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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10/09 성령강림후 18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10. 4. 19:24

    성서일과 본문

    1독서 | 예레미야 29:1, 4-7 (혹은열왕기하 5:1~3, 7~15

      응송 | 시편 66:1-12

    2독서 | 디모데후서 2:8-15

    3독서 | 누가복음 17:11-19

     

    설교음원

    http://naver.me/FgveusQH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I9qjusqiWIM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코시모 로셀리 _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다' (부분)

    '믿음'  '구원' 사이

     

    #01

    성서일과에서 일반적으로 구약본문은 복음서의 배경이 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들은 이런 면을 고려해서 비교하면서 읽게되면 재미난 사실들을 발견하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특별한 은총을 입게 된 사람들이 모두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었다는 겁니다. 구약 본문에 등장하는 ‘나아만’ 장군은 ‘아람’사람이었고, 복음서에 나오는 나병에서 나음을 입은 사람은 ‘사마리아인’입니다. 그 둘이 앓고 있던 질병은 ‘한센병’입니다. 예전에는 ‘나병’ 또는 ‘문둥이병’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이 병이 치명적인 것은, 몸이 서서히 썩어들어가면서 ‘감각’을 잃게 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나병’은 불신앙에 병들어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전혀 깨닫지 못할 만큼 무감각해져 버린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비난하기 위한 특별한 비유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재미난 것은 그들이 질병에서 낫게 되었던 방식입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번 몸을 닦으라는 선지자 엘리사의 말을 따라 했고, 복음서의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병이 낫는다는 것은, 지난주에 읽었던 뽕나무더러 바다로 들어가라고 명하는 것 만큼이나 말이 되지 않습니다. 분명히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우리도 구약의 ‘나아만’처럼, 화를 내고 돌이키고 말았을 겁니다. 나아만의 불평처럼 요단강보다는 아람에 있는 ‘아마나’, 또는 ‘바르발’강이 더 맑고, 크고, 깨끗하고 신통력이 있어 보일 만큼 그럴 듯해 보입니다. 그러니 나병을 낫기 위해 강에 들어가 씻어야 한다면 백번 양보해도, 요단강보다는 아람의 강에 들어가 씻는 것이 옳아보입니다. 늘 자신의 생각이 기준이 되는 우리의 사고는, 신앙의 자리에서도 여지 없이 드러나고 맙니다.

    그러나, 나아만 이야기의 핵심은 그가 ‘요단강에 들어갔더니 낳았다’는 것이 아니라, ‘듣고 순종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엘리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면 요단강이 아니라 동네 개울에 들어갔어도, 그의 병은 나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이런 식의 누군가 은총이나 이적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또 다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노력을 했기에 그런 경험을 했는지와 같은 방식에만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전해 들은 이야기를 곧장 공식처럼 흉내내거나, 더 뛰어넘어 보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은 내 이야기가 될수 없다는 ‘좌절’만 쌓일 뿐입니다. 지난 주일에 ‘얼마나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가 우리를 능력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 것처럼, 어떤 특별한 방식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를 현혹시키는 것들은 마법이나 마술 같은 속임수일 뿐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 사건앞에서 유념해야할 것은, 우리의 믿음이 기적이나 구원을 향할 것이 아니라, 능히 구원이 되시는 주님을 믿고 그에게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한 우리는, 세상이 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내 자신이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없으면 도무지 믿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다른 이들에게 찾아온 이적을 부러워하면서도, 믿음으로 응답하라는 요청에는 순종하지를 못합니다.

     

    #02

    또 한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1독서 본문 나아만의 치료과정에서 보여준 선지자 엘리사의 반응입니다. 아람의 장군 ‘나아만’이 친히 그의 집까지 찾아왔습니다. ‘아람’은 이스라엘 왕이 벌벌 떨 만큼 강대국입니다. 게다가 적어도 지금은 이스라엘의 운명이 그의 손에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 지나치지 않을 만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국빈입니다. 지난주 복음서 말씀과 빗대어 본다면, 주님께서 실족하게 하면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했던 ‘작고 연약한 이들’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사람, 평상시에 우리가 부러워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일반적이라면 ‘엘리사’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영접해야 합당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저 몸종 하나를 내보내 말을 전한 것이 전부입니다. 선지자에게 있어서 권위는 강대국의 장군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의 병을 고치고 난 이후에도 선지자는 나아만이 고마움으로 전했던 막대한 선물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라면 엘리사에게는 그런 재물들이 그닥 대단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지만, 나아만의 병을 고친 것이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물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 더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마땅합니다. 병을 고친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익한 종’에 관한 지난 주일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매우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복음서 말씀은 구약본문과 내용에 있어서 조금 차이가 납니다. 일단 구약에는 은총을 경험한 사람은 ‘나아만’ 한명 뿐이었지만, 복음서에는 모두 열명의 나병환자가 등장합니다. 이방인이었던 ‘나아만’처럼, 주님께 돌아와 경배했던 사람도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입니다. 말씀에 순종한 이들이 모두 '이방인'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믿음’이란 타고난 출신 성분에 따라 달라진다거나 특별한 어떤 이들에게만 전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해지는 대목입니다. 여튼 예수님께서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지나신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벌써부터 그들은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 일행이 눈에 들어왔음에도 그들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주님을 향해 외칠 뿐입니다. 참으로 안쓰럽고 슬픈 모습입니다. 타는 듯 간절한 마음과 달리 그들은 주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가까이 갈 수 없다고 ‘율법’이 금지한 ‘나병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레위기 13:45) 율법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이들을 성 밖으로 쫓아 내도록 규정되어 있기에, 그들은 병에 걸린 이후로 혹은 어떤 사람은 태어난 이후로 가족들로 부터 외면되고 버려진채 살아와야만 했습니다. ‘멀리 서서’라는 표현이 사랑하는 이들, 평범한 이들의 세상에 닿을 수 없던 그들의 처량한 신세와 아프고 상한 마음의 깊이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의 소원은 나병에서 낫는 것 이상으로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이라면 이 간절한 바램을 이루어주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간절함에, 자신들을 지나쳐가고 계신 주님을 어떻게 해서든 돌이키시게 해야만 했습니다.

     

    #03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 누가복음 17:13

     

    그 간절함이 닿았는지, 마침내 주님이 그들 가까이로 오셨습니다. 일그러진 자신들의 모습이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들을 주님은 말 없이 바라보셨습니다. 보기 흉하게 뒤틀린 병든 몸에 멈추지 않고, 주님의 시선은 곧장 그들의 내면의 아픔과 상처까지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은 아픕니다. 그들이 짊어져야만 했던 모든 아픔을 고스란히 당신의 아픔으로 공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이 주님과 마주쳤을 때 주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그것 뿐입니다. 기적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단촐합니다. 함께 아파해주시는 것도 고맙고, 긍휼히 여겨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만, 이건 그냥 돌려 보내시는 겁니다. 오히려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위로가 먹고 사는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 말고, 보다 실질적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눈을 씻고 다시 들여다 보아도 그들 중에 누구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습니다. 마치 이미 나병에서 나은 사람들인 것처럼 모두 말씀을 따라 제사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반드시 ‘제사장’이 치유여부를 확인한 후에 완치를 선언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 후에야 비로서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율법이 정한 엄한 규정입니다. 이를 어기고 ‘나는 다 나았다’는 생각에 불쑥 공동체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돌에 맞아 죽게 될 겁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그들 모두를 치료해 주시고 ‘평안히 가라’ 말씀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율법보다 더 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굳이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심으로, 치유의 사건을 유보해 두셨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께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치유, 기적을 보이시는 것보다 우선입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셨다면 주님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거스르는 꼴이 되고 말았을 겁니다.

    여튼 제사장을 향해서 가던 도중에 그들은 자신들의 나병이 모두 나았음을 알게 됩니다. 모두들 기뻐하며 자신들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지만,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주님께 돌아와 경배했을 뿐입니다. 그를 바라보시며 나머지 아홉은 어디로 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돌아온 사람이 이 하나 뿐이냐?’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사마리아인 처럼 마땅히 감사하는 자가 되자는 교훈으로 본문을 마무리하곤 합니다. 나머지 아홉명은 모두 배은망덕한 이들이 되고 만 셈입니다. 하지만 애당초 예수님께서는 경배를 받으시거나 칭찬을 받으시기 위해 그들을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엘리사가 나아만의 사례를 거절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 그들이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반대로 사마리아인이 돌아왔다는 것도 신앙적으로는 딱히 칭찬받을 만한 일도 아닙니다. 

     

    #04

    그렇다면 복음서 말씀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나병에서 나은 아홉명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그 마음을 모를 바 아니지만, 바로 그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향한 그들의 시선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치료받는 것’만이 목적이었는데, 목적이 달성된 지금 주님의 말씀은 할 일을 다했을 뿐인 겁니다. 

    사마리아인은 어떻습니까? 그도 제사장에게 가지 않았으니, 주님의 말씀을 다 지키지 않은 셈입니다. 하지만 실은 그는 제사장에게도 갈 수 없는 서러운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인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 제사장이 그를 사면해 줄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헛걸음을 치는 대신에 그는 주저함없이 주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어떤 면에서는 주님을 믿는다고 자처하고 있는 우리들보다 사마리아인처럼 이방인들이 우리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깨끗해지기 위해 제사장에게 자신을 보이러 가려는 열심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 신앙의 모습이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버린 아홉명의 모습은 신앙을 통해 바라는 바를 이루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사마리아인은 이 모든 일이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씻어서도, 제사장에게 가는 걸음 때문도 아닌, 오직 예수님을 통해 일어났다는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그의 놀라움과 기쁨의 전부입니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17:19

     

    사마리아인은 나병에 걸려 모두에게 버려진 자신을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셨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통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용납되어졌다는 것이야 말로, ‘구원’입니다. 제사장이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여졌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가늠이 되시나요?

    만약 사마리아인처럼 자신의 생명과 삶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실감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다면, 우리도 주어진 일상에서 돌아와 하나님께 경배하며 살아갈 수 밖에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실재로는 그렇지 못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어쩌면 본문에서 열명 중에 단 한명만 돌아왔던 것처럼, 열번이면 한번이나 주님앞에 설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다가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 용납받았다는 사실에 넘치는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요한복음 3:16’말씀을 암송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던 우리 마음이, 언제부터 신앙 매너리즘에 무감각해지기 시작했을까요?

    언제부터인가 모든 것이 마땅하고 당연하다 여겨지니, 감격은 사라지고 아쉽고 답답하고 억울하고 원망할 것만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해지지 않은 탓입니다.

     

    ‘절실함’은 그저 마음 먹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야 말로 우리에게 ‘절실’한 분임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주님안에 담겨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모르니 무관심해 질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그러나 밭에 감추어진 보화처럼 그 가치를 알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주님이 아니면 않됩니다. 절실하고 갈급해 지는 겁니다. 

    성경은 이처럼 세속의 가치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되시는 주님을 발견하는 것을 ‘분별’이라고 정의합니다. 분별하지 못하면 누구라도 거짓된 것에 이끌려 생명을 소비하며 살아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서신서인 디모데후서는 목회 후배에게 주는 사도의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교회안에 일어나는 이단 논쟁에서 승리하는 유일하고 최선인 길에 대해 그는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그렇습니다. 최선의 길은 우리가 진리되시는 주님께 '힘을 다해!’ 든든하게 이어져가는 것 뿐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육화될 때만 자연스럽게 논쟁도, 갈등도, 시험도 그리고 우리 일상의 매너리즘과 무질서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05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열명의 나병환자들에게 차별이나 소외됨 없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모든 이들을 구원해 주시는 일, 그것만이 주님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치유하고, 회복시켜주고, 구원하시고, 주고 또 주고, 더 많이 주는 것이 주님의 기쁨입니다. 주님은 이미 당신이 이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요한복음 10:10

     

    사마리아 사람이 주님 앞에 돌아왔을 때, 주님은 질병에서 고쳐주신 이후에 그에게 ‘구원’도 덤으로 주십니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요한복음 17:19b 

     

    무언가를 해내어 영광을 돌리는 제자가 되어보겠다고 ‘믿음’을 달라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시던 주님께서, 오늘 한 이방인에게는 ‘네 믿음이 살렸다’고 탄복하셨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주님을 알아 보았다는 것 뿐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가 주님안에만 생명이 있다는 것, 주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사실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했던 사람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주님 곁에 있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던 이들과 이 이름 모를 이방인 중에 누구를 닮아 있을까요? 

    지금 우리에게는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심령을 깨우고, 가장 귀하신 그리스도께 절실한 삶으로 인도하실 ’성령’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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