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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12/11 대림 세번째 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12. 8. 09:11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이사야 35:1-10

          응송 | 시편 146:5-10

        2독서 | 야고보서 5:7-10

        3독서 | 마태복음 11:2-11

     

    설교음원

    http://naver.me/x3iqlAkk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zqIitZu0irg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귀스타브 도레, Paul Gustave Doré, 죽은자에 대한 리스바인의 친절, 1866

    '실족'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01

    대림 3번째 주일 1독서 이사야서의 배경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들을 향하여 외치는 선지자의 도전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미 포로 1세대들중에 많은 이가 죽었고, 2, 3세대들은 바벨론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삶의 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이곳이야 말로 자신들의 세상입니다. 이곳을 떠난다거나 이탈한다는 것은 오히려 위험합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안정감을 누리고 있는 이곳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지금 여러분이 가진 것들을 다 버리고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생면 부지의 땅으로 떠나자고 하는 것 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이스라엘 민족은 선지자의 외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놀랍기만 합니다. 선지자의 외침안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던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그런 결정들을 했던 걸까요? 말씀을 선포하면서 이사야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한 가지만을 독려하고 요구했습니다.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인지, 누가 누구를 보고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포로로 끌려온 신세라고는 하지만, 바벨론 제국은 유대인들의 사유재산이나 출세길도 어느 정도 보장했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로라는 신분만 빼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소리치는 이사야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삶을 곤두박질칠 수 있는 위험한 선택으로 내몰 수 있는 일은 애당초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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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사람들은 돈이 많고, 성공하고, 유명한 이들을 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또 당사자들도 그런 것들을 자신들의 행복으로 자랑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이란 그런 식으로 경험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돈이나, 명예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은, 뒤집어 말하면 돈이나 명예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어 불행하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행복하다 말하는 그 순간 조차도 ‘그것 없으면 않된다’는 두려움과 '그것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하는 염려에 묶여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행복’은 ‘자유’로부터 누리게 되는 것인데, 그러나 이건 가짜 행복인 셈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이들의 형편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니 선지자의 눈에 그들의 모습은 두려움에 잔뜩 움츠려 있는 비굴한 형편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민족의 땅에 길들여진 탓에, 이런 삶에서 벗어나면 살 수 없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온통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선지자의 부름에 응답할 수가 없던 겁니다. 말씀에 응답하지 못하는 믿음 없음이란 이처럼 ‘두려움’에서부터 비롯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다보니 바벨론 제국의 성패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기며 살수 밖에 없었고, 어느새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까지 뒤흔들리고 말았던 그들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삶과 목숨을 바벨론에 맡겨야만 하는 신세로 떨어진 것이 하나님 신앙을 잃어버린 탓이라는 것을, 여전히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 조차 믿지 못하는 형편까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두려움’이나 ‘염려’에 사로잡히는 것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탐욕’의 근원도 두려움에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까요? 유독 성서에는 ‘두려움’에 관한 말씀이 많을 만큼, ‘두려움의 문제’를 근원적인 사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은 예언자가 들은 것도 아닙니다. 이미 민족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을 찾아가셨을 때 하나님께서 하셨던 첫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밖에도 성경 곳곳에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담겨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고는 했지만, 선지자에게는 바벨론을 떠나 이스라엘로 돌아가 맞이하게 될 내일을 보증해 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전하는 말씀을 따르는 일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복해주시는 날’이 오고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의 말이 참이라면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사야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와 달리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 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보복’이 현실의 두려움으로부터 구원해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통찰력을 가지고 상황과 여건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고는 해도, 선지자들의 시선이 늘 대중들에게 환영받지는 못했던 이유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선지자들을 외면하고, 조롱하고, 박해까지 했습니다. 선지자들이 전한 말을 듣지 않고 실패하고 실수하는 일을 반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속에서 결국은 선지자들이 전했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선택을 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스라엘을 손가락질했었는데,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은 오히려 다른 어떤 민족보다 영적인 통찰력이 있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사용하신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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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

    본래 ‘보복’이라는 말의 뜻은 ‘억울하게 당한 해를 그대로 돌려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예언자가 약속하고 있는 ‘하나님의 보복’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수치와 억울함을 풀어주는 수준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지금의 현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훨씬 근원적인 문제들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외침안에는 사람들이 무관심해 하는 것들의 변화와 그런 변화를 향한 간절함 바람과 절규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겁니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바로 5~9절까지 그가 전했던 말씀안에서 묘사되고 있던 ‘하나님 보복’의 환상입니다. 맹인, 귀 먹은 자, 저는 자, 말 못하는 이들이 보고, 듣고, 걷고, 말하게 되는 겁니다. 잘 먹고 잘 살고, 부자되고 성공하는 것을 생각하셨던 분이라면 조금은 실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 언급된 이들은 모두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 내몰려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그래서 두려움을 운명처럼 여기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치열했던 열강의 세력다툼의 틈 바구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이스라엘 자신들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잘남이나 못남이나 다를 바 없이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의 해결이 아닌, 온전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더 이상 악한 힘에 의해 짓눌리림 없이 누구라도 염려나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열리는 날이, 바로 그날입니다. 모든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세상, 모두가 행복한 세상입니다. (10절)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그래서 이사야 35장을 매우 중요하게 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 가리키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 요한계시록 21:4

     

    그분께서 모든 생명을 죽음으로부터 살려내실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슬픔과 탄식을 영원한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03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역사속에서 크고 작은 시련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향한 본질적인 물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무능하시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든가 둘중의 하나라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처럼 비통하고 슬픔이 가득한 수난의 역사를 겪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할 도리가 없었던 겁니다. 오늘로 치면 ‘신정론’의 문제입니다. 자신들의 납득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원인을 찾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이나 약속에 대해서도 눈에 보이는 표징을 구하고 매달릴 수 밖에는 없었던 겁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도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십니까?당신이, 참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즉 ‘구원자’이시냐?’는 물음입니다. 증거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의 물음안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가 왜? 이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면 우리를 왜? 이런 고통속에 버려두시는 것인가?’라고 하는 신정론의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은 예수께 이런 물음을 던졌을까요? 그는 메시아의 징표를 예수께로부터 발견했던 겁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당신이 하고 계신 일로는 부족하니,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더 보여달라고 주님을 채근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의 물음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으로 답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사야 35장 ‘하나님의 보복의 날’, ‘메시아 대망’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답변 때문에 요한의 마음은 더 어려워졌을 겁니다. 분명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포로된 이들이 자유를 얻게 된다고 했으니,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지금 자신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 않됩니다. 이건 우리 모두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2천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아무것도 바뀐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뭔가 명쾌한 답변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6절

     

    하지만 주님의 답변은 오히려 뜬금 없어 보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오히려 주님의 날을 기대하는 우리 믿음이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사용된 ‘실족'이라는 원어 ‘스칸달리조’가 어떤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거나 믿음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실족하지 않는 자’ 일까요? 

    공동번역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 자’라고 해석했고, 루터는 ‘화를 내지 않는 자’라고 해석했다고 합니다. 어느 편이 되었든 말씀 자체는 누구든 주님께 의심을 품거나 화를 낼만한 것이 있다는 것이고, 실재로 예수님에 대해 실족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떨까요? 혹시 예수님의 말씀과 ‘곧 오시겠다’던 약속에 의심이 일어난 적은 없으십니까? 그분의 길을 뒤따르다 실망하신적은 없으신가요? 왜, 우리는 예수님께 실족하게 되는 걸까요? 우리의 무지와 오해가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 희망’이 그에게서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표징이 없다는 겁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오늘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말씀하셨던 대로 세상이 변화되고 바뀌었다면, 누구나 예수님을 믿었을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필요한데, 증거가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이 같이 계시지 않는 것 같아 섭섭하고, 초조하고, 억울해 집니다. 하지만 이런 연약함 자체가 잘 못된 것은 아닙니다. 누구라도 마음이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정상일 겁니다. 오히려 주님 말씀처럼, ‘시험’에 들고 ‘실족’하는 것이야 말로 문제입니다.

     

    #04

    우리가 주님을 메시아 (구원자)로 경험하지 못하고 실족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체, 그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그 나라가 우리 가운데 와있지만, 다시 오실 그 날까지는 ‘아직’ 완전해 도래하지 않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신학개념이 잘 와닿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말장난처럼 치부하거나, 그런다고 뭐가 달라졌느냐고 비판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런식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했다는 것을 변명하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인 오해입니다. 기독교신앙이 본질에 천착하고, 그리스도 사건이 근원적인 구원경험에 닿아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분은 없습니다. 연로하신 권사님이나, 갓 태어난 아이라 해도 우리는 모두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죽음’은 ‘아직’ 우리를 덮치지 않았지만, 또한 ‘이미’ 우리 모두에게 와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인정하든 않하든,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관계 없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날’에는 이 사실을 분명히 보고 알게 될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 나라도 주님을 통해 ‘이미’ 임하여 있습니다. ‘이미’ 그 놀라운 구원의 비밀이 우리 삶에 찾아와 있습니다. 다만, ‘아직'도 비밀인 체 있을 뿐입니다.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은폐되어 있기에, 누구나 다 알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나 뒤짚어 생각해보면,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이 비밀은 폭로되고 열려져있고, 이미 드러나 있는 비밀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궁극적인 정의와 평화, 곧 영원한 생명이 이미 비밀한 방식으로 시작되었음을 믿는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정한 평화가 완성될 순간까지 치열한 기다림위에 우리는 서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대림절의 신앙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고, 성공하고, 부자되고, 복 받는다는 믿음이라면, 반드시 실족하게 될 겁니다. 그런 방식은 유대인들의 메시아니즘이고, 세속의 성공신화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아는 그런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05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직면해야하는 마지막 물음은, ‘왜, 예수가 하나님의 보복이라는 것인가?’, ‘참으로 예수가 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들일 겁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이사야 35장의 성취이며, 그리고 예언의 성취와 내용은 슬픔과 탄식이 없어지는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인류는 지금껏, 그리고 오늘도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런 일을 이루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맹인, 말 못하는 자, 다리 저는 자들이 회복된다고 해도, 슬픔과 탄식이 완전히 해결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인 슬픔과 고통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용케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아도, 다시금 그런 일에 휩쌓이게 될 겁니다. 설령 세상 모든 곳에서 아픈 사람들이 다 낫는다거나 그런 기적이 생긴다고 해도, 여전히 세상의 평화는 요원할 겁니다.

    예수님은 슬픔과 탄식을 사라지게 하는 하나님의 보복의 근거를 그런 것에서 찾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오셨다’는 사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에 자신의 운명과 영혼을 맡기셨고, 당신의 뒤를 따르는 우리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전향, 즉 ’회개’입니다. 이 기준에 의하면 눈이 보이지 않고, 말을 못하고 다리를 절어도 괜찮습니다. 잘 생기지 않아도, 능력이 없어도, 세리나 죄인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과 관계 없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모든 슬픔과 탄식으로부터 벗어나는 당신의 나라로 우리 모두를 받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주님과 함께 찾아온 ‘하나님의 나라’에 내 운명과 삶, 모두를 맡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 날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큰 교회, 목사로서의 명성이나 인지도, 부유함에 대한 관심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니 비교에 내몰리지 않아도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나 가족에게 찾아온 질병, 이전이었다면 무너지고도 남았을 법한 불행해 보이는 일들이 짓누르는 힘에서도 비교적 평안해 졌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괜찮습니다.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키실 것 뿐만 아니라, 사실 그 어떤 상황도 주님의 나라안에서는 파괴하고 상하게 하는 악이 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히려 사소하고 소소해 보이는 일들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기쁨과 즐거움이 삶을 채워줍니다. 죽음 앞에서도, 구원해 내실 주님으로 인해,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반갑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이들에게 '복'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과 다른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여러분에게 반대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삶의 무게에 지치고 곤해 있을 때, 기대했던 바와 다르고 세상이 자랑하는 것과 다른 길을 가르쳐주시는 예수님 때문에 자꾸만 실족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아가 아닌, 로마의 황제나 성공한 세상의 어떤 이들처럼 믿고 있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으로 믿는 길에서 우리는 더 아파야 합니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지, 어떻게 세상의 평화가 되실 수 있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당신으로 인해 서러웁고, 매일이 실족할 것만 같아도 꾸역 꾸역 당신을 생명으로 삼으며 걸어가는 이들에게, '하늘의 복'이 있습니다. 

    '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 야고보 5:8 아멘.


    '주님이 오고 계신다'는 것을 '복'으로 삼는 이들은 어떤 상황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실족케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런 이들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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