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0/02 성령강림후 17주 *세계성찬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9. 29. 12:22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예레미야애가 1:1-6 (혹은) | 하박국 1:1~4; 2:1~4
응송 | 시편 137
2독서 | 디모데후서 1:1-14
3독서 | 누가복음 17:5-10
설교음원
http://naver.me/5dyTNXeS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8RxgbMf0G5I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_ 'The Exhortation to the Apostles, 1886-1896'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1
선지자들은 ‘현실’에 안주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현실’을 들여다보고 그릇된 걸음은 책망하고 바른 길로 나오라고 외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하는 교만에 빠지거나, 반대로 절망한 채 현실에 굴복하는 비굴함에 빠진 이들의 귀에는 선지자의 외침은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가한 소리처럼 들리고, 현실감 없는 말처럼 귀찮기만 합니다. 제 아무리 ‘심판이 목전에 임하였다’는 말씀을 전해도, 당장 눈앞에 있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겨,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외면하는 이들에게 ‘내일’은 그저 늘 그래왔던 똑같은 날 뿐입니다. 어찌해서든 이런 현실을 그리고 내일의 일그러짐을 막아보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치지만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에 괴로운 것은, 늘 현실을 직면하고 그 길 끝이 심판과 패망임을 깨닫는 이들의 몫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늘 외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치우쳐 깨닫지 못하는 잠들어 있는 시대를, 홀로 깨어 살아가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1독서 본문에 등장하는 선지자 ‘하박국’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그의 눈에 처해있는 현실은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공의와 정의는 무너지고, 거짓이 정직을 조롱하며, 악인들이 형통하여 의인들의 눈물이 곳곳에서 울려퍼지고 있으니 단단히 잘 못된 세상입니다. 하지만 사정이 나아질 기미는 어디를 둘러 보아도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에게 더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무관심해 보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타협하며 살면 그만일텐데, 이런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그는 괴롭기만 합니다. 어쩌다가 세상이 이리 되었는지 한스럽지만, 그렇다고 꿈을 포기한 채 노예처럼 현실에 타협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매일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님의 답변을 구하지만 그의 마음은 타들어가는 심정입니다. ‘포옹하다’, ‘끌어안다’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 ‘하박국’(히브리어 ‘카바크’-chabaq) 처럼,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 삶의 무게를 끌어안고 끝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몸부림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는 오늘 우리의 삶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만과 탐욕, 불의와 불법,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져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주님을 향해 던지는 물음을 하박국도 짊어지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시니 언제까지 이런 현실을 방관하실 것인지(1:2), 악인이 의인을 괴롭히고 정의가 굽게 된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인지 (1:3~4),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처럼 이해할 수 없고 만족할 수 없고 답할 수 없는 현실을 끌어안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의 물음에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주신 답변은 무너진 이 땅을 갈대아 사람인 바벨론을 일으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1:6~) 하지만 그 답변이 선지자의 마음은 더 힘들게 합니다. 아무리 유다가 악하다 하여도, 제 힘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오만한 바벨론을 유다를 징계하는 회초리로 선택하실 수는 없는 겁니다. 납득할 수가 없기에, ‘왜? 바벨론입니까?’라고 물을 수 밖에는 없지만, 곧장 주님의 말씀 앞에서 그는 ‘아멘’으로 답하고 맙니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 2:4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시고 그 뜻은 우리보다 높으시니, 선택하신 이 길은 또한 가장 옳은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유다가 망하게 된 이유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다가 살 길은 주님을 믿는 것 뿐입니다. 주님은 믿는 이들이야 말로 주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
2
복음서 말씀도 ‘믿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7장 5절부터 시작하지만, 본래의 말씀의 취지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략된 1절부터 4절까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 만큼이나 자주 오독(誤讀)되거나 그릇 해석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한 본문입니다.
1절과 2절은 실족과 실족하게 한 이에게 주님께서 물으시는 책임에 관한 말씀이고,
3절과 4절까지는 용서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오늘 5절부터 읽은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는 내용이나, 하루에 일곱번 죄를 짓고도 일곱번 돌아와 회개하는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은, ‘믿음’과는 연관성이 없는 오히려 쌩뚱맞게 보이기 까지 합니다. 그래서 4절까지의 내용은 생략하고 곧장 5절 이하의 ‘믿음’과 관련된 내용을 읽곤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믿음’이 아닌, 오히려 앞의 4절까지의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믿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믿음’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 걸까요?
.5절의 말씀은 주님께 간청하는 사도들의 바람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거나, 먹고 살만 하게 해달라거나, 명예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아닌 ‘믿음’을 구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기특합니다. 마치 ‘부’나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을 멸하는 것이나 ‘장수’조차 구하지 않아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었던 ‘솔로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역시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로 택하신 이들이라 그런지 싹수가 달라 보입니다. 다만 그들이 ‘믿음’을 달라고 요청했던 이유가 문제입니다. 앞서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제자들이라면 마땅히 ‘보잘 것 없는 연약한 이들’을 돌보고, 도무지 용서할 수 없을 만한 이들을 용서하는 이들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으레 제게 유익이 될만한 큰 사람들을 좋아라하고 섬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니 오히려 득될 것이 없고 갚을 것 없는 이들을 존중하고 섬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용서하라는 말씀도 문제입니다. 내게 해를 끼치는 이들, 아무리 용서해도 또 다시 죄를 짓고 뉘우침 없는 이들을 용서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스스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임을 누구보다 제자들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돈이나 힘이 많아야만 뭐든 할 수 있다는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제자들은 마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주의 나라를 구한다거나 영광을 돌리는 데에도 더 큰 믿음, 더 많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질 수 밖에는 없던 겁니다. 우리가 ‘믿음’을 구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의 간청을 들으신 주님의 답변이 달갑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속마음 형편을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 17:6
속시원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던가 무언가 부족하다면 '좀 더 분발하라’고 말씀해주시면 좋을 텐데, ‘그래, 너희 믿음의 수준이 겨자씨 한 알도 않될 만큼 그렇게 형편없다’ 책망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겨자씨 한알만 있으면 족한데 무얼 또 구하는 것이냐?’고 타박하시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게다가 마지막 10절의 ‘너희는 쓸모 없는 무익한 종’일 뿐이라는 비유는 우리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듭니다.
.
3
손 끝으로 집기도 어려울 만큼 매우 작은 것이 ‘겨자씨’입니다. 그러다보니 겨자씨는 ‘아주 작은 믿음’을 뜻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믿음’에도 수준이나 차이가 있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우리 신앙의 모습을 보면 그런 해석이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믿음을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가시적인 것으로 여기는 탓에, 정작 믿음의 문제 앞에 설때 마다 더 많은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우리 마음은 헛헛해지고, 더 많은 믿음을 가져보려고 헛발질을 하게 됩니다. 불치의 병이 낫는다던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여겼던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무언가 초자연적이거나 모두가 우러러 볼 만한 대단한 일을 ‘믿음’의 정도나 크기로 가늠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들도 심심치 않게 교회를 크게 늘리고 성장시키는 것을 ‘믿음’의 능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믿음 없음’이나 ‘불신’으로 매도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저 사람 처럼’, ‘저런 식’으로 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믿음 없음 탓’이 되기 마련이고, 돈이나 명예를 바라보던 그런 시선으로 누군가의 믿음을 부러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주님을 향해 믿음을 달라던 제자들처럼 기도의 자리에서 ‘믿음을 달라’고 외치지만, 그런 바람들은 사실 무언가 제 자신이 ‘큰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큰 믿음’ 뿐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실재로 삶에서 이런 식의 믿음이 공식처럼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은 더 가지고, 더 채워야 하는 ‘소유’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신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저 목사님, 믿음이 없으시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뽕나무는 바다에 심기워질 수 없습니다. 정직하게 답변해 보십시오. 쟁쟁한 목사님들이나, 한국 교회 교인들 모두가 나가서 비유의 말씀처럼, ‘바다에 심기워져라’라고 외치면 뽕나무가 바다로 들어가 심기워질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한국 교회안에 믿음이 없다는 말일까요?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는 것인데 어쩌면 좋을까요? 이런 생각들은 모두 ‘믿음’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믿음을 더 가져라!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뽕나무를 옮기는 것은 ‘믿음’과 관련이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너희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믿음은 본래부터 너희 것이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도 주님으로부터만 오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은 큰 능력이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나 영광은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을 뿐,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겁니다. 이것을 공생애 기간 주님께서도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안에 수 없이 많은 병자들이 있음었음에도 예수님은 그들 모두를 고쳐주지는 않았습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그랬을까요? 아니, 그럴 수 없었던 겁니다.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예수님을 통해서, 또 예수님이 드러내셨을 뿐입니다. 누구를 고치고, 누구를 낫게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믿음’을 달라고 합니다. 실은 ‘능력’을 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월권’입니다.
.
4
이런 해석의 근거로 주신 말씀이 마지막에 이어지는 소위 ‘무익한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개역 개정판 성경은 ‘무익한 종’이라고 했고, 새번역 성경은 ‘쓸모 없는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튼 이 말씀의 뜻은 ‘종’이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주인’을 위한 마땅하고 당연한 일일 뿐이라는 겁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주고 받고 있지만, 오늘 말씀은 동시에 바리새인들을 염두하고 있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제자들과 같지 않고, 제자들은 또한 바리새인들과는 달라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몇주에 걸쳐 살펴본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말씀을 지키는 경건함에 있어 누구보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었습니다. 실재로 바리새인 만큼 열정적이고 열심인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늘 ‘내가 이만큼이나 했어’라는 말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부족하고 못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사실 그들이 ‘자기 의’에 충만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한 탓입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런 생각은 누구나 가지는 겁니다. 제자들 중에서는 주님의 오른편에 서게 해달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무익한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종은 있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실재로 ‘복음’안에서 ‘무익하다’는 말씀은 ‘쓸모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은 전혀 다른 것에 의해 용납받는 사람임을 가르쳐주는 겁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그분이 지으신 세계가 깨어지기도 합니다. 주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능하고, 무익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할 수록, 주님으로부터 경험하게 되는 은혜가 커져가는 갑니다. ‘믿음’은 바로 이 사실,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앞에서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포기해야 할 것이 많은 것 같고, 억울하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결코 ‘겨자씨’만한 믿음에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에 이어져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써 보낸 편지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도의 마음은 자신의 뒤를 이어 든든히 세워져 있는 디모데의 모습에 여간 흐뭇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이 보기에 디모데가 거짓없는 믿음안에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나 됨됨이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대 속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을 기억합니다. 그 믿음은 먼저 그대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깃들여 있었는데, 그것이 그대 속에도 깃들여 있음을 나는 확신합니다.’ | 디모데후서 1:5
그의 믿음은 디모데 자신의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것입니다. 물려준 외조모와 그의 어머니의 것도 아닙니다. 그들도 또한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물려받았다는 말은, ‘믿음’ 또한 자랑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5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세상, 불법이 보편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빛’을 바라보는 이들과 정의를 구하는 사람들은 질식하고 맙니다. 소망의 불씨가 싸늘히 식어버린 것 같으니 그렇습니다. '나 혼자 이렇게 살면 뭘 하는가?’라는 패배감과 절망은 암세포처럼 삶을 뒤덮고 맙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서 있던 상황이 그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1장에서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면 좋습니까?’라며 절망하고 절규하던 그에게, 주님은 달려 가면서라도 읽을 수 있도록 당신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판에 새기라고 명령하셨습니다(2장 2절). 판에 새겨두었으니 우리는 말씀을 듣지 못하였노라 변명할 수 없습니다. 한편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님도 변명하실 수 없습니다. 약속을 이행하실 주님의 의지는 분명합니다. 그러니 죄송하지만 주님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염려해야할 것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 뿐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무엇을 해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믿음’은 의인을 살게하는 힘이고 능력입니다. 성경이 정의하는 ‘의인’이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믿는 사람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고 근심하거나 지나친 기쁨에 오만해지셔도 않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게 되었다는 이 사실을 기뻐하며 살아가십시오. 은총을 베푸실 주님만을 믿으며 살아가십시오. 그 말씀이 우리를 살려낼 뿐만 아니라, 주님의 제자답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아멘.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 하박국 3장 17~18절
'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2/10/16 성령강림후 19주 (창조절 7) (0) 2022.10.13 22/10/09 성령강림후 18주 (1) 2022.10.04 22/09/25 성령강림후 16주 (0) 2022.09.22 22/09/18 성령강림후 15주 (1) 2022.09.13 22/09/11 성령강림후 14주 (0) 2022.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