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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5/07 부활절 다섯째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5. 4. 14:42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사도행전 7:55-60

          응송 | 시편 31:1-5, 15-16

        2독서 | 베드로전서 2:2-10

        3독서 | 요한복음 14:1-14

     

    설교음원

    http://naver.me/5s38QtVu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HLP1297XJvg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Quo Vadis, Domine?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1

    복된 주일 아침,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하게 누리며 사는 믿음의 길이 되어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피로와 절망에 짓눌린 삶에서 길을 잃어버린 모든 이들에게, ‘살아있음’이야 말로 풍성한 기쁨과 감사의 이유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일상은 살아간다는 기대보다는, 망가지고 무너지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죽음에 물든 염려와 근심으로 얼룩져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때로는 이렇게 살다가 끝나는 것은 아닌지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그럴때면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조차 자신이 없어집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주님이 풍성한 생명을 가져다 주신다고 믿으면서도 계속되는 두려움과 느닷없이 찾아드는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자꾸만 무언가 확실한 것을 찾곤 합니다. 이건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다를 바 없이 모두가 똑같습니다. 세상에서는 소유나 업적을 통해 내일을 살아갈 확신을 얻으려고 하고, 신앙의 자리에서도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 믿을 수 있다는 모순에 쉽게 빠져들곤 합니다. 그러나 그런 확신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헛헛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이유가 되고 맙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우리의 한계일 뿐입니다

     

    2

    오늘 성서일과 독서 본문으로 주어진 말씀들은 이런 물음의 답을 찾고 싶은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서 말씀인 요한복음 14장 말씀은 바로 앞장인 13장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으로 시작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 요한복음 13:36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질문안에는 ‘어디든 따라가겠다’는 베드로의 신념이 고스란히 베어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닭이 울기 전에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 겁니다. 그 사실을 알고 계셨음에도 ‘너는 따라 올 수 없다’고 에둘러 말씀하실 수 밖에 없는 주님의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편으로 ‘너희는 못 따라 온다’는 말씀을 들어야만했던 제자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불안했을까 싶습니다. 열심을 다하고 있음에도 무언가 부족하다 싶고 불안한 우리 마음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너희는 않된다’고 제자들의 수준을 타박하시거나, 실족하고 불안하게 만드실 분이 아닙니다. 당신은 또한 우리 보다 얼마나 뛰어나신가를 드러내실 분도 아닙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14:1)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 요한복음 14:2

     

    천국에 우리 있을 곳을 준비해두시기 위해서라니, 듣기만 해도 너무 기대가 행복하기만 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길을 떠나시는 까닭이 제 스스로 주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 갈 수 없고, 제 능력으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는, 우리를 위함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님의 말씀은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큰 힘이나 위로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그리 하셨지만 여전히 주님이 보이질 않고, 오늘 내 삶에 계시지 않으신다는 생각에 좌절하는 탓입니다.

     

    3

    면전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이나, 제자들을 통해 이 말씀을 전해 들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이라고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곧 ‘부활’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마라’는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읽을 수 있지만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남겨주신 이 말씀은 오히려 제자들을 혼란에 빠트릴 뿐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도 제자들이 이 사실을 믿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신께서 떠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을지 충분히 짐작할만 합니다. 

    이들은 이미 주님을 따르기 위해 가족, 친구, 직업 모두 포기했습니다. 이제와서 다시 시작할 기반도, 돌아갈 근거도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따르던 예수께서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실 수가 없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황망했을까요. 이대로 주님이 떠나신다면 존재의 의미 자체가 사라지고 마는 겁니다. 말 그대로 망한 겁니다. 배신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주님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었을까요? 위로나 기대나 소망 보다는, 오히려 실감도 나지 않고 하시는 말씀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도 똑같습니다. 극심한 슬픔과 고난과 아픔에 둘러쌓여 길을 잃어버렸을 때, 두리번 거려보아도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 때문에 암울하고 좌절하며 울부짖었던 때가 너무 많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지만, 주님은 승천하셨고 지금 우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떨어지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습니다. 과연 우리의 인생과 삶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요? 이대로 살다가 망하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이렇게 살다가 마주하는 인생의 끝에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과연 이렇게 믿음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일까? 치밀어 오르는 물음에 현기증이 나고 비틀거리게 됩니다. 이런 형편과 상황에 내몰리게 되면,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씀이 여간 믿어지지 않고, 오히려 두렵고, 무서울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더 확실한 약속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 요한복음 14:6

     

    주님의 답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길’은 예수님 자신이고 예수님은 자신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나 ‘이사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안다거나 본다는 주님의 말씀은 너무 아득하기만 합니다. 도마가 이런 우리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 5절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향한 도마의 물음은 그래서 정직합니다. 예수님을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과 같다는 말씀도 뜬금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제자들이 원하던 답변이 아닙니다. 답답했던 빌립이 다시 물었습니다.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 8b

     

    남겨진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당신을 믿고 따르며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모두의 질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주님을 직접 뵌적도 없습니다.

     

    5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 요한복음 14:10

     

    이 말씀이 귀에 들어오나요? 실감이 나십니까? 하지만 역시 주님은 이 말씀만 해주셨고, 우리 신앙도 이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대체 ‘주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주님안에 계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가 되실 수 있고, 하나님과 한분이실 수 있는 걸까요? 마치 ‘삼위일체’ 신학논쟁에 휘말린 듯한 기분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대수롭게 여기면서 지나치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쉽게 하면서도, 반대로 ‘우리가 주님안에 거한다'는 말은 어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은 이해가 되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을 어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말 그대로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인생과 삶을 모두 완전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의존시키고 일치시키셨다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안에 계신다는 말씀인 겁니다. 예수님께 하나님은 부자가 된다거나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당신의 삶의 목적이자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신 것이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 요한복음 14:11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던 말씀은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아버지의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은 늘 아버지의 일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하시는 일을 통해 아버지께서만 하실 수 있으신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늘 주님과 함께 하신다는 이보다 분명한 증거는 없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주님의 ‘일치성’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당신께서 얼마나 하나님 의존적으로 사셨는지를 보여주고, 그분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께 일치되었는지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얼마나 주님과 관련이 있는 일일까요? 우리는 또 그 일을 하기 위해 얼마나 주님께 의존되어 있고, 얼마나 주님의 뜻에 일치되어 있을까요?

     

    6

    주님 말씀안에서 비로서 ‘어디로 가시는 것이냐’고 묻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대체 ‘주님이 어디에 계신 것이냐’고 울부짖어야만 했던 우리도 답을 찾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일을 보아서라도 믿으라’던 주님의 말씀이 해답입니다. 주님은 그럴싸하고 멋드러진 삶을 자랑하는 이들의 곁이나, 세상의 아픔에 눈을 감은 채 자신들이 누리는 ‘복’에만 만족하는 이들이 모인 교회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스스로 살만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곳에 기웃거리던 걸음을 멈추십시오.

    이제 우리가 주님을 찾기 위해 있어야 할 곳은 분명합니다. 

    틀림없이 오늘도 주님은 배신에 아파하고 삶에 지친 이들의 곁이나, 배고픔과 질병, 갑작스런 사고로 아파하거나 생명을 잃은 이들과, 소외되고 깨어진 채 절망의 나락까지 내몰린 사람들, 그리고 비록 힘에 겹지만 여전히 그들의 곁을 지키고 있는 따듯한 이웃들의 곁에 계실 겁니다. 애타게 당신을 부르는 이들이 있는 곳이나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어 흘리는 눈물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주님은 그곳에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필요한 곳이 곧 주님께서 일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는 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곳에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창한 선교나 봉사, 섬김이 있어야만 한다고 어렵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셨던 주님이 이제 우리와도 한 몸이 되어 주셨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보면 겨자시 한알처럼 작아 보이지만, 주님께서 우리 개개인의 삶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주님이 일하셔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변하지 않는 진리로 믿는 사람들이 성도인 겁니다. 이 믿음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삶을 저주와 원망, 체념이나 실망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한 몸이 되어 살아내주고 계신 경축하고 기뻐해야할 이유로 삼습니다. 깨어진 삶도 주님이 계시니 구원받을 삶이 되고, 시련과 역경도 주님께서 일하시는 임재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7

    비록 삶이 힘에 겨울지라도, 세상이 강요하고 억압하는 방식으로 삶을 채워서는 곤란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뻐할 일이 없고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억울하고 힘겨울지라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안에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마음에 근심하지도 마시고, 미래와 장래 일에 대해서 염려하지도 마십시오. 아무리 염려해도 우리는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내일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해주실 겁니다. 그러므로 견디기 힘든 아픔과 슬픔에 눈물이 차오를 때면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너희의 주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바로 지금 이곳에, 내가 믿는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고 답해주십시오. 바로 그 순간,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고백이 터져나오는 그곳에 주님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지 않걸랑,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시던 주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시는 일을 보고 믿으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에 운명을 걸고 주님과 한 몸, 한 운명 공동체가 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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