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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4/23 부활절 셋째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4. 21. 18:22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도행전 2:14a, 36-41

      응송 | 시편 116:1-4, 12-19

    2독서 | 베드로전서 1:17-23

    3독서 | 누가복음 24:13-35

     

    설교음원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설교영상

     = '클릭'하시면 설요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또 다시 '예루살렘'으로 

    1

    우리는 오늘 ‘부활절’ 이후 세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한주간 힘겨운 시간속에서 마주하게 되었던 염려와 근심, 절망과 고통을 씻어내지 못했던 기억이, 경축했던 예수 부활의 기쁨이 이토록 무력한 것이었던가 질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싶고, 어떤 상황속에서도 흔들림없는 예수의 증인으로 서고 싶지만, 오늘도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신앙’의 자리에서 확인해야만 한다는 것이 속상한 우리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신실하고 거룩한 삶을 위해 더 노력하고 더 성실했고 더 많이 섬기고 봉사하였지만, 그럴수록 단물에 갈증이 더 깊어지는 것처럼 헛헛한 마음은 좀처럼 쉽게 가라앉지를 않습니다. 애당초 더 많이 소유하고, 이루어내는 방식이 성공신화를 부추기는 세속의 가르침임을 모르지 않지만, 왜 아직도 이런 모습인가?라는 조급함이 자꾸만 단물에 손을 가져가게 만든 탓입니다. 그럼에도 요즘들어 교회안에서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듣게 되니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되자’라던가, 심지어는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해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기독교인이 되자’고도 합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제 스스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감출 수 있고 자신도 속일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똑같은 아픔과 절망, 두려움과 염려에 파묻혀있는 제 자신의 민낯을 마주하게 될 뿐입니다. 세상없는 설교를 듣고 정결하고 거룩한 신앙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오늘은 괜찮았다고 큰 소리칠 수 있지만, 내일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이건 어떤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똑같다는 말입니다. 

     

    2

    하지만 지난 주에 이어 주어진 1독서 사도행전 본문안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난 한 사내를 만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입니다. 백주대낮에 그는 사람들 한복판에서 늠름하게 복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의 설교에는 힘이 있고, 주저함없으며 자신감이 베어있습니다. 도무지 불과 며칠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빛 조차 들지 않는 방에 숨어들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딴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조금 더 세련되고 멋진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도 어떻게 하면 베드로처럼 될 수 있을까 부러워하지는 마십시오. 지금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창조되고, 다시 태어났을 뿐입니다. 겁쟁이에 도무지 믿음 없던 배신자였던 그가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다시 태어나 외쳤던 설교의 내용이며, 복음서의 저자인 ‘누가’는 지금 ‘베드로’의 입을 빌어 초기 교회 공동체에게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 사도행전 2:38

     

    ‘회개', ‘세례’, ‘죄 용서', ‘성령’이라는 네가지 단어가 눈에 띄입니다. ‘회개’는 ‘세례’를 받게 만드는 ‘동기’이고, ‘죄용서’와 ‘성령의 선물’은 세례의 결과라고 본다면, 본문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핵심이 ‘세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세례’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처럼 보이지만, ‘세례’는 교회 공동체안에서 여전히 매우 중요한 예전의 하나입니다. 사실 ‘회개’라는 것이 신앙의 출발을 여는 핵심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걸 눈으로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눈물 콧물을 쏟는 것은 사실 드라마나 영화, 좋은 음악을 들어도 경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절절했다거나 이 만큼 변했다고 해도 어느 순간 똑같을 뿐입니다. 겉으로는 그런 척해 보일 수 있지만 속내까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종종 보게 되는 거룩해보이는 사람들이 제 식구들이나 저보다 힘없는 사람들 앞에서 폭력적이고 거칠게 처신하거나,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것들이 그런 겁니다. 당시 제국의 틈바구니와 성공신화에 끼어 있던 교회 공동체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회개에 이르러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다는 가시적 증표가 필요했습니다. 그 만큼 교회를 핍박하는 박해자들이 많았고, 신앙을 지켜가는 것이 힘겨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내면과 신앙을 꿰뚫어 보실 수 있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의 내면 조차 들여다 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시련과 역경에 비틀거리고 힘겨울 때마다 그들은 ‘세례'를 기억했습니다. 단순히 몇날 며칠에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과 자신은 이미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내는 겁니다. 지금도 교회는 이 전통을 따라 ‘세례’를 집례하거나,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예배의 자리에서 ‘세례갱신’의 예문을 함께 나누기도 합니다. 예전과 예배는 세속의 억압과 시간안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안에 있음을 기억해낼 수 있도록 지켜주는 은총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기쁨이 눈에 들어온 분이라면, 억지로 또는 부러 강요하지 않아도 예배를 선택하고 예배를 통해 하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예배 드림이 기쁨이 되고 힘이 된다는 의미가 이런 겁니다.

     

    3

    그렇다면 선교도 있고, 전도도 있고, 봉사나 헌신도 있는데 왜 누가는 하필이면 ‘세례’를 강조하고 있는 걸까요? 세례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의미 때문입니다. 그것이 뭘까요? ‘죽음’입니다. 세례는 물 속에 잠김으로 코로 숨을 쉬어야만 살 수 있는 나의 죽음을 경험하는 강력한 상징이 됩니다. 이를 통해 내가 죽는 존재라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죽음에서 건져 올려져 새로운 생명을 살아가게 되었음을 자신의 전 존재안에 새겨넣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안에는 세례와 같은 의미를 전해주는 또다른 예전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셨습니까?

    복음서 말씀인 누가복음 24장에는 두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 그들이 열한 제자들과 만나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통해(17절), 이들이 예수의 제자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전혀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침통한 얼굴을 한 채 길을 걷고 있습니다. 게다가 향하고 있는 방향도 이상합니다. 지금 그들은 예루살렘을 등지고 삼십리나 떨어진 ‘엠마오’로 향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지명과 방향을 기록한 것은 단순히 어디로 가고 있다는 의미 이상을 담고 있는 겁니다. 본문의 시작인 13절은 ‘마침 그 날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날은 예수께서 무덤에서 마리아를 만나주셨던 그날이었고, 어두운 방에 숨어든 제자들을 만나주셨던 부활의 날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마땅히 부활하신 주님의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던 걸까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또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그들의 곁에 주님께서 동행하셨지만 그들은 전혀 알아보질 못합니다. 어두운 밤 거리에 잘 보이지 않았다고는 할 수 있어도 음성 조차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방에 들어가 식탁을 마주할 때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빵을 떼어 축복하고 주셨을 때 비로서 정신을 차리고 알아보았지만 주님은 이미 사라져버리신 뒤였습니다. 

    이런 부활의 장면은 참으로 낯설기만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은 눈으로 보는 방식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분명히 그들은 눈을 뜨고 있었을 테지만 누가는 분명히 그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눈이 가려졌다’라고 말합니다.(16절)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다가도 형편이나 상황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무너지기도 합니다. 대부분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들은 사실 곧 사라지고 없어질 것들입니다. 돈도 명예도, 업적도, 심지어는 두려움이나 염려, 근심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저 한 움큼 움켜쥔 것 같아도 어느새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가뭇없이 지나쳐버릴 것들입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걸 아는 것과 아는 대로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행복’이나 ‘성공’을 확인하려고 하고, 또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합니다. 믿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주님이면 충분하다고 하지만, 자신이 쌓아올린 업적이나 성과들로 신앙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생활방식(베드로전서1:18)이라고 말했습니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그런 방식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4

    베드로 사도가 이런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했을 만큼, 우리는 모두 이런 방식에 길들여져있고 억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늘 스스로는 매우 자유롭다고, 얼마든지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아니지만, 다음에는 잘할 수 있고, 내일부터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모두 착각일 뿐입니다. 누가의 말처럼, ‘눈’이 가리워져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 베드로전서 1:18

     

    베드로 사도는 이런 우리에게 ‘희망’이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흠없고 티없는 어린 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해 이런 억압에서 해방되어,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21)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것 없으면 죽을 것같고 저것을 얻었으니 살만하다고 여기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어야만 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까? 이런 자유와 희망은 훈련을 하고, 노력을 한다고 해서 바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찬양을 하면서도 여전히 허름한 내집에 불만이고, 다른 이들의 궁궐같은 집이 부러울 수 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만 산다’고 말해도, 여전히 돈 많고 영향력있고 성공한 이들이 부러울 수 있고, 그런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누구에게나 이런 유혹과 시험은 찾아올 겁니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 우리는 이런 시험과 유혹을 이겨내고 희망과 소망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될까요?

     

    눈이 가리워져 알아보지 못하던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과 함께 하셨던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 누가복음 24:32

     

    깨닫게 하시는 성령을 통해 진리의 말씀이 숨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채워질 때 비로서 닫혀 있던 눈이 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채워지지 않으면 보고도 지나치고, 보고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알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사건은 그렇게만 경험됩니다.

     

    5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 누가복음 24:30~31

     

    이 식탁의 자리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만찬의 자리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누가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식탁에서 하셨던 말씀을 이미 들었습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 고린도전서 11:23b~24

     

    이 식탁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살과 피를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식탁인 ‘성찬’을 통해 언제나 우리 자신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과, 그분의 죽으심으로 인해 이제 우리가 살게 되었다는 기억을 ‘파스카’ 축제로 현재화해 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6

    부활절 이후의 말씀안에서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날이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그 사실을 전하려 달려나간 여인들이 있는가 하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이도 있었고 눈을 뜨고 있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고 믿지 못한 채 낙망하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언제고 우리가 예루살렘이 아닌 엠마오로 향할른지 알 수 없습니다. 시련이 찾아오고, 고통이 밀려오고, 환경이나 상황에 시선을 빼앗겨 믿음이 떨어질 때면 우린 또 속절없이 그 길위에 서게 될 겁니다. 믿기 싫어도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믿음이 무너졌던 제자들이 다시 부활의 현장으로 돌아가 그들이 서로 하나가 되고,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게 했던 것은 그들의 노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삼십리 길을 달려와 잃어버린 당신의 사람들을 찾아내어 다시금 생명의 식탁으로 초대해주신 주님이 그들을 다시 태어나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를 경험했던 제자들이 전해주는 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비록 그들의 증언이 부분적이고 부실해 보인다고 해도 우리는 이들의 부활에 대한 증언에 인생을 걸고 걸어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열려진 문틈으로 비추어진 한줌의 빛일지라도, 어둠을 헤치고 길을 열 수 있는 것은 오직 ‘빛’ 뿐임을 기억하십시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썩지 않을 당신의 피로 세례를 받고 생명의 길을 향하는 증인들의 곁에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생명의 창조가 일어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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