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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5/21 부활절 일곱째 _주의 승천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5. 18. 15:28

    #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사도행전 1:6-14

      응송 | 시편 68:1-10, 32-35

    2독서 | 베드로전서 4:12-14, 5:6-11

    3독서 | 요한복음 17:1-11

     

    # 설교음원

    http://naver.me/GVWdtWLk = '클릭'하시면 설교 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fmk9kZIwtTo = '클릭'하시면 설교 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승천, 폴 귀스타브 도레

     '영광'을 돌리는 삶

     

    1

    살아 있다는 말은, ‘시간’을 살고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허락되었던 시간이 멈추어졌을때는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생명’, 그러니까 살아있음을 ‘시간’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고, 또한 시간이라는 것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를 지나 미래를 향해 지나가는 것이기에, 한 사람의 시간안에는 지나간 흔적과 기억이 남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 흔적이라는 것이 우리 자신의 바램이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찾아와 상처처럼 새겨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따듯해 질 만큼 기분 좋은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불쑥불쑥 악몽처럼 떠올라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도 합니다. 지나간 흔적 뿐만이 아닙니다. 오늘을 지나쳐 마주해야할 내일은 기대감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되기도 하지만, 한걸음도 내다볼 수 없다는 ‘두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내일’을 알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날른지, 오늘의 선택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지, 과연 내일은 오늘과 달라질 수 있을지와 같은 ‘불안증’을 떨쳐 낼 수 없는 우리입니다. 제 아무리 좋은 말을 듣고, 세상 없는 약속을 하더라도 우리의 관심사는 다시금 ‘과연 언제’라는 의구심에 떨어지고 맙니다. 오늘 성서일과 1독서 사도행전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지금입니까?’라는 제자들의 물음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님을 향해 ‘과연 언제입니까?’라고 묻는 우리의 물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2

    오늘 복음서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 그러니까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그들을 위해 드리셨던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속내는 당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 당신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실 수 있던 근거와 조건은, 1절에 담겨있는 ‘주님 자신이 영광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 1절 

     

    주님께서 가리키고 있는 ‘영광’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죽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우리가 고백하고 찬양할 만한 ‘영광’일 수 있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은 버림 받음과 초라하게 버림 받은 ‘실패’일 뿐입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치욕적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에서 현실적으로 우리가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 고린도전서 1장 23절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예수는 당시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메시아의 표상과는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런식의 ‘영광’을 바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주님께 영광’이라는 고백을 너무 쉽게 말하곤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사탄’의 요구를 거절한 탓에 내몰리고 결국에 살해당한 곳입니다. 사탄은 에덴에서 첫 사람 아담을 유혹했을 때처럼, 돌을 떡으로 만드는 능력이나,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선택받은 자로서의 위상, 그런 방식을 택함으로 세상 만국을 얻는 풍요와 같은 자신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의 거룩한 종교성과 로마 황제의 ‘보좌’처럼 메시아의 표상으로 어울릴 만큼 매력적인 것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구원방식에 자신의 생명을 던지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주님을 살해했습니다. 제자들도 주님을 버렸습니다. 삼년간 외쳤던 모든 것들, 죽음에 내몰릴때까지 포기하지 않던 하나님 나라 운동 모두가 속절없이 실패한 겁니다.

     

    3

    하지만 복음서는 ‘영광’이 예수님께 드러났다고 합니다. ‘영광’이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드러내는 단어가 ‘영광’인 셈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귀신’을 내어쫓거나 질병이 치유되는 것처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영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영광’이 드러났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이 틀리고 예수께서 옳다는 것을 천명하고 드러내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사건입니다. 이제 ?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께 고스란히 전해졌고, 세상에 대한 모든 주권이 주님께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복음서의 증언이고, 교회 공동체가 목숨을 걸고 지켜온 믿음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예수를 십자가로 내몰았던 성공신화의 위세는 막강하기만 합니다. 여전히 삶과 죽음의 여탈권이 예수가 아닌 ‘황제’에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목숨줄을 쥐고 있다는 ‘돈’의 으름짱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뒤흔들 만큼 대단합니다. 이런 기만과 위협에도 예수님을 길삼아 오롯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오늘 주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믿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17장3절

     

    주님은 당신께 주어진 모든 영광과 권세가 결국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주어진 것들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기만에 속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시는 분은 주님 뿐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의외로 ‘영생’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저 입에 말일 뿐 실감이 날리가 없습니다. 자꾸만 유혹에 넘어지는 까닭도 사실은 주님이 가져다 주시는 것의 가치가 현실적으로 손에 잡히지 않은 탓입니다. 마치 당장 배가 고프다고 유산으로 남겨진 인감과 통장을 돈 몇푼과 바꾸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4

    ‘영생’에 관해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 요한복음 11장25~26절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히 사는 것’을 단순히 무한히 연장되고 오래 살게 되는 생명으로 생각한다면 곤란합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결국은 죽는다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영생’은 전혀 다른 생명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은 언젠가 썩어 없어질 ‘몸’이 아니라, 죽음을 무너트린 썩지 않는 몸을 입는 겁니다. ‘영생’이나 ‘부활’은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교회 전통은 ‘나비’를 ‘부활’의 상징으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나비’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에벌레나 고치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생’을 얻는다는 것도 단순히 오래 살게 되었다거나, 건강해지거나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억압과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주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지금 여기에 찾아와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감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조바심에 내모는 모든 강요와 두려움과 염려로 떨어지는 불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기대어 살아가게 되었다는 이 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분명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 특별한 관계 안에 들어왔으니 마땅히 그 나라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야 함에도, 이토록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5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끊임없이 유혹하는 세상의 영광과 사탄의 기만에 속아, 하나님 나라에 무관심해진 탓입니다. 나는 그런 기만에 귀를 기울이거나 속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사탄의 나라와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거부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나 그런 걱정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세상이 강요하는 것들입니다. 이건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지 못하면 일상에 떨어지게 되고, 일상에 집중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현실성이 없는 설교처럼 들리시나요? 저는 지금 그런 것 없이 살수 있다고 선동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에 가치를 두고 인생을 어디에 집중하며 살고 있는가하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어떤 직업을 얻고,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를 제외하고는, 나 자신의 삶이란 무엇인지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알 수 없는 조바심에 내몰려 늘 피로하고, 허무합니다. 하지만 한끼의 식사로 만족하고, 주어진 하루에 감격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에도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 교회 공동체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런 삶을 선택하고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부활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보니 그렇게 밖에는 살 수 없던 겁니다. 언제나 세상에는 멋있고, 매력적이며, 온 세상을 아우를 만큼 대단해 보이는 구원의 이름들이 넘쳐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얻으려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만 있다고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아버지의 영광과 아들의 영광을 통해서만, 죄와 죽음이 가져다 주는 모든 어둠을 밝히는 ‘영생’의 삶을 살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6

    사도행전 본문은 구체적으로 ‘영생’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지금 주님께서 하늘로 올림을 받으시고 자신들 곁을 떠나셨다는 현실에 처해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했고, 다시 오시는 종말의 날까지 성령과 더불어 늘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은 주어졌지만, 종말은 아직도 아득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내는 것은 제자들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올리브 산이라고 불리우던 ‘감람원’에서 내려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이 바로 그들이 살아내야 하는 삶의 자리입니다. 

     

    이들은 모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 | 사도행전 1장14절

     

    예루살렘,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온 그들은 오직 ‘기도’에 힘쓰고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승천과 다시 오실 재림 사이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개역개정은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하고, 새번역은 ‘한 마음으로 기도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당장 산에 올라가거나, 매일 철야하며 기도해야겠다는 조급함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오로지’나 ‘한 마음’으로라고 번역된 이 말씀 그대로 365일 24시간 기도해야한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합니다. ‘기도에 힘썼다’는 것은 기도하는 것에 시간을 많이 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도했느냐는 결국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았느냐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고 이제 재림의 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들은 먹고, 마시고, 입는 방식이 아니라, ‘기도’하는 일을 마음 중심에 두고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전향한다는 뜻입니다.

     

    7

    ‘누가’는 1장의 결말을 ‘유다’의 죽음으로 공석이 되었던 ‘사도’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사도로 선출하는 내용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예수의 승천과 재림의 약속, 그리고 제자도를 언급하고 있는 본문과 잘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한 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는 것’이나 ‘사도’를 선출했다는 내용은 초기교회가 ‘재림’을 막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야 하는 삶의 내용으로 믿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영생’하게 하시는 능력이 예수님 안에 일어났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하나님께서 ‘영생’하는 생명을 완성시켜주실 것이라는 사실에 운명을 걸고 ‘오늘’을 살아갔던 겁니다. 그것이 누가가 증언했던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삶’인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때’,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이 언제인지는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그 날은 하나님께 속해 있는 날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실일을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의 일은 ‘약속의 말씀’에 기대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주어진 오늘을 살아내는 것 뿐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까닭은 하나님과 한 몸이 되심으로 어느 곳, 어느 때라도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께 응답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만 믿으며 사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하나님 백성의 영생하는 삶이며, 우리에게 생명 주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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