. 부유함도 권세도 땅의 무엇도 예수님을 억압하고 가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공급받는 참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계셨기에, 부유함이나 권세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셨습니다. 죽음 조차 그분을 억압할 없으니 주님은 자유이시며, 평화이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이들이라면,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 따라갈 밖에는 없습니다. 생명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7.

    지난 주말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들과 사측간의 합의가 파업 50일만에 타결되었습니다. 당초 하청지회 노동자들은 30% 임금인상을 요구했는데, 4.5% 사측의 의견을 수용한 겁니다. 회사측은 경영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인상요구를 거절했지만, 노동자들이 희생을 감내하기로 양보한 겁니다. 마음이 급했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수는 없다 목숨을 걸고 스스로 0.3 철제구조물을 용접해 만든 감옥안에 들어가 한달을 버티고 있는유최안' 부지회장을 살려내기 위한 선택입니다. 세상의 부자들에게는 여전히 경기, 여건, 상황이 중요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부요한 사람들은생명 눈에 들어오는 법입니다. 여론은 살인적으로 치솟고 있는 물가 상승률에 턱없이 모자라는 임금인상임을 알면서도 마치 노동자들이 불법적으로 몫이상을 욕심낸 것처럼 비난하려고 듭니다. 탐욕에 길들여진 세상에 부역하는 이들입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이름 조차 감당하기 버거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사람의 옷이 되어 주셨으니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 골로새서 3:10

     

    하나님은 우리의 손이 이웃들을 향해 펴질 , 당신께 꾸어주는 것으로 삼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해 손을 올리는 길이고, 손에 하나님은 넘치는 생명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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