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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10/22 성령강림후 스물한 번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10. 18. 16:21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출애굽기33:12-23 혹은 이사야 45:1~7

      응송 | 시편 99 혹은 시편 96:1~9, (10~13)

    2독서 | 데살로니가전서 1:1-10

    3독서 | 마태복음 22:15-22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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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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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us en een gevolg kruisdragers; Titelpagina voor T. à Kempis, De imitatione Christi, 1626.

     

    '그리스도'만 본받는, 교회

     

    1

    정작 우리들 자신은 잘 모르고 있지만, 오늘 교회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눈에 비친 ‘신앙’이라는 것은 매우 기괴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한주일 내내 수고하고 쉼을 가져야 할 주일 아침부터 예배에 참석하고, 조금 심한 경우는 하루 종일 교회에서 바쁘게 지내기도 합니다. 먹고 살기 퍽퍽할 만큼 물가가 치솟고 있는 요즘에도 ‘십일조’ 뿐만 아니라 헌금을 아끼지 않는 우리를 세상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이렇게 세상과 다른 방식의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신앙인'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러니까 ‘구별된 신앙’이란 이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신앙은 교회 밖의 사람들과 전혀 구별됨 없는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거나, 반대로 현실을 외면한 채 내세의 천국에만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극단으로 치닿고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겉으로는 굉장히 신실하고 거룩해보이기는 하지만, 자꾸만 현실과 신앙을 분리하고 구별하려는 특징을 가집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신앙이란 천국이 아닌 믿음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신앙’으로 흐릅니다. 하루 아침에 실직을 하게 되거나 사별을 하게 되거나 건강을 잃게 될 때, 전쟁같은 시련과 환란이 찾아왔을 때, 우린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이 절망합니다. 막연한 내일 앞에서는 염려하고 불안해 하며,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 무색할 만큼 곤한 현실앞에서 절망에 떨어지고, 믿으라는 말씀이 어색할 만큼 허둥댑니다. 결국은 아무리 큰 소리쳐도 신앙을 가지고 있으나 없으나 살아가는 모습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 성서일과 본문에는 두개의 공동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공동체는 구약의 '출애굽 공동체'이고, 두번째는 신약의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이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 경험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을 통해, 출애굽 공동체로 대변되는 유대교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차별성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인’ 답게 만들어 주는 걸까요? 다시 말하면, 율법을 지키고, 해야할 것과 금해야할 것을 엄격히 구분하는 유대인들의 ‘거룩’과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며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업적과 실력, 부유함과 명성, 효용성으로 평가받는 자본주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는 또 어떤 면에서 다른 걸까요?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서 통용되고 경험되고 살아내어지는 ‘예수 사건’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존재론적 차원의 답변을 찾아내셨나요?

     

    2

    복음서 이야기는 오늘도 유대 종교 기득권자들과 논쟁하고 있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궁지로 몰아넣으려던 바리새파와 헤롯당 사람들의 사특한 계략을 무력화한 주님의 남다른 지혜에 감탄하고 탄복하면서 본문을 지나치곤 합니다. 하지만 정작 이 말씀에서 우리가 지나쳐서는 않되는 물음이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 한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한편으로 마치 ‘가이사의 것’을 인정하시는 듯 보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고 보존되며, 결국 완성될 겁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에 ‘가이사의 것’이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라는 말씀은, 마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건 누구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치명적입니다. 과연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걸까요.

    비단 주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일상속에서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해내고 싶어합니다. 속되고 더럽고 추한 것, 괴롭고 슬프고 억울한 것들은 모두 ‘가이사의 것’이라는 이름을 붙여 떨쳐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속된 세상이라고 쉽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그런 세상속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돈을 벌고, 소비하고, 꿈을 이루고, 살다가 죽습니다. 부자들을 부러워하고 부정한 사업가를 비난하지만, 그런 직장에 들어가지 않으면 않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으레 ‘돈’은 추하고 악하고 더러운 것처럼 여기면서도 그 돈을 얻으려고 한 주일 내내 몸부림치며 살아갑니다. 돈 때문에 울고, 돈 때문에 웃기도 합니다. 심지어 ‘돈’이나, ‘돈’이 가져다 주는 ‘평안’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이 뒤섞여 있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도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그런 것들을 분리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마태복음 15:11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그러므로 속된 것이나 거룩한 것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을 구별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거룩하신 그리스도에게 잇대어진 존재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놓치게 되면 그 대상이 세상이든 공동체든 내 안에 있는 것이든, 바르지 못한 것, 합당하지 않은 것, 옳지 않은 것 때문에 분노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전체를 바꾸어 낼 수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지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가이사의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믿으며 신앙안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이 땅에는 지옥처럼 고통스럽고 괴롭고 막막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가이사가 지배하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3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분리하려는 분들 중에는 유독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나 세대주의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어차피 이 땅은 심판 받아 망할 땅이고, 어차피 인생은 죽음에 침몰되고 말테니, 진짜 세상인 하늘을 기대하며 살자는 겁니다. 얼핏 보면 대단히 거룩하고 신앙적으로 보이지만, 이건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상하고, 깨어지고, 터졌어도, 이 땅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단 한순간도 이 땅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자꾸만 현실을 포기합니다. 직장도 버리고, 가정을 버리고, 제게 주신 삶도 버립니다. 이건 우리를 주 오시는 그 날까지, 빛이 되어 어둠을 밝히는 존재로 불러주신 ‘존재’로서의 사명을 포기하는 겁니다.

    종말의 그날까지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처럼 구별될 수 없는 것을 자꾸만 성과 속으로 이분화하려다보면, 결국 자기 스스로 ‘거룩’해지지 못하는 삶에 낙담하거나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가식에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있음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불량품처럼 잘 못된 인생것처럼 비굴해질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힘겹고, 버거워도, 눈물이 나고, 지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치열하게 ‘가이사’의 시간을 살아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세계가 진짜 세계인 것처럼 그들의 권력에 의해 십자가에 살해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분안에서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것임을 드러내주신 ‘부활’이 열렸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프고 힘에 겹고 눈물이 멈추지 않는 시간일지라도 내게 주어진 삶, 단 하나의 사건, 한 하루의 시간도 헛되지 않고 내 몫으로 주어진 인생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출애굽 공동체와 구별될 수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애굽에서도, 홍해 바다 앞에서도, 물이 떨어지고 식량이 바닥난 위태로운 순간마다 하나님은 그들의 구원이 되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뿐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들의 진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심에도 그들은 늘 어떤 곳, 어떤 상황앞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불신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예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처럼 죽음에 휘둘리고 버려진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붙들며 살아갑니다.

     

    4

    모세는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만을 갈망했습니다. 제 노력과 수고, 열심을 통해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은혜’는 그저 우연일 뿐이지만 조금만 정직하고 진중하게 삶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살아있음은 내 안에서 나올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 아무리 지키려해도 깨어지고, 깨어진 것 같지만 살아있으니, ‘은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너 여기까지 온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이 곳에서 떠나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 | 출애굽기 33:15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고 배고프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동행해주셔야만 한다는 모세의 요구는 간절할 뿐만 아니라 정당합니다. 모든 은혜와 영광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 출애굽기 33:19b ~ 20

     

    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하나님의 동행을 구하는 모세의 요구에 엉뚱한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은혜’를 누리고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것은 모든 신자의 소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지금, 우리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내몰려 있습니다. ‘영광’을 보여달라는 모세의 간구는 말 그대로 지금 우리는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볼 수 없는 현실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만들어 낼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강요할 수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마음이 간절하고 삶이 위태로워도 은혜나 영광을 우리 뜻대로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신앙적 열심으로 얼마든지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일 겁니다.

     

    5

    자칫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던 주님의 말씀을 적당히 세상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에만 천착하라는 식으로 들으시면 곤란합니다. 주님은 이런 식의 현실 도피적이거나 무책임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가이사’가 주인 노릇하는 세상속에서 모든 것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모든 삶의 영역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훨씬 책임적이고 투쟁적인 삶을 요구받는 겁니다. 돈이나 명예, 세상의 권세와 영광들이 부러운 시대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은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뱉을 수 있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으스대는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는 말일 뿐만 아니라, 그런 시대에 버려진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부러움에 떨어지거나 비교 경쟁에 내몰리지 않고, 모든 것을 감사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책임을 다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당장 내년에 오를 전세값을 걱정해야하는 사람에게 신도시의 아파트는 꿈만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목회도 다를 바 없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찾아오고 등록하는 대형교회와 달리, 작은 교회의 현실은 내일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 떨어지면 빚을 내서라도 아파트를 분양받으려하고, 어떻게 해서든 큰 교회 목회자가 되어보려고 하게 될 겁니다. 불안하고 조급해지다보면, 섣불리 분주해지거나 오히려 열패감에 나태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은혜를 입고도, 또다시 갈증이 나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 두려움에 떨어지던 이스라엘처럼, 손에 잡히는 것은 은혜로 벅차오르다가도, 절망하고 실망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될 겁니다. 

    서신서 말씀을 해답으로 결론을 맺어야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에 관해 들려온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교회를 칭찬한 까닭은 딱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1:6

     

    저명하고 능력있는 강사를 모시고 집회를 하고, 기도회를 하고, 세미나를 하고, 행사를 하고, 훈련이라도 했던 걸까요? 바울 사도가 기뻐한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우리’ 즉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가르친 것을 따르며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6

    교회들을 향한 바울 사도의 최종적 권면은 늘 한가지 뿐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 고린도전서 11:1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은, ‘바울’이라는 인물의 됨됨이를 닮으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빛은 아닙니다. 바울도 인생을 걸고 본받는 분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았고, 그런 바울을 교회들은 본받았던 겁니다. ‘본받는 것’은 본문 6절에서 ‘우리와 주님을 본 받는 것’이라고 했던 헬라어 ‘미네테스’입니다. ‘모방’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방의 대상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내 안에는 없기에, 그저 주님을 따라하는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모든 삶은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이어지는 것, 하나님을 의존하며 일치화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님을 모방했다는 것은, 결국 예수께서 하나님을 믿었던 방식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갔음을 뜻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런 전통을 잘 이어받았고, 그 결과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의 본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본’은 ‘튀포스’라는 단어로, 상처자국, 흔적, 형상, 본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안에 새겨진 그 흔적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의 역사, 신앙의 전통은 자신을 어떻게 채우고 어떤 수준으로 신앙을 고양시킬 것인지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는 것만을 신앙의 지향으로 삼는 겁니다. 말씀이 능력이 되어 삶으로 이어지고 육화되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더 무엇을 할 이유도, 더 해야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을 본받는 일에만 온 마음을 쏟으면 됩니다. 생명 살림의 모든 역사는 기꺼이 우리의 본이 되어주신 그리스도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이것 외에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있을까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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