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23/10/01 성령강림 후 열여덟 번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9. 27. 11:01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출애굽기17:1-7 혹은 에스겔 18:1~4, 25~32

      응송 | 시편 78:1-4, 12-16 혹은 시편 25:1~9

    2독서 | 빌립보서 2:1-13

    3 | 태복음 21:23-32

     

    # 설교음원

    http://naver.me/Gt1jtsVI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z3HHD9sbOho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포도원의 두 아들>, 안드레이 미로노프 作

    아나빔 _ '하나님'께  길들여지다

     

    1

    ‘모세’는 애굽의 압체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해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이끌었던 민족의 영웅입니다. 성경은 한줄의 말씀으로 그의 됨됨이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모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 | 민수기 12:3 

     

    ‘겸손’하다는 히브리어 ‘아나브’ (עָנָו)를 개역개정 성경은 ‘온유함’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온유함’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마태복음 5:5

     

    주님께서 ‘온유함’을 말씀하실 때 사용한 헬라어 단어는 ‘프라우스’(πραΰς)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 성경에서도 모세의 온유함을 번역할 때 히브리어 ‘아나브’를 대신해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아나브’나 헬라어 ‘프라우스’가 똑 같이 ‘온유함’을 뜻하는 단어라는 말씀입니다. 

    보통은 ‘온유함’이라고 하면 타고난 사람의 성품으로 쉽게 오해를 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되면, ‘온유함’은 어떤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될 뿐입니다. ‘온유함’을 뜻하는 ‘아나브’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 볼 수 있는 본문이 있습니다. 다윗이 썼다고 알려져있는 시편 37편입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 37:1

     

    잠잠히 주님을 바라고, 주님만을 애타게 찾아라. 가는 길이 언제나 평탄하다고 자랑하는 자들과, 악한 계획도 언제나 이룰 수 있다는 자들 때문에 마음 상해 하지 말아라.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 37:7 - 8a

     

    다윗이 이렇게 권면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오히려 악으로 기울어질 뿐’ (37:8b) 일 뿐만 아니라, 결국은 ‘진실로 악한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을 물려받을 것’ ( 37:9) 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이들이 이런 ‘복’을 받게 되는 걸까요?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땅을 차지할 것이며, 그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평화를 누릴 것이다.’ | 37:11

     

    다윗이 이 노래에서 ‘악인’과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 하나님께로부터 ‘땅’을 복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바로 ‘겸손한 사람’인 ‘아나빔’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하지만 본래 ‘모세’는 혈기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욱하는 분노를 참지 못해 애굽의 공사 감독관을 쳐죽인 적도 있고, 화를 이기지 못해 계명을 기록한 돌판을 집어 던진 적도 있고, 두번이나 반석을 친적도 있습니다. 그랬던 모세가 대체 어떻게 ‘온유함’을 얻을 수 있었던 걸까요? 인격훈련이라도 한 걸까요?

     

    2

    1독서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비딤’이라는 곳에 이르러 또다시 원망과 불평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물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을 시험했다’ (2)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시험의 내용은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않계시는가’였습니다. (7) 이미 홍해 앞에 내몰렸을 때, 마실 물이 떨어지고 먹을 양식이 떨어졌던 ‘신광야’에서도 자신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생생하게 경험했으면서도, 이번에도 똑같은 문제, 똑같은 상황 앞에서 다시금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다’는 불신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우리들도 똑같습니다. 시련과 고난속에서도 은혜를 힘입어 무사히 이겨냈다가도 또다시 어려운 일이 찾아오면 다시금 무너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할 뿐입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문제 안에 떨어져있을 때는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은혜를 잊은 겁니다.

    내 걸음으로 살아낸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는 겁니다. 이 말을 곱씹어 보십시오. 우리는 한걸음 살아내고 시험을 지나갈 때야 비로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살아내기 이전까지는, 문제를 지나기 이전까지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구원을 구원으로 깨닫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가 정작 물속에서도 ‘물’의 존재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정작 우리가 고난속에서 힘겨운 이유는 표징이나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데 있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또 다른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넜을 때나, 마실 물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도, 그리고 먹을 양식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마치 가나안에 도착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여전히 ‘광야’입니다. 물 없는 곳을 지나면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을 채웠어도 또다시 물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척박한 땅을 지나고 있는 겁니다. 아직 ‘가나안’까지는 가야할 길이 멉니다.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한 고비 지나 또 한 고비를 아슬 아슬하게 넘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전혀 모른채 살아갑니다. 그리곤 ‘왜 또’, ‘왜 내게’ 라는 한숨이 짙어가고, 그때마다 우리 신앙도 비틀거릴 뿐입니다.

     

    3

    ‘모세’라고 특별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못먹으면 배고프고, 마시지 못하면 갈합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굶어야 하고, 굶주림과 죽음앞에서 두려운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려 들었던 이스라엘 진중의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세가 그들과 달랐던 것이라면 아직 이 여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는 한가지 뿐입니다. 여전히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어떤 낯설은 상황앞에 내몰리게 될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지금까지 그래왔듯,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잇대어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물 없는 상황, 양식을 찾을 수 없는 곳에 이르러도, 진중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모세는 먼저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을 잃는 순간, 말 그대로 끝장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길’ 없는 곳에 내몰려도 ‘하나님이 계시면’ 나아갈 수 있고, 마실 물이 없는 곳에 내몰려도 ‘하나님이 계시면’ 해갈이 됩니다. 먹을 것이 떨어졌어도 ‘하나님이 계시면’ 살 수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도구를 통해, 언제, 어떻게 하실른지 아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여전히 하나님만 계시면 됩니다. 모세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하나님을 통해 경험했던 구원 방식에 익숙했던 사람입니다. 광야에서 생존할 수 있는 ‘구원’이라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살았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모세가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 ‘온유하다’고 했던 ‘아나브’의 핵심입니다. 

    이에 반해 오늘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내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배고프지 않음을 누리기 보다는 배고프지 않기 위해 빵을 쌓아두고, 목마름이 해소되는 기쁨보다는 목마르지 않기 위해 ‘우물’을 파내려가야 하고, 오늘도 살아 숨쉬고 있음을 감격하지 못한 채 ‘내일’을 위해 성벽을 높이 쌓아 올려야만 비로서 안심이 됩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우리의 기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우리가 만족할 만한 무엇이 있어야만 우리의 수고는 멈추어집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하나님의 위로와 평화의 말씀을 듣는 귀는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지금, 여기에 계신다는 약속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디에 계신지 증거를 찾아 헤매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 아닌, 우리 자신의 생각과 요구, 기대와 같은 구원 방식에 길들여진 탓입니다. 우리의 방식과 기준, 자신을 절대화하는 것이 몸에 베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쳐주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주님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계셨을 겁니다. 그때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주님 앞을 가로막아 섰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 마태복음 21:23

     

    ‘네 까짓 것이 하나님에 대해 무얼 안다고 떠는 것이냐’는 질책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가르칠 권한, 거룩하신 하나님을 입에 올릴 권한이 자기들에게만 있다고 여길 만큼 오만에 떨어져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에게 에둘러 이야기 한토막을 해주셨습니다. 포도원 밭에 나가 일하라고 했던 아버지의 말씀에 첫째 아들은 싫다고 했지만 뉘우치고 일하러 나갔지만 둘째는 대답은 꿀떡같이 했지만 정작 일하러 가지 않았다는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두 아들은 서로 다르게 응답했고, 서로 다르게 처신했습니다.

     

    '그런데 이 둘 가운데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 마태복음 21:31a

     

    이번에는 주님께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세 살 밖이 아이라도 답할 수 있을 만큼 어이없는 물음입니다. 자신있게 ‘맏아들’이라고 답하고 있는 그들의 표정은, 그런것도 모르느냐는 불쾌함이 베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이 하신 물음이 자신들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 조차 모를 만큼 둔감합니다. 도무지 알아듣질 못하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그들 때문에 주님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결국 노골적인 말씀을 뱉어내고야 말았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 21:31

     

    백성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이 세리와 창녀들보다 못하다니요.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은 오늘로치면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있고 존경받는 사람들일겁니다. 누구보다 기도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유력하고 거룩한 이들입니다. 지금으로치면 훌륭한 목사님들일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세리와 창녀들은 도덕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흠투성입니다. 이건 누가봐도 명백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기준을 가지고 계시고, 전혀 다른 것을 보고 계실 뿐입니다.

     

    5

    주님이 말씀하셨던 비유의 핵심은, ‘뉘우침’ 다시 말해 ‘회개’에 있습니다. 맏아들은 뉘우쳤고, 세리와 창녀도 뉘우쳤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너무나 잘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도 자신들만 말씀을 가르칠 권위가 있다고 으스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회개’라든가 ‘뉘우침’은 세리나 창녀들에게나 필요한 말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주는 ‘평판’으로 자신을 들여다볼 뿐,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도, 이유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늘상 높은 곳에만 있다보니, 이런 사람들은 배우려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앞에 서든 늘상 가르치려고만 듭니다. 이건 전적으로 ‘듣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주님께도 듣질 않습니다. 아버지 말씀에 ‘네’라고 답함으로 잘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듣는 마음’은 없습니다. 말은 번드르르 한데, 삶은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그럴 듯해 보일 수 있습니다. 저 자신도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반대로 세리나 창녀는 어떻습니까?

    늘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할 뿐, 이들은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 떨어지면 무엇만 남게 될까요? 비록 쓰리고 아프더라도 치열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 자신안에서 근거를 찾지 않고, 하나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실감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 못하다라거나, 어떤 것도 가지지 못했다고 비교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 그저 하루 하루 내게 주신 삶, 내게 주신 은혜, 내게 주신 생명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께 잇대어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비유에 등장하던 둘째 아들, 그리고 광야에서 물 없다고 불평하던 사람들은 눈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만을 향하고 있습니다.

     

    6

    ‘뉘우침’이나 ‘회개’를 단순히 도덕적 반성이나 후회같은 것으로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회개’의 핵심은 그가 ‘대제사장'인지 ‘장로’인지, 아니면 ‘세리’인지 ‘창녀’인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요구에서로 다르게 응답했던 두 아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현실로 찾아온 하나님 나라 앞에서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에 달려 있는 겁니다. 

    지난 주일 지하철을 타고 서울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일이 있었습니다. 올라 갈때는 자리가 있어 좋았는데, 내려올 때는 자리를 잡지 못해 내내 서있어야 했습니다. 지쳐가고 있었지만 좀처럼 자리가 나질 않았습니다. 어쩌다가 자리가 나도, 순식간에 달려든 사람들에 치여 바라만 볼 뿐입니다. 한참을 그렇게 내려오다가 드디어 제 앞에 자리가 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다리도 아프고 힘들었지만 어떻게 해서든 앉아야 하겠다는 간절함도, 다른 사람보다 먼저 앉아야한다는 조급함도 전혀 생기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다음 정거장에 내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이야기이지만 이처럼 지금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중임이 분명하고, 더욱이 내려야할 목적지가 선명해지면,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하나 불안함이나 염려, 조급함에 내몰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종말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익숙해지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내고,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더 길들여지고, 익숙해지고, 친밀해지는 이 관계성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참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듣는 것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듣는 마음’에 있습니다.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아무리 많이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13.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 빌립보서 2:12b- 13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을 소망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하는 능력 조차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했습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께 듣고자 하는 마음을 성령께 구하십시오. 그분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에 길들여지는 ‘온유한 사람’으로 빚어 가실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 자신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아멘.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