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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8 성령강림후 열아홉 번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3. 10. 6. 16:18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출애굽기20:1-4, 7-9, 12-20 혹은 이사야 5:1~7
응송 | 시편 19
2독서 | 빌립보서 3:4b-14
3독서 | 마태복음 21:33-46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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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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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ined Glass Window at Church of Saint Aignan, Chartres/France 배타적인, 하나님의 구원
1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걱정과 불만은 늘 한결같을 겁니다. 자신들의 눈에는 선택의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도,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늘 ‘~해라’든가, ‘~하지 마라’는 말만 합니다. 하지만, 정작 부모 세대도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여기까지 왔을 뿐입니다. 따지고보면 지금의 판단이 옳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불안과 후회를 반복하는 어리석음도 진즉 멈췄어야만 합니다. 그러면서도 가르치려드는 이전 세대를 요즘 세대들은 ‘꼰대’라고 부릅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많은 시간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주 쉽게 ‘상대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문자 중심으로 읽던 중세의 교회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을 절대적 교리로 삼기도 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내일을 배고프지 않고 부자되는 것을 기준으로 속단하지만, 자녀들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불행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권위와 틀에 얽매이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시대상을 우려하는 성경의 구절이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 사사기 21:25
이스라엘을 이끌던 ‘사사’들의 시대가 끝나던 마지막 때를 향한 성경의 평가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제 뜻대로, 제 맘대로 살아낼 수 있을 만큼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느긋한 봄 소풍 같은 날은 ‘태풍의 눈’안에 머무는 잠깐일 뿐입니다. 느닷없이 밀려드는 감당할 수 없는 폭풍이나 사나운 풍랑앞에서는, 어딘가 혹은 무엇이라도 자신을 꽁꽁 묶어줄 든든한 것을 찾을 수 밖에는 없습니다. 오히려 절대화하는 모든 권위를 부인하고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진리로 믿는 포스트모던의 흐름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공허해져가고 있습니다. ‘내 뜻대로’라고 하는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안한 실존을 붙들어줄 ‘구속’을 찾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실존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복’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잇대어 있으니 그렇습니다.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 삼아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교회안에서는 ‘오직 말씀으로’, 혹은 ‘말씀에 순종’한다는 식의 표현을 유독 많이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아마도 매일 시간을 정해 성경을 읽는다거나, 설교를 듣고, 규칙적이고 구별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떠올릴 겁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열심을 다하여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듣는 마음’이 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절함이 일어나야하는데, 조금 심한 표현으로 말씀을 어떻게 이용할까?처럼 사특한 마음에 휘둘릴 때가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2
오늘 1독서 본문은 출애굽기 20장과 선택본문으로 이사야 5장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출애굽기 본문은 ‘십계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십계명’은 출애굽기 말고도 ‘신명기’ 5장에서도 등장할 만큼, 구약의 하나님 구원 사건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석달동안 광야길을 지나 도착했던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한번이 아닌 두번이나 주어지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돌판을 깨트려 버린 탓에, 출애굽기 34장에서 그는 다시 한번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처음 계명을 받았던 때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내용은 다양한 신학적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와 관계없이 계명 자체는 대단히 단호하고 명확한 명령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가지 계명안에는 두개의 ‘~하라’는 계명과 여덟개의 ‘~하지마라’는 계명이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마라’는 금지규정도 따지고 보면 예를 들어, 1계명인 ‘나 이외의 다른 신을 두지 마라’는 금지명령은, 사실 ‘하나님만을 믿으라’는 말씀인 것처럼, ‘반대로 ~하라’는 강력한 명령과 요청을 담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여지는 없습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응답은 언제나 ‘예’라고 하는 ‘아멘’만 남을 뿐입니다. 철학자 칸트가 말했던 ‘정언명령’이 이런 겁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와 무관하게, 그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왜’라는 물음없이 무조건 수행해야만 하는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확신은 불신이 되고 우리의 의지는 무너질만큼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고 마땅히 옳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은 언제나 ‘아멘’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말씀에 대한 절대성이나 순종의 요구를 교회에서 목사의 말에 토달지 말고 복종하라는 식으로 읽는 분들이 많습니다. 말씀은 교회 시스템이나 질서를 유지하거나, 도덕적인 태도를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읽으면 ‘말씀’은 예외없이 거북한 ‘명령’이나 버거운 ‘의무감’이 되어, 결국은 마음과 영혼을 지치게 할 뿐입니다. 해야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은 제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고 잘해내는 것처럼 보여도, 그런 척하는 가식에 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과 ‘명령’은 오히려 가볍고, 즐겁고 영혼을 만족시켜줍니다. 모든 억압과 불의함을 벗겨내는 생명의 능력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마땅하고 온전한 명령, 따라야 하는 명령은 오히려 우리를 지키고 살려냅니다.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말씀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 엄마의 배안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태아는 엄마의 뱃속에서 열달을 채워야만 합니다. 답답하다고 일곱달, 여덟달만에 나오려고 하면, 문제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기 위한 마땅한 ‘질서’입니다. 이걸 자꾸만 도덕적 규범 정도로 생각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3
선택본문인 이사야서는 ‘포도원 노래’라고 불리우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 노래는 포도를 수확하거나 가을 농사를 마친 이후에 벌이는 축제에서 불리웠다고 합니다. 그러니 좋은 열매를 맺게 해주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일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본문의 내용은 축제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어찌해서 들포도를 맺혔느냐’는 불편한 표현만 있을 뿐입니다. 축제를 벌이고 있는 이들을 향한 탄식과 고발의 노래인 셈입니다. 이사야의 노래의 결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여섯 가지 ‘화’로 끝을 맺습니다. 그 이유는 극상픔 포도 맺기를 바라셨는데 들포도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셨던 ‘미슈파트’ (공평)와 ‘체다카’(정의)대신에 이스라엘은 ‘미스파흐’(불법과 압제)와 ‘차아카’(통곡과 울부짖음-억울함)를 맺었습니다. ‘복’받는 자로 불러주셨는데 오히려 ‘화’에 기울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노래였던 겁니다. 현실은 추수와 수확으로 풍성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사야에게 이 만큼 열심히 했고, 이렇게 잘해왔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따져물었을 겁니다. 우리가 언제 불법을 행하고 포학을 저지르고 가난한 사람들을 울부짖게 했느냐고 화를 냈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양과 염소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따져묻던 왼편에 있던 ‘악인’들, 그러니까 ‘염소’의 항변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마 25:31 ~ 46)
겉으로 볼 때, 그들은 꽤 괜찮은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성전 제사도 열심이었고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에 자긍심도 남달랐습니다. 현실도 마치 ‘복’받는 것처럼 풍성하고 느긋하고 여유있습니다. 이 만큼 성공했고 이 만큼 물질적으로도 풍성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종교기득권자들의 모습이나, 오늘 세련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남유다를 향했던 이 심판의 노래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이 본문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복’과 ‘화’는 겉으로 보이는 삶의 형편이나 상황이 어떠한가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미슈파트’와 ‘체다카’의 핵심은 얼마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안에 살고 있느냐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4
복음서 말씀도 ‘포도원’과 관련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아들 마져 살해하고, 포도원을 빼앗으려 들던 농부들의 패악함을 읽으면 분통이 치밀어 오릅니다. 누구나 같은 생각일 겁니다. 예수님을 핀잔주려던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들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악한 자들이라면 가차없이 죽이고 다른 이들에게 포도원을 맡겨야 한다’(41)는 그들의 울분에 찬 말투속에서 응당한 보복이 주어지는 것만이 ‘정의의 실현’이라는 비장감 마져 느껴집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신 핵심은 비유의 끝자락인 43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 43b
주님 말씀대로라면 한편은 하나님 나를 빼앗기기고 다른 한편은 하나님 나라를 받게 될 겁니다. 본문에서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될 것인지는 명백합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같은 유대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 나라’ 앞에서 어느 편에 속해 있을 것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절대적 순간이 찾아오는 순간, 우리가 속해 있는 곳이 어디인지에 따라, 맞이하게 될 처지와 운명은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비유의 말씀대로라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살해한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주님 말씀에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고 억울함을 호소했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살해했습니다. 비유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토록 불법에 분노했던 그들이, 왜 정작 자신들은 터무니 없이 패악한 불법을 저지르고 말았던 걸까요? 이들이 한통속이 되어 예수님을 살해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절대시하던 ‘성전'과 ‘율법’을 어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전과 율법을 절대화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누구보다 더 열심히, 누구보다 더 완벽하게, 누구보다 더 거룩한 이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주의는 우리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우리만 구원받았다는 식의 ‘자기의’가 되어,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내몰았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이나 ‘율법’을 부인하신 것이 아니라, 저들이 절대화 하려고 하던 금기를 깨트리고, 그들 스스로가 세운 권위를 거부하셨던 것 뿐입니다.
5
도덕성의 차원이나, 종교적 열심의 측면에서 본다면 유대교가 기독교보다 우월합니다. 안타깝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의 열심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예수님을 살해하도록 부추겼던 겁니다. 이런 식으로 말씀드리면 ‘그렇다면 거룩이나 신실함, 구별된 신앙생활은 필요 없다는 것이냐?' 불편해 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결국 죄와 죽음으로 깨어진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본 받는다거나,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거룩을 이룬다는 것도 이런 말입니다. 다만, 방향성이 문제입니다. ‘포도원의 노래’에서 불리워졌던 ‘미슈파트’와 ‘체다카', 공평과 정의야 말로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시는 삶, 우리가 살아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삶을 살자’거나, ‘이런 식의 나라를 이루어가자’는 선동에 그치면 곤란합니다. 애당초 우리안에는 억압과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이룰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내고, 세상없는 사람이 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제 아무리 ‘공평’을 외쳐도 누군가의 기득권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정의’를 부르지지만 ‘불법’으로 치우치고 맙니다. 이건 새벽부터 나가 밤이 늦도록 두 사람, 세 사람 몫의 일을 해내도 노예는 자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유다’가 극상품 포도인 ‘미슈파트’와 ‘체다카’를 맺는 나무가 되지 못한 이유는 종교적 열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실패한 탓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잇대어 있어야 하는 것은 어떤 업적이나 사명을 수행한다거나, 의무를 감당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명령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노예가 아닌 자녀로 사는 ‘복’을 누리기 위해, 세상에서 복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복’으로 살아가기 위한,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생명의 길입니다.
삶을 개량하고, 교회를 정화하고, 시스템과 제도를 개혁하는 방식으로는 세상이 바뀌거나, 공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힘을 얻게 되는 순간, 개혁의 기치를 높이던 이들이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뿐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비슷할지 몰라도, 세상을 한번 바꾸어보겠다는 열심으로 달려가는 길의 끝은 타락과 부패로 귀결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숱하게 보아왔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대제사장, 장로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같은 유대인들은 스스로 종교적 열심과 도덕적 경건성을 이루겠다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겨, 결국은 예수님과 함께 찾아온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6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죽은 자 가운데서 그분을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께로부터 용납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열매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만 맺어가시는 열매입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순리’이듯,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를 얻는 참된 구원의 길입니다. 진리는 배타적일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하나님 말씀만이, 참으로 사는 길임을 보여주신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망하는 길이라고 꺼리고 두려워하는 ‘십자가’를 향해 ‘아멘’으로 응답하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있는 자로 불러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위에 무엇을 더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염려할 이유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인 겁니다.
마땅히 생명의 길 되시는 그리스도께 향해야하는 마음을 성공이나 생존에 빼앗기고 있다면, 삶은 하나님 나라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내몰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기로 결단하고 돌이켰던 세리와 창녀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 사건이며, 하나님께만 속한 고유한 능력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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