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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4 성령강림후 10주 *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8. 10. 13:15
성서일과 본문
1독서 | 이사야 5:1~7 혹은 예레미야 23:23~29
응송 | 시편 80:1~2, 8~19 혹은 82
2독서 | 히브리서 11:29 ~ 12:2
3독서 | 누가복음 12:49~56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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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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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소리 (正音), '복음' (福音)
# 1
어렸을 때는 하늘 끝, 바다 끝까지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철이 들었다는 증거일 겁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세상은 둘러볼 때마다 답답하고, 이 다음고개를 넘어서면 또 어떤 모습이 펼쳐질지 아찔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살만해 졌다고 하는데 왜 제 눈에는 터무니 없이 내몰린 이들의 모습이 자꾸 들어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민주국가나 시민사회를 언급하지만 여전히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불의하고 불온한 이들 때문에 ‘정의’는 몰락해보입니다. 예수를 믿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저 그러려니 했고, 좀더 열심히 살고, 좀더 성공하면 되겠거니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안에서 생명의 길을 발견한 이후로 날이 갈 수록, 그리고 은혜를 경험하면 할 수록 답답함이 짙어지고 마음이 속상해지니 이상할 노릇입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세상은 여전히 생명의 길을 전하고 바른 걸음을 재촉하는 목소리를 외면합니다. 납득이 되질 않는 불편함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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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돌아가는 것이 참 이기적으로 보입니다. 대형 마켓들이 동네로 밀고들어옵니다. 중소기업의 고혈을 빨아먹고 성장한 대기업들은 기술과 인프라 투자 대신 땅투기에만 혈안인체 다가올 국제 위기를 직면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승승장구하고 거짓된 입술들이 정의를 말하며 돌을 던지고 칼을 휘두릅니다. 환경오염 탓에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해수면의 온도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상 기후로 지구촌 곳곳이 몸살을 앓고 있고, 환경 전문가들은 전 지구적 재앙을 경고하고 있지만, 모두가 남의 이야기일 뿐 귀담아 들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마져 이런 세상의 흐름을 따라 병들어 가는 모습입니다. 작은 교회에서 키워진 이들이 수평이동해 덩치를 키운 대형교회들이 계속해서 몸집을 키우고 으스대는 일에만 내몰려 정작 생명을 살리는 일에 무관심합니다. 해외에 선교센터를 짓는다는 이들이 주변의 작은 교회들을 무너트리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작은 교회 토양이 무너지는 순간 한국교회 전체가 병들 수 밖에는 없음도, 저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마음 탓입니다.
여전히 세상은 돈만 많이 벌면 다 잘 될거라고, 잘 살게 될거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좋은 아파트, 멋진 세단, 우아한 삶을 티비 드라마나 cf의 장면들을 통해 보여주고, 사람들은 점점 자신에게 주어질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그런 화면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어느새 삶의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 채 무심해집니다. 누구든 먼저 달려가 깃발만 꼽으면 제것으로 얻을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탓에 좌우 조차 돌아볼 여유를 잃은 목이 곧고 뻣뻣해진 모습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무너지면 결국 내 자신의 삶도 함께 죽어가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채, ‘갑’이 되기 위해 애를 쓰지만 결국은 또 다른 ‘을’이 되는 길로 달리기만 하다보니, 이제는 너무 많이 지나온 것은 아닐까싶어 두렵습니다. 쉼없는 경쟁으로 내모는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세상을 거스르고 모두가 존재 자체만으로 용납되는 삶을 선택할 ‘용기’가 필요하지만, 본래 세상은 그렇다고 무시하거나, 나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며 체념합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입니다. 계속 타고가면 호랑이 굴에 끌려가고 말겠지만, 그렇다고 도중에 내리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형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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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런 불운한 모습은 안타깝지만 역사속에서 계속되어 왔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이제 곧 더 나은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지금도 도시개발이라든지, 아파트 단지와 같은 허울 좋은 이야기들에 사람들은 쉽게 현혹됩니다. 달콤한 성공신화에 사람들의 눈이 어두워진 탓에, 불편한 현실을 직면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권을 챙기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제로섬 게임’에서, 나는 피해자가 아닌 성공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환상은 ‘유토피아’를 향한 걸음을 고집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정치, 문화, 교육, 경제, 과학, 철학과 종교들이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제시해왔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본래 ‘유토피아’라는 말 자체가 ‘그런 세상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세상’은 없음에도 여전히 ‘없는 세상’을 쫓으며 살아가도록 하는 선동들의 목적은 한가지 뿐입니다. 현실을 거스르지 못하고 순응하게 만드는 겁니다. 억울하고 부당해도 순응하고 복종하는 그런 사람들을 '노예'라고 부릅니다.
이런 속임에 사로잡히지 않고 알찬 인생을 살기 위해선 눈에 보이는 현실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하고, 이런 현실을 왕국삼아 이득을 얻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된 선동에 속지 않고 진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하고, 땀흘려 수고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투기나 한탕주의로 배불리는 이들의 세계에서 구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속임에서 깨어 천천히 들여다 보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깨어 있어야만 예수의 말씀처럼 생명을 도둑질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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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현실의 유혹과 속임, 폭력앞에서 사람들이 무너져갈 때도 이면과 너머를 꿰뚫어 보면서 뱀의 유혹을 이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특히 시인들은 그런면에서 탁월해 보입니다. 매서운 겨울 바람속에서도 봄을 읽어내는 것처럼, 늘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본질을 향하며 집중하는 사람들, 영적인 감수성이 예민한 이들입니다. 푸요를 말하는 시대에도 이들은 배고픔과 결핍을 찾아냅니다. 오늘 응송인 시편 82편의 저자 ‘아삽’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시인이자 음악가였습니다. ‘모으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솔로몬왕 때 합창단 단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언약궤 앞에서 제금을 켜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번성하던 시대에 취해있던 사람들과 달리 그는 깨어서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 없는 불의한 땅인 것처럼 하나님처럼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자신들의 형통함을 자랑하는 악인들의 모습입니다. 시인은 어째서 세상에 이런 불공평과 불의함이 만연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의롭게 살아가는 이들의 걸음은 얼마나 힘겨울까요? 본래 그런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이들 틈에서, 이런 엉터리 같은 세상의 부조리를 보게 된 시인의 마음은 괴롭고 시름시름 아파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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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복음서에서 마주하게 되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연장선 상에서 읽혀집니다. 다른 때도 그러했지만, 특히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누가복음 12:51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불을 지르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분명 누가는 아기 예수께서 깨어진 이 땅에 평화를 전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누가복음 19:38)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정반대의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으니 혼란스러울 수 밖에요.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이 땅의 ‘복음’, 기쁨의 소식으로 보내주셨고, 전쟁과 폭력, 기근과 혼란으로 불화한 세상을 위한 복음은 ‘평화’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평화’가 아닌 분열과 불을 주시러 오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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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다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대체 ‘복음’이 뭘까요? 그 동안 우리는 ‘복음’을 단순히 듣기 좋은 소리, 달콤한 위로의 말씀 정도로 이해해왔습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전해지는 소리인 ‘복음’은 죽은 사람이 들으면 살아나게 되는 소리이며, 병들어 있는 고쳐내기 위한 쓰디 쓴 약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복음’은 때로는 그릇된 죄의 길로 치닿던 죄인들의 걸음을 멈춰세우는 사납게 때려오는 매서운 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르는 이들에게 전해지는 ‘복된 소식’입니다. 마땅한 길에서 어긋나 하나님 없이 살고 있을 때 복음은 여지없이 천둥같은 말씀으로 찾아와, 삶을 뒤흔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도 이전에 살던 방식이 여전히 익숙해져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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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구약 본문에도 매서운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1독서 본문은 이사야 5장과 선택본문으로 예레미야 23장이 주어졌습니다. 이사야 5장은 극상품 포도를 거두기 위해 정성을 다해 포도원을 가꾼 농부처럼 하나님께서 돌보고 지키셨음에도, 마치 먹을 수 없는 들포도가 맺힌 것처럼 살육과 악행만을 일삼고 있던 유다를 향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선택본문인 예레미야는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거짓 예언을 일삼고 바알과 우상을 숭배하는 유다 왕국의 망국적인 패악함을 꾸짖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의 배를 섬기며 살아가는 오늘의 모습과 어쩜 그렇게 닮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여튼 예언자를 통해 전해지는 주님의 꾸짖음은 매섭고 단호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쓸모없는 들포도를 맺느니 차라리 포도원을 갈아엎어 버리고 말겠다고 (이사야 5:5~6) 하셨습니다.
‘내 말은 맹렬하게 타는 불이다. 바위를 부수는 망치다. 나 주의 말이다’ | 예레미야 23:27
예레미야를 통해 전하시는 말씀도 만만치 않습니다. 태우고 부수겠다는 ‘주의 말’이 주어졌으니 허투루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겁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없애버리실 작정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두렵습니다. 하지만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다시금 찬찬히 말씀을 읽어보니 이처럼 큰 소리로 외치시는 마음이 읽혀집니다. 정말 유다를 끝장내실 작정이셨으면 선지자를 통해 큰 소리로 외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은 갈아 엎고, 태우고, 부수어 버리겠다는 말씀이 유다에게는 ‘복’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데, 잘 살고 있다면, 악을 행하고 불의함을 일삼는데 형통하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버려진 것이고 죽은 겁니다. 그릇된 나무를 그대로 두고 거름이나 양분을 주는 것은, 잘 먹어 암세포를 키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무가 그릇되었다면 뽑고, 밭이 잘못되었다면 차라리 갈아 엎어야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겁니다. 다시 살려면 이 수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세상에 불을 붙이고, 분열시키겠다고 하신 말씀이 이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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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그런데 주님은 이 일을 위해 당신께서 짊어지실 괴로움과 고난의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누가복음 12:50
그 고난은 ‘십자가’ 즉 ‘죽음’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받으실 ‘세례’, 즉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이라면, 설령 그가 탐욕에 사로잡혀 살거나 악행을 일삼는 죄인이거나, 혹은 그 반대일지라도 누구도 벗어날 수 없이 ‘죽음’에 묶여 한 몸이 되어 살아갑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셈이라는 철학자의 말이 실감납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분열시키고 갈라지게 하시겠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를 묶고 있는 ‘죽음’으로부터 풀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결코 화해하거나 타협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유대 기득권자들이나, 로마 총독의 겁박 앞에서도, 바리새인들의 아첨에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애당초 당신은 우리에게 들러붙어있는 죄와 죽음을 당신의 못박힌 손으로 뜯어내시기 위해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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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교회안에서가 아니라 타자의 얼굴에서, 힘겨운 우리 삶, 일그러진 세상안에서 여기에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보라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간 초기 교회 공동체 이후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안에서 제 자신에게 불쑥 찾아온 고난과 역경에 대한 실마리를 찾으려 했습니다. 우리도 바로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이 시대 안에서 세상과 다른 소리인 주님의 말씀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 그런 겁니다. 그들과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 우리입니다. 주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의식, 우리의 정신은 깨어있습니까? 혹시 세상의 말투나 살아가는 모습과 너무 닮아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남과 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 마져도,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는 거짓된 환상에 사로잡혀 꿈꾸지 못한 채 잠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으로 힘차게 달려가다가 넘어지거나 비틀거리다가 어느새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나도 형통한 듯 보이는 악인들처럼’이라는 달콤한 속삼임이 아우성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악인이 형통해지는 유일한 경우는, 의로롭고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실망하고 포기하게 될 때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쓰러지더라도 타협하지 마시고,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주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살아남았고,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살아낸 구름 처럼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결국 세상도 이런 사람들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그들의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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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선지자들, 시인들, 그리고 수 많은 믿음의 사람들, 그리고 오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모두는 세상과는 다른 눈, 다른 귀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들은 늘 자신들의 생각이나 말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고 조율했습니다. 하나님을 노래하는 시인들은 어떻습니까? 제 아무리 비싼 악기를 사용하고, 노래를 잘한다고 해도 한음 한음 정확한 음을 집어내지 못하는 순간 ‘소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정확한 음, 본래의 음에 자신을 맞추는 튜닝에 철저합니다. 본질과 기준에 잇대려는 이런 습관이 주님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가져다 주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아가실 수 있던 것은, 부끄러움이나 십자가가 아닌 자신 앞에 놓여있는 '기쁨을 내다 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삶을 넉넉히 이겨낼 만큼 ‘내다 볼 능력’이나, ‘믿음’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통해 그 일을 보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시며 믿음의 결국인 ‘부활’을 이루신 그분을 의지하고 따르는 길 뿐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그릇된 삶을 조율하는 바른 소리(正音)이며, 생명을 살리는 복된 소리(福音)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사특하고 헛된 소리가 아닌, 생명을 살리시는 바른 소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영혼을 잇댈 뿐입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 히브리서 1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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