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23/03/12 사순절 셋째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3. 9. 21:34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출애굽기 17:1-7

      응송 | 시편 95

    2독서 | 로마서 5:1-11

    3독서 | 요한복음 4:5-42

     

    설교음원

    http://naver.me/51nIv9jN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HSIeE_t8Wbk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 1655년경ㅣ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당신은, 목마르십니까?

    1

    성경안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스라엘은 도무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고 볼만한 건덕지가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믿음 없는 사람들이 또 없고, 신앙없이 보아도 그들은 늘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끝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죽이는데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형편없는 사람들이라서도 아니고, 그들의 성품이나 자질이 못 나서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신앙은 오늘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간다거나 기독교인이 될 것인지 아닌지와 같은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야웨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이러니 저러니하고 아무리 큰 소리치는 사람이라도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무너지는 법입니다. 게다가 자식들이나 가족의 생존이 걸리게 된다면 이건 너무나 치명적입니다. 제 아무리 세련되어 보이고 믿음 좋아보이는 사람이라도 별 수가 없습니다. 

    오늘 1독서 구약본문인 출애굽기 17장은 출애굽 이후 ‘르비딤’에 도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했던 이런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중의 분위기가 험악합니다. 지도자 모세를 향한 백성들의 원망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백만이 넘는 무리가 마셔야 할 물이 다 떨어진 탓입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다는 것은 곧장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들이 두려움에 휩쌓이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생존에 필요한 물을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이런 상황에서 여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요행히 마실 물을 찾는다고 해도 수백만이나 되는 군중들의 갈증을 단박에 해소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보다 이들을 두려움과 원망으로 빠트린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풍족하게 물을 마실 수 있었다는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비옥하고 물 많은 고센땅에서 나일강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았던 그 기억이 오늘의 갈증, 지금 처한 이런 상황을 더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현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일 뿐입니다.

     

    2

    결국 하나님께서 바위를 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다는 다행스러운 결말에 이르기는 했지만, 사실 이들이 물 부족사건을 ‘르비딤’에서 처음 경험했던 것은 아닙니다. ‘물 없음’은 자유를 찾아나섰던 그들이 이미 출애굽 이후 홍해를 건너자 마자 직면해야만 했던 현실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후 꼬박 사흘길이나 걸었지만 그들은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출애굽기 15:22) ‘마라’라는 곳에 도착해 우여곡절 끝에 물을 얻기는 했지만, 어느새 르비딤에 가까이 이르던 진중에 또다시 물이 떨어졌던 겁니다. 광야에서 제뜻 대로 샘물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덜컥 두려움이 엄습해왔을 겁니다. 생존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과 불안에 휩쌓여 있던 그 때, 누구라도 툭하고 불평 한마디만 하면 두려움은 군중속에 들불처럼 번질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상황은 우리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생명이 파괴되는 이런 때는 억만금을 가지고 있어도 물이 없으면 죽는 것처럼, 그 동안 무엇을 해왔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와 관계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삶을 자포자기하거나,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왜 나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게 될 뿐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삶은 바뀌지 않고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른지 암담합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주셨다고 하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건만 뇌리에 남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께 인정받아 자신의 삶에도 반석에서 샘물이 넘쳐나는 것처럼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경험해야겠다는 간절함과 열심으로 치달으려는 조급함이 또 다시 고개를 들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바위가 터져 물이 나왔다거나, 그런식의 기적이 있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존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속절없이 흔들리는 존재일 뿐이지만, 물이 없어 죽을 수 밖에 없던 광야, 바위가 터지는 기적이 없어도 그곳에서 우리를 살려내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이야말로 성서기자가 전하려고하는 본문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나왔지만, 광야란 결국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곳이라고 원망하게 되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고 있습니다. 마치 애당초 왜 애굽을 탈출했었는지를 망각한 채,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이스라엘과 같이, 우리의 신앙이 세상의 방식으로는 생명의 결핍을 벗어날 수 없다는 ‘죽음’ 뿐이라는 ‘절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애굽과 같은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만을 믿으며 광야에서 생존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뿐입니다.

     

    3

    성서기자는 7절에서 물 부족 때문에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을, 하나님을 시험하고 대든 것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에서 주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또 거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도 한다. | 출애굽기 17:7

     

    이런 본문을 교회의 목사나 리더쉽에게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같다고 윽박지르거나 권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성경이 그런 가르침을 주는 책도 아닐 뿐더러, 그런식으로 성경을 도구화해서도 않됩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가만히 보면 뭔가 어색한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보통은 이런 형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셨다’라고 투덜거리곤 하는데, 본문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신뢰하지 못하니 기다릴 수 없었고, 기다릴 수 없으니 원망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결코 그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게될테지만, 분명한 것은 물이 떨어진 광야에 던져지게 된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될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순간에 이르게 되면, 우리 본성은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하나님 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믿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끊임없이 불신합니다. 잘 못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일은 엉망이 될 것이라는 불안, 그르치고 말 것이라는 오직 내 생각과 판단만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자아는 강하고 단단합니다. 오죽하면 천둥같은 하나님 말씀도 듣지 않고, 들리지 않을까요.

    우리는 또다시 예수를 배신했던 베드로처럼, 왜 물을 안주시는지, 왜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시고, 왜 나만 이렇게 살도록 버려 두시는지 불평하며 주님을 시험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나는 살아야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탓입니다. 돈이 있어야 하고, 명예가 있어야 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물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는 생각, 여기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조급함과 강요에 떨어질 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도 멀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문제를 들고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배를 찾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는 목마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자신만 나뒹굴뿐입니다. ‘불안하다!’, ‘죽을 것 같다!’는 제 자신의 울부짖음 때문에 하나님 말씀은 점점, 그리고 더욱 들리지 않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했기에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우리의 수고는 죽는 날까지 계속 반복될 겁니다. 제가 너무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는 걸까요?

     

    4

    어쩌면 제 설교에 ‘당장에 물이 떨어져 죽게 생겼는데도 당신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걱정없이 맘 편히 있을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은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핀잔을 주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타박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란 없다던 시인의 말처럼, 우리들의 영혼은 언제나 그리고 늘 속절없이 흔들릴 뿐입니다. 

    하지만, 그러므로 오히려 더욱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거나 단념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반대로 잘 믿겠다는 마음 가짐이나 결단만으로도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전해주는 답도 해결책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내가 질문하고 내게 들린 답만이 광야를 살아낼 수 있게 하는 능력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시험하려드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근원적인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만 합니다. 애당초 왜 우리는 자꾸만 이런 상황에 불안해야만 하는 것인지, 마실 물을 내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의심없이 믿을 수 있을지,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도 물이 없어 곤란한 두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두 사람입니다. 물을 달라고 하시던 예수님과 물을 구하러 우물가로 나온 사마리아 ‘수가’라는 마을에 살던 여인입니다. 똑같이 우물을 찾았지만, 그러나 주님과 이 여인의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주님은 자신안에서 흘러넘치는 생명수로 척박한 삶에 내몰린 모든 이들의 갈증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이제 반해, 이 여인은 거칠고 퍽퍽한 인생으로 인해 살아갈 이유조차 잃어버린 형편입니다. 오늘까지의 삶도 서러웠지만 정작 내일이라고 더 나을 것 없어 보이는 똑같이 망한 날, 실패한 인생일 뿐입니다. 여름 가뭄에 갈라진 논두렁 처럼 그녀의 영혼은 메말라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답답함을 적실 해갈의 소식이 그녀를 찾아왔고, 넘치는 소망이 그녀의 삶을 채웠습니다. 여인이 새로운 결단을 하고 뭔가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와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변화됩니다. 삭개오도 그러했고, 귀신 들렸던 여인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주님안에는 그 누구의 삶이라도, 그 어떤 허무라도 채우고도 남을 생명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난 이후에 그녀가 변화되었다는 것은, 선생님(9), 유대사람, 예언자(19), 랍비(31), 그리스도(29)라고 하던 주님을 부르는 호칭의 변화를 통해서도 충분히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처음부터 주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생수를 맛볼 수 있던 것은 아닙니다. 

     

    5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 요한복음 4:10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당신이 야곱보다 더 뛰어날 수 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그녀의 투덜거림이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 요한복음 4:20

     

    그 동안 깨어진 삶 때문에 그녀가 하나님을 원망했던 날이 며칠이고, 제 인생을 구원해주시기를 갈망하며 얼마나 하나님을 찾았을까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는 서러운 눈물은 또 얼마나 흘렸을까요. 그런데 바로 지금,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갈증,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내면의 갈증을 고스란히 주님께 드러내던 그녀가 어느 순간 메시아 경험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목격하게 된 겁니다. 

    여전히 오늘 말씀 어디에도 그녀의 삶이 더 나아졌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삶의 조건들이 바뀌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문제들은 더 이상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좋고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이런 형편이어도 괜찮고 아니어도 괜찮은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목마름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했던 그 순간, 그 분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마주하게 된 그 순간,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쳐야만 했던 버거운 짐으로부터 해방할 경험할 수 있게 되었던 겁니다. 

     

    6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불신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이 없어서, 기도를 하지 않거나 제사를 드리지 않거나, 경건하게 살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애당초 ‘마실 물이 없다’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잘 믿고, 정직하고 의롭게 살고 싶지만,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문제는 스스로는 그것을 채울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제 삶을 살려낼 수가 없고, 스스로를 지키거나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풍성한 물이 주어지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런 형편에 떨어진 우리에게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 이사야 55:1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씀하셨던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사람의 영혼이 해갈될 수 있는데, 하나님은 값없이 나누어 주십니다. 여기에 조건은 오직 한가지 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물을 구하고 찾는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연 말씀만으로 목마름을 해결하고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물을 맛보고 그런 경험이 더 깊어지기 위해, 그날까지 정진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부활’의 생명이 되신 주님을 본받는 겁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을 향한 목마름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삶은 신앙의 힘,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제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불신앙의 늪에 점점 더 깊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자기연민에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쪽 길로 가고 계십니까?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