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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9 사순절 넷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3. 3. 14. 18:46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상 16:1-13
응송 | 시편 23
2독서 | 에베소서 5:8-14
3독서 | 요한복음 9:1-41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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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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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의 눈을 고치신 예수,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프랑스 1594~1665년 '참 빛' 을 만난 '그 사람'
1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 여기고, 그 생각을 바꾸려들지 않는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늘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고 싶어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곧장 타인이나 세상을 향하지요. 한번 그렇다고 생각해 버리면, 그것과 반하는 증거나 조언은 모두 부당한 음해 정도로 치부해 버립니다.
이건 어떤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나 삶을 대할 때 뿐만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서도 자기 생각과 의견을 중시하고 그것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나는 잘 보고 있다는 착각 탓입니다. 그 착각 뒤에 숨어 다른 이들의 말이나 가르침은 들으려 하지 않는 지독한 ‘자기애’라고 하는 성을 쌓아갑니다. 그저 제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고, 듣고 싶어하는 소리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고 합니다. 아무리 희망적인 메시지를 들어도 여전히 염려나 근심에 쌓여 있는 것도, 당장 눈앞에 찾아온 내일도 장담할 수 없으면서 ‘살만하다’는 생각을 강화시키며 우쭐거리면서 살아가는 태도 역시 여기에서 비롯하는 겁니다.
세상은 오히려 ‘주체성’과 ‘정체성’이라는 말로 이렇게 왜곡된 자신의 주관을 더욱 확고하게 만드는 법만을 가르칩니다. ‘자아’의 영역을 강화하는 것이 발전하는 사회의 ‘덕목’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들이 틀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애당초 우리는 눈 먼 소경처럼 보지 못하는 존재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니 늘 ‘너희는 들으라’고 합니다.
2
불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실재로 '죽고 못할 것만 같아 목숨이라도 걸겠다고 했던 일들이 결국은 그렇지 않더라’는 우리의 경험과 기억이 ‘그 말씀은 틀렸다’고 말하려는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늘 ‘이렇게 했었으면’이라는 후회가 남고, 그래서 아쉽고, 결국은 늘 섭섭하고 서러웠던 열매없는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은 둘째치고, 정말 우리의 눈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왜곡되고 뒤틀려 있는걸까요?
오늘 1독서 사무엘기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세웠던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실패를 대신할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시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 사울의 눈을 피해 목숨을 걸고 이새의 집으로 향합니다. 아직은 ‘사울’이 왕이므로, 자칫 이 걸음은 그를 폐위시키려는 반역의 길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이새의 장남 ‘엘리압'과 둘째 ‘삼마’를 시작으로 나머지 다섯까지 일곱 아들을 모두 만나보았습니다. 하나같이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역시 달라도 뭔가 다르구나 싶을 만큼 왕의 재목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이 사람이다’ 싶어 기름을 부으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은 중요한 것은 사람의 ‘중심’ 즉 ‘마음’에 있다는 말씀으로 그의 손을 멈추어세웠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선지자인 너 마져도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에 현혹되고 마는 것이냐?고 책망하시는 것 같습니다.
‘신데렐라’이야기의 결말처럼, 이 이야기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에 의해 ‘다윗’에게 기름이 부어졌다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은 현실감이 없습니다. 엉터리 같이 흘러가는 세상살이 뿐만 아니라, 과연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선택하시는가?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작은 공동체로부터 교회, 나라 전체에 이르기까지 세워지는 사람들의 면면은 실망스럽기만 합니다. 여전히 내면의 중심이나 됨됨이가 아니라 그럴듯하게 겉모습을 치장하고 세속적 힘을 휘두르며 으스대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인정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한결같이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말씀은 옳습니까?
이스라엘의 어른이며 지도자였던 선지자 ‘사무엘'같은 사람도, 겉모습에 휘둘려 사람의 됨됨이를 꿰뚫어 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사람의 중심’ 뿐만 아니라, 핵심을 볼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오직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것을 알고 계시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고, 그의 말씀을 들어야만 하는 겁니다.
3
복음서 말씀에는 나면서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눈먼 사람을 만나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 요한복음 9:2b
물론 당시에는 질병이나 장애가 있으면 ‘죄’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긴 했지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죄’의 문제로 재단하려 드는 제자들의 말본새가 영 불편하기만 합니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34절)며 장애인을 ‘죄인’으로 비하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의 사고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식의 일그러진 생각은 그때만 아니라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난이나 재난에 떨어진 사람들을 불행하다 여기고, 소위 성공하고 형통하게 사는 사람들을 복 받았다고 부러워하는 마음도 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당사자들이 처해있는 상황이나 형편과 관계 없이, 늘 옆에서 바라보았던 제 시선대로 판단하고 단정짓고 정죄하려 듭니다. 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야 말로 옳고 틀림이 없다는 삐뚫어진 오만함이며, 그 오만함은 ‘나’는 그들과 다르며, 그러니 그런 형편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스스로의 만족을 얻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한 겁니다. 주님은 얄팍하고 사특한 생각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기 위해서’라는 답변을 던지신 후, 볼 수 없던 장애인의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색다른 것은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든가 ‘네 자리를 들고 가라’고 말씀하심으로 고쳐주시던 다른 때와는 달리, 오늘은 침을 뱉어 흙을 개어 눈에 발라주시는 특별한 행동?을 하시고 그 뒤에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안식일에 행하셨던(14절) 바로 그 일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눈을 고쳐주기 위해 하셨던 행동이 ‘일’이라고 생각한 탓입니다. 눈 못보던 이의 어둠을 걷어내어주는 그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바라시며 오늘도 하고 계신 거룩한 일임을 사람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여튼 안식일을 어겼다는 이유 때문에, 한편에서는 ‘죄인’이라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틀림 없다고 시비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그저 ‘주님’을 향한 스캔들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눈 먼 사람이 눈을 뜨게 되었다는 ‘회복’과 ‘생명’사건에는 관심 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연히 마주친 것인지, 부러 다시 찾으신 것인지를 모르겠지만 다시 만나게 된 그에게 주님은 뜬금없이 ‘인자를 믿느냐’는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성경에는 그 옆에 1)이라는 각주가 붙어있고, ‘어떤 사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씌여있을 겁니다. 복음서가 읽혀지던 초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인자’라는 말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와 구분됨없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행사하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의미가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설명을 불편해 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을 수 있느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 불만이야 말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십자가에 잡아 죽였던 이유였습니다. 여전히 제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우리는 너무 많이 닮아 있습니다. 주님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4
나면서 부터 볼 수 없던 그이는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 ‘수가성' 우물가에서 주님과 여인과의 대화에 언급되었던 ‘물’이 단순히 ‘마시는 물’이 아니었던 것처럼, 본문에서 말하는 ‘보게 되었다’는 의미는 단순히 시력을 회복했다는 차원 이상의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우리는 무언가 지금껏 모르던 것을 알게 될 때,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거나 ‘보게 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이 그가 단순히 보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과 핵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지금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보게 되었고, 그 분이 여기에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임하였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은 듣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어주시는 줄을, 우리는 압니다.’ | 요한복음 9:31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여전히 우리는 시력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려 든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그런 방식으로 가르치시거나 설명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볼 수 없고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저 보지 못하면서도 보는 척하게 되면 자꾸만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분주해집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더 멀어지고 아득해질 뿐, 결코 볼 수 없게 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스스로를 경건하고 거룩하다 믿었던 자신들이 아니라, 이런 볼품없는 자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이 초조해졌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방식만을 절대시하려는 유혹에 떨어지게 됩니다. 결국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쫓아내겠다’던 그들의 결의가 그들이 스스로를 절대화시키려던 선택인 겁니다.
‘회당’에서 내쳐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유대 사회에서 퇴출되는 것입니다. 살아있으나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미 명예 살인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식의 협박과 위협 앞에서는 누구라도 비굴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죽하면 눈 뜬이의 부모들도 서슬퍼런 추궁에 발을 빼고 모든 책임을 자식에서 떠넘겼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 33
하지만, 정작 눈 뜬 그 사람은 너무나 당당합니다. 그의 마음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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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단한 결기와 용기를 보여주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처신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그가 특별히 믿음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에 눈을 떴다는 것에서 비롯했을 뿐입니다.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살아있으나 죽은 것처럼 암울하고 우울하게 살던 그가, 부모에게 조차 버림을 받았던 그가 예수를 보게 된 이후에는, 눈치 보지 않는 삶, 좌고우면하지 않고, 옳음을 따르며 늠름하게 걸어갈 수 있는 ‘자유’를 얻은 셈입니다. 진리를 경험한 사람들의 삶은 이렇게 변화됩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자유를 얻었을까요? 그리고 왜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보지 못하는 걸까요? 예수의 곁에 폼잡고 서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예수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는 그렇게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그렇게 믿음의 걸음에 참여하려고 애를 쓰는데도 눈 뜬 그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는 경험이 없을까요? 왜 여전히 예수를 오해하는 걸까요?
2독서인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안에서 바울 사도는 부끄러운 ‘열매 없는 어둠의 일’을 언급합니다.(11절) 지금 교회 안에 그런 어둠의 일에 떨어진 이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교회의 이런 부끄러운 열매 없는 이야기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열매맺는 삶을 이루려고 애쓰지 않거나, 성실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 에베소서 5:8
사도는 애당초 우리가 이런 어둠에 떨어져있는 존재들이었다고 말합니다.(8a)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빛의 자녀답게 살자’고 결론을 내려고 합니다. 순서가 잘못되었습니다. ‘주님의 빛’이 있기에, 우리가 ‘빛의 자녀’답게 살 수 있게 된 겁니다. 이 말씀을 깊이 들으십시오. 영원히 꺼지지 않으며, 모든 어둠을 들추어내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잠자는 이들을 일깨우는 ‘참된 빛’이 우리를 찾아왔으니, 이제 우리는 ‘빛의 자녀’로 살게 되었습니다.
6
‘빛’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근거로 읽어보면 비로서 성서일과 독서들이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사울 왕의 실각에 실망했지만 아직은 왕으로 권세를 누리던 그가 두려워 잔뜩 어두졌던 사무엘의 마음과 눈은 ‘중심’을 보라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밝아졌습니다. 응송 말씀인 시편 23편은 그 유명한 ‘다윗의 노래’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녀야만 했던(4) 그 때에도 주님께서 늘 새로운 힘을 주심(3)으로 두렵지 않았다고 새힘 주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 복음서 말씀에서 눈이 멀었던 그 사람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났던 여인이 그러했듯이, 예수님을 보던 눈이 점점 밝아지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 ‘예수라는 사람’이라더니 17절에서는 ‘그분은 예언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38절 다시 만난 예수님 앞에서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침내 주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메시아 경험을 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자신들의 생각과 기준, ‘자아’를 지켜내려고 붙들었던 탓에, 바리새파 사람들의 눈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면에서는 그들의 울타리, 그들이 세운 공동체에서 눈 뜨게 된 그가 쫓겨난 것은 오히려 감사해야할 일입니다. 그 덕분에 그는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박해를 받고 슬피우는 자가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열매 없는 부끄러운 어둠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참 빛’을 만나고 눈을 뜬 이도 있었지만, 오히려 ‘참 빛’ 때문에 눈이 어두워진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 마땅이 있어야 할 마음의 중심에서 어긋나 있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징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은 권위와 지혜를 진리를 얻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여전히 삶이 불완전하고 엉터리처럼 보이고,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겉모습이나 ‘이 만큼은 이루어야 한다’는 큰 키를 가지고 우리의 시선을 빼앗으려 들겁니다. 그런 시대 정신이나 세상의 유혹에 과감하게 맞서고 저항하십시오. 오직 죄와 죽음을 극복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참된 빛’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마음에 중심에 두고 살아가십시오. 비록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믿으며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선한 싸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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