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23/03/05 사순절 둘째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3. 2. 21:21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창세기 12:1-4a

      응송 | 시편 121

    2독서 | 로마서 4:1-5, 13-17

    3독서 | 요한복음 3:1-17

     

    # 설교음원

    http://naver.me/FhdSdSiE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PQOcrwyEFQk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John La Farge, visit of Nicodemus to Christ, 1880, oil on canvas

    '심판''구원'갈림길

     

    1

    사순절 둘째 고개에서 마주하게 되는 인물은 ‘아브람’입니다. 1독서 뿐만 아니라, 2독서인 서신서도 믿음의 조상 아브람을 언급하고 있고, 이어서 복음서는 ‘영생’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순절 여정을 떠나는 우리 앞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과 절망의 ‘십자가’만 서있는데, 자꾸만 탁월했던 그를 본받아 ‘영생’을 얻을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을 얻어야 한다고 채근하는 것 같습니다. 

    현대인들은 ‘영생’이나, 구원’, ‘믿음’ 같은 신앙의 언어들을 어리석은 망상 정도로 치부하고, 오히려 화려하고 분주한 세상에 몰두하고,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남을 것인지만 온통 신경을 씁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지향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처럼 ‘영생’의 문제에서 닿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대체 ‘영생’이란 뭘까요? ‘영생’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오래 오래 살아가는 ‘불로불사’()의 비급이 아닙니다. 신앙을 가져도, 예수를 잘 믿어도 결국 이 땅에서 우리는 ‘죽음’을 경험할 뿐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그런 현실 때문인지, ‘천국에서’ 오래 오래 살 것이라는 교리적 차원으로 스스로를 자위하지만, 분명한 것은 ‘죽음’의 불편함을 거부하거나 지나칠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덕분에 ‘영생’은 ‘이 다음에 언젠가’라고 하는 교리에 갇혀 단 한번도 살아내거나 실감해 본 적 없는 관념에 그칠 뿐입니다. ‘영생’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신앙 밖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무지(無知)합니다.

     

    2

    2독서 로마서에서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영생’의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었는지에 관한 ‘복음’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실재가 되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그가 전해주는 ‘복음’이야기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시작을 열었던 인물이 바로 ‘아브람’입니다. 대체 ‘아브람’은 어떻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시작이 될 수 있던 걸까요?

    1독서 창세기 말씀이 그 배경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신 그 유명한 소명(召命) 기사입니다. 그를 불러내시면서 하나님은 약속의 ‘땅’, 큰 ‘민족’, ‘복'의 근원이라고 하는 세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구약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정의해주는 약속입니다. 여튼 아브람은 이 약속 하나만 붙들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없이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순간 순간 불안과 염려에 떨어지고 마는 우리와 달리 그의 모습은 역시나 대단해 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면은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모세나 어린 사무엘을 찾으셨던 대목도 그렇고 신약 성경에도 주님과 대화하던 바울의 회심이야기도 신비롭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와는 이런식으로 말씀해주시지 않는 걸까요? 그렇게만 해주시면 우매함 때문에 어리석은 선택을 할리도 없고,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길에 큰 위로와 힘도 될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런식의 대화를 폐기하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후 성경이 완성되었으니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설명하시는 분도 있고, 반대로 지금도 이런 식으로 주님이 말씀하신다거나 듣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어떤 이들만 경험할 수 있는 차별적 능력으로 결정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아브람처럼 특별한 약속의 말씀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성경은 사람에 관해서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또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는지도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든지, 믿음이 좋았는지 아닌지, 얼마나 대단한 결정과 선택을 하고 살아갔는지 모두 우리의 관심사일 뿐입니다. 인간이 한 어떤 행위도 구원에 합당할 만큼 가치가 없고, 인간이 하는 어떤 삶도 죽음앞에서 무의미할 뿐입니다. 성경이 정의하는 인간은 모두 죄인, 생명을 얻는 일에 무익하고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대체 성경은 아브람 이야기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3

    변화를 두려워하고 그래서 떠나기를 싫어하지만, 인간은 누구라도 그리고 언제나 떠나야만 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오늘은 어제로부터 떠나온 결과이며, 그뿐만 아니라 또 오늘을 떠나보내야만 합니다. 하지만 오늘을 떠나보내고 맞이하게 되는 내일은 늘 우리의 기대와 예측을 배신합니다.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런 날이었습니다. 이만큼 있으면 되었고, 이 정도 가지고 있다고 안심하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제 아무리 큰 소리쳐봐도, 낯선 오늘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모두 힘겹기만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렇게 찾아온 ‘죽음’이 ‘나’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고 말 겁니다. 그렇게 주어진 시간은 우리를 떠날 거고, 우리 또한 모두 주어진 오늘을 떠나야만 합니다.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야만 하는 우리가,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것 같은 낯설음앞에서 무엇으로 영혼과 삶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두렵고 떨리는 ‘떠남’의 상황앞에 서있던 아브람의 이야기안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성경은 ‘떠나라’ 요청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명령에 순응한 것을 ‘아브람’의 ‘믿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떠났다는 것'이 그의 믿음의 정체성이나 업적으로 평가받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 아브람이 아닌 그의 아버지 ‘데라’가 먼저 떠났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데라’는 가족들을 이끌고 고향이 갈대아인들의 땅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러다 ‘하란’이란 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데라’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데라가 아닌 ‘아브람’을 떠남의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람을 찾아가시게 되었는지, 아브람은 또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지와 같은 설명은 전혀 없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그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의 말씀을 듣고, 그를 따르게 되었는지는 성경이 전하려는 핵심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분명히 상당한 분량을 들여 ‘어떻게’와 관련한 그 내용을 소개했을 겁니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핵심 메시지는 ‘아브람’과 조카 ‘롯’을 포함한 가족들이 ‘가나안’까지 이동하게 되었던 모든 걸음이 전적인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안에 있었다는것, 그의 운명 전체가 철저하게 하나님께 달려 있었다는 사실뿐입니다. 말씀은 단순히 그가 길을 떠났다거나 장막을 옮겼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낯설음을 향해 자신의 모든 삶을 걸고 결단해야 했던 떠남이라는 상황앞에서 한 개인이 감당해야할 무게는 결코 가벼이 읽어서는 않됩니다. 아브람도 막연하고, 두렵고, 무서웠을 겁니다. 이 선택의 결과가 화가 될른지, 복이 될른지 어찌될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힘겨운 오늘을 버텨내며 내일 앞에 서 있는 우리와 똑같습니다. 그 누구도 내일이 어찌될른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별일 없기만을,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랄 수 있을 뿐입니다. 여전히 내일을 생각할 때마다, 익숙하고 안전해 보이는 오늘을 떠나야할 때마다 두렵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 떠날 수 있던 아브람이 부럽기만 합니다.

     

    4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 로마서 4:17절

     

    바울은 아브람의 믿음을 이렇게 정의내렸습니다.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부활’을,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신다’는 말은 ‘창조’를 뜻합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믿음의 핵심입니다. 물론 우리도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교리로는 알고 있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실재로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무엇을 해주시고, 무엇을 이루어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주의 주님이시고 죽어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 맞다면, 지금 죽는다고 하고, 망한다고해도 괜찮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리시고 있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창조주’이셨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셨기에 ‘아멘’으로 응답할 수 있던 것 뿐입니다. 이게 마땅한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죽을까봐 두렵고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칩니다. 살려달라고만 합니다. 실제로 아브람이 약속의 땅에 도착한 이후에도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여전히 배고팠고, 자녀도 없었고, 땅도 제것이 아니었기에 늘 이곳 저곳으로 떠나야만 했습니다. 늘 불안했고 염려나 두려움도 끊이질 않습니다. 그런 현실에 실족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그 지난한 시간을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삶은 망했고 희망이 끝나버렸으니 괜시리 떠나왔다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런 현실에서도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시라는 사실에 인생을 걸었던 겁니다. 

    아브람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도 동일하시고 그분의 약속도 동일한데, 여전히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모릅니다.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만 주님을 믿을 수 있는데, 우리는 늘상 나 자신은 들여다보지 않고 하나님 손만 바라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관계가 이토록 어려워진 것은 하나님이 믿을 만하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여간해서는 믿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게 있음이 분명합니다.

     

    5

    복음서 말씀은 주님을 찾아왔던 존경받는 유대 지도자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백성들의 지도자였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로 치면 그는 목사이고, 선교사이고, 스승입니다. 해박한 지식과 가르침을 전하고는 있지만 그에게는 능력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없습니다. 종교적 신실함으로 거룩을 이루어가려고 거룩함을 흉내내는 종교인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컴컴한 밤에 주님을 찾았던 겁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을까요?’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가능합니다.(5)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이전의 삶이 죽고, 오늘부터는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어제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으로부터 결별하고 떠난다는 뜻입니다. 세속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 과연 무엇과 결별해야하고, 어디로부터 떠나야하는 걸까요? ‘자기부인’으로 맞이하는 새로운 ‘삶’입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내야한다는 내가 죽고, 생명을 창조하시고 죽음에서도 살려내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믿음의 근거가 되어 살아가는 겁니다. 그때만 어떤 상황도 용납하고 받아들이고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17절이 복음서 주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복음 3:17 

     

    여러분은 어떤 신앙적 지향을 가지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주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있고 따르고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여러분의 주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십니까? 아무런 자격도 공로도 없음에도 여전히 구원하시는 분이십니까? 행함의 기준을 이루지 못하면 심판하시는 분이십니까? 깨지고 상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용납해주시는 구원하시는 분이십니까? 행함이 아닌 믿음이고, 심판주가 아닌 구원주로서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런 하나님이 계시니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괜찮은 겁니다. 나를 믿으려는 삶에서 하나님을 믿는 삶으로 떠나는 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만났던 그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님의 말씀, ‘거듭남’에 대한 주님의 요구에 삶이 뒤바뀌었던 행복한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간 뒤에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을 장사지내려 시신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사에 따르면 12제자들처럼 복음을 위해 헌신했다고 합니다. 행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던 유대교인던 그가, 이제는 바람이 부는 것처럼 임의로 역사하시는 성령, 창조주이시며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겁니다. 예수안에서 자신의 의를 이루어야 하는 ‘행함’에서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존재’로의 구원을 경험하게 된 겁니다.

     

    6

    ‘존재’로의 구원 경험이 뭘까요? 예수님은 말씀 뿐만 아니라 십자가까지 나아가는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신 겁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아빠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은 아비를 배신하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말없이 온 맘으로 끌어안고 기뻐하고 잔치를 베푼 아버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서라면 아흔아홉을 들판에 남겨두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주시고, 우리의 ‘아빠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면, 세상에서 치이고, 깨지고 상하고, 병들고, 늙고, 그리고 죽음에 삼키워지게 된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살다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고 해도, 우리 자신의 삶과 운명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경험이 바로 ‘영생’의 경험입니다.

    ‘왜, 내게는 그런 은혜를 주시지 않을까?’, ‘ 왜 내게는 아브람 같은 믿음을 주시지 않을까?’ 마음이 불편한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은 사람이란 없습니다. 다만 우리 편에서 제 손으로 살려고 주시는 은혜의 손을 거부할 뿐입니다. 은혜가 없고 믿음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태도로 인생을 살고, 어떤 방식으로 주님을 믿고 계십니까? 지금, 여기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내 곁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빠 아버지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내일이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을 얻는 믿음입니다. 아멘.

    '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03/19 사순절 넷째 주일  (1) 2023.03.14
    23/03/12 사순절 셋째주  (0) 2023.03.09
    23/02/26 사순절 첫주  (0) 2023.02.24
    23/02/19 주현후 마지막주 (주의 변모주일)  (0) 2023.02.15
    23/02/12 주현후 6주  (0) 2023.02.07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