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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5 성탄 대축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12. 22. 15:14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이사야 52:7-10
응송 | 시편 98
2독서 | 히브리서 1:1-4 (5-12).
3독서 | 요한복음 1:1-14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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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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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빛', 그리고 '영광'
# 01
성탄의 이 아침, 성경은 죄와 죽음에 사로잡힌 인류를 절망으로부터 건져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믿음이 없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신(神)은 없는 것과 같다’며, 오늘 이 아침에도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 거리게 됩니다. 어제까지의 모습이나 성탄을 맞이하는 오늘이나 별반 달라져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비어있던 구유안에 갓 태어난 아기 예수가 누워있다는 것 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는 ‘성육신’의 길을 걸어 오실 수 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고, 그분의 말씀을 귀로 듣게 되었으며, 부르심과 초대에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성탄의 아침인 오늘은 ‘성탄절’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듣기 위해서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요한은 특별히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함으로 주님을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빛’ 그리고, ‘말씀’입니다.
# 02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 1절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의 첫머리인 1장 1절에서 ‘말씀’이라는 단어를 벌써 세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합니다. 이것은 한국어, 영어, 일어 같은 언어 같은 것이 아닙니다. 고대인들은 세상이 돌아가도록 이끌고, 유지하고, 존재하게 하는 어떤 원리와 힘이 있다고 생각했는데(3), 그것이 바로 ‘지혜’ 또는 ‘말씀’이라고 해석된 ‘로고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으로 포착해 내거나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로고스’가 없다면 ‘세상’ 뿐만 아니라 ‘생명’도 존재할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근거가 되는 ‘로고스’가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왔습니다. 요한은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단언합니다.
우리야 ‘예수는 말씀이시다’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 유대 사람들에게는 ‘신성모독’이라는 심각한 논쟁거리 일 수 밖에는 없었을 겁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도 없지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도 교회 밖에서 우리를 향해 던지는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라고 하는 동일한 물음과 도전 앞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물음은 단순히 믿음이 없다고 치부할 수 없을 만큼,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합리적이고 타당한 의심입니다. 오히려 ‘신앙’은 이런 물음에 답을 찾아가는 ‘길’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이런식의 선언은 ‘요한’보다 훨씬 이전의 선지자에 의해서도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1독서 본문으로 읽은 ‘이사야’ 52장안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서일과는 7절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앞단락인 3절에서 5절까지를 읽어보면 무려 4번이나 ‘말씀’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선지자의 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도 나누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바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말씀’하심으로 이스라엘 안에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 이사야 55:11
그분의 말씀은 헛되지 않고, 땅에 떨어지는 순간 반드시 역사를 이루어내시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함께 나누었던 것처럼, 말씀의 능력이 반드시 이루어내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행위’인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말씀은 능력이시니,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는 한 반드시 ‘구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하신 능력을 드러내시니,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 이사야 52:10
그래서 선지자는 말씀이 드러나는 순간, 땅끝에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겁니다.
# 03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요한의 말이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마 제가 BTS와 사사로이 전화통화하는 사이라고 해도, 믿기 어려우실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아득한 일일까 싶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은 그만큼 아득하고 현실적이지 않은 일입니다. 분명 요한이나, 이사야가 사기꾼이 아니라면 이 말은 사실일 텐데, 왜 이처럼 믿기 어려운 걸까요?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 11
요한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로 이처럼 ‘불신’에 사로잡히게 되는 우리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암울한 현실속에서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정작 그토록 기다리던 분이 오셨는데도 맞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를 ‘알아보지 못한 탓’이라고 설명합니다.(10) 그렇다면 지금까지 누군지도 모른 채 막연하게 기다리고만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어둠안으로 ‘빛’이 찾아왔고, 들리지 않는 세상에 ‘말씀’이 찾아왔는데도 어쩌다가 알아챌 수 없는 신세로 떨어져버린 것인지 답답하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오셨음에도 외면하고 맞아들이지 않고 불신하던 우리를 여전히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시는 주님앞에 서기가 서럽기만 합니다.
요한은 ‘말씀’이 가져다 주는 ‘생명’이 ‘빛’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한 줌의 ‘빛’이라도 남아있는 한, 어둠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죽음’을 몰아내는 ‘빛’이라고 했던 겁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바로 그 ‘참 빛’ 즉 ‘참된 생명’이시라고 단언합니다. 그런데 ‘빛’이면 그냥 ‘빛’이지 굳이 ‘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분명 ‘참 빛’ 행세를 하고 있는 ‘거짓된 빛’도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기 땅에 찾아오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거짓된 빛’에 시선을 빼앗겨 온 탓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이런 ‘거짓된 빛’에 줄곧 잘 속아왔습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 때로는 눈에 보이는 부유함과 성공 신화가 ‘생명’인 것처럼 쫓는 것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난 자 중에 이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 하셨던 ‘세례자 요한’도 ‘빛’은 아니었다(8절)는 말씀이 눈에 크게 들어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나은 편입니다. 그 동안 길들여온 시간이 있으니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거짓된 빛’을 끄면 자연스레 ‘참 빛’이 눈에 들어오게 될 겁니다.
이보다는 자신이 어둠 속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빛’을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이 어둠에 휩쌓여 있음을 알지 못한 채, 마치 ‘빛’안에 있는 것처럼 만족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 빛’은 거추장스럽고, 쓸모 없어 보일 뿐입니다. 이처럼 참빛 되시는 주님 없이 살아가는데 익숙해졌으니, 우리가 스스로 ‘거짓된 빛’을 꺼트리고 반대로 주님을 생명의 말씀과 빛으로 보고, 믿는다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 04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구나’ | 52:7
이사야 선지자는 산을 넘어 ‘하나님의 통치, 말씀이 이루시는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오는 이들이 ‘복’되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된 이유는 한가지 뿐입니다. 다른 이들이 볼 수도 없고, 듣지도 못하는 ‘말씀’이신 하나님, 하나님이신 ‘말씀’을 그들은 먼저 보았고, 들었고,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보았고, 또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걸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 요한복음 11:40
이미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으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던 ‘마르다’에게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사람의 일입니다. 이 절망 끝에서, 그리고 여기서부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일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목격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신뢰이고,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뢰였고, 주님은 이 순전한 한 마음을 자신의 생의 길로 삼으셨습니다. 그런 주님께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 즉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을 보이셨고, 예수님은 고스란히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던 겁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 요한복음 1:12
예수님께서 자신의 온 삶에 하나님을 맞아들이셨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 주님을 맞아들이고 주님의 삶에 우리의 인생을 거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십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실 수 있느냐?’는 물음에 갇혀있던 우리가, 이제 비로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찾게 된 겁니다.
# 05
‘성탄절’을 뜻하는 다른 말은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issa)의 합성어입니다. 말 그대로, 참빛이며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미사’를 드리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미사’를 드린다는 말은, 경배와 예배를 드린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절은 기념일을 지킨다거나, 우리끼리 즐거워하는 날이 아닙니다. 선물을 주고받고, 연인들의 특별한 데이트 날도 아니고, 교회의 행사날이 되어서는 더더욱 곤란합니다. 여인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찾아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날이 그날 입니다. 그로 인해 비로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되었으니, 삶 전체와 인류의 역사를 아울러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란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가 12월 25일 오늘에만 국한될 수 없듯, 매일, 매주의 예배가 ‘성육신'의 신비,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자기를 비우고 스스로를 제한하셔서 인간이 되신 사건,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신비와 은총안으로 들어가는 성탄절의 예배가 되어야만 합니다. 동녘교회 예배 가운데 별도의 성탄절 행사를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 성탄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고, 자기 백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는 영원히 계시며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죽음의 권세와 폭력 앞에서도, 그리고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에도 그분은 변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산을 넘어 이 메시지를 땅끝에 있는 이웃들에게 전하는 복된 걸음이 되십시오. 세상을 깨우는 ‘말씀’이 되시고,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인 삶입니다. 아멘.
‘주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그것들은 다 옷처럼 낡을 것이요,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두루마기처럼 말아 치우실 것이며, 그것들이 다 옷처럼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같으시고, 주님의 세월은 끝남이 없을 것입니다’ | 히브리서 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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