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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2 성령강림후 스물 네번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3. 11. 9. 16:28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여호수아 24:1-3a, 14-25 혹은 아모스 5:18~24
응송 | 시편 78:1-7
2독서 | 데살로니가전서 4:13-18
3독서 | 마태복음 25:1-13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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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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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팃소, <열처녀 이야기> 위태로운 사람들
1
오늘 성서일과 말씀들이 던지고 있는 공통적인 물음은, ‘과연 절망중에 소망을 품을 수 있는가’입니다.
성서 안에는 두개의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간입니다. 성서 텍스트 자체는 이 흐름에 따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지창조로부터, 노아, 아브라함과 족장들, 출애굽, 왕조이야기, 패망사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대로 우리는 성경을 읽게 됩니다. 두번째 시간은 미래로부터 과거를 반성하는 시간입니다.
성경 이야기의 대부분은 성서기자나 사관이 당시의 정황이나 사건을 시간순서대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있었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결국 역사라는 것이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대로 씌여졌음을 깨달았던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성서기자들입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들은 현실의 나락으로 추락해버린 민족 공동체를 향해, 오늘도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삶을 돌이켜 반성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씌여지는 방식입니다.
오늘도 힘을 다해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해낼 수 있다면 오늘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일을 통해 우리가 해야할 것은 ‘배우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고난이나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일어나는 것을 어찌할 수는 없지만, 그 저 흘려보내지 않고,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배워내는 겁니다.
신명기가 모세의 설교문이라면, 오늘 함께 읽은 1독서 본문 여호수아 24장은 여호수아의 마지막 설교라고 보면 됩니다. 새로운 광야 행진을 앞두고 시내산 언약으로 공동체를 초대했던 모세처럼, 가나안에서의 새출발을 앞두고 ‘세겜’ 땅에 도착했을 때 여호수아도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 관계안으로 공동체를 초대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세겜에서의 언약갱신’, 또는 ‘세겜언약'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대로 1독서를 읽었지만, 성서학자들은 두번째 시간의 흐름안에서 본문은 이해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가나안 입성으로부터 대략 천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바벨론 포로기에 있던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고백이 됩니다. 바벨론에 의해 패망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쩌다가, 그리고 왜 우리는 이런 현실에 떨어졌을까? 끊임없이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반성했습니다. 그 신앙적, 신학적 반성과 통찰의 결론은 명백합니다. 천년전 여호수아의 촉구에 ‘우리도 하나님만을 믿겠다’고 응답했던 ‘세겜’ 언약을 지켜내지 못한 탓입니다.
‘당신들은 주님을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 여호수아 24:19b
'결코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던 여호수아의 우려는, 신앙에서 패망했던 이스라엘의 최종적 역사해석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들도 우리도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에서 실패했습니다.
2
1독서 구약 본문을 통해 깨달아야하는 것은, 복음서안에 담긴 주님의 말씀입니다. 슬기로운 다섯처녀이야기, 혹은 열처녀 이야기라고 알려진 예수님의 비유이야기입니다. 신랑일행을 기다리다 지쳤던 열처녀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도착시간이 한참을 지났는데도 여전히 신랑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다리던 처녀들은 졸음에 빠져들었고, 그 와중에 기름도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다섯 처녀는 준비한 기름을 채웠지만 이런 상황을 미쳐 예상치 못했던 나머지 다섯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부랴 부랴 기름을 구입하러 나갔다가 돌아왔지만, 아뿔사 그 사이에 신랑일행이 도착했고 이미 주인에 의해 잔칫집 문은 굳게 잠기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속에 주님의 의도를 바르게 읽고 집중하지 못하도록 시선을 흐트러지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난처한 상황에 떨어진 친구들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한 슬기로운 처녀들이나, 시간이 좀 늦어졌다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주인의 냉담함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준 태도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로 판단하면 곤란합니다. 이들을 통해 오히려 우리는 그들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만 읽어내면 됩니다. 이미 일어난 상황은 되돌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도 대신해 줄 수도 없습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다함께 있는 것 같아도 주님과 맺고 있는 관계의 친밀성은 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관계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모두가 제 몫일 뿐입니다. 제가 목사라고 해도, 여러분 대신에 주님과 만나드릴 수는 없고, 부모라 하더라도 자녀 대신에 만나줄 수 는 없습니다. 그것이 종말에 우리 각자가 맞이하게 될 운명입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당시의 교회는 비유에서 읽은 것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곧 오시겠다던 주님의 재림은 자꾸만 지연되고, 사도들도, 재림을 고대하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고난과 박해는 여전합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에서 이탈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신랑 일행을 기다리다 지쳐 졸음에 떨어진 처녀들처럼, 다시 오신다던 주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감이나 믿음도 무뎌지게 된 겁니다. 이제 그런 날은 올 것같지 않고, 재림은 어느새 전설이 되고 말았습니다. 현실의 시간이 전부인 것처럼 휩쓸린 채 살아갈 뿐, 지금도 시간이 가고 있다는 사실이나 그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독서에 등장한 출애굽 공동체나 비유속의 처녀들, 초기 교회의 모습을 섣불리 신앙의 실패, 믿음없음으로 단정지으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은, ‘무엇 때문에? 이들이 실패했는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믿는 일에 실패했던 겁니다.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처해진 역사안에서 하나님 외에도 애굽이나 가나안, 바벨론의 신도 필요로 했을 뿐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다섯 처녀가 신랑 일행을 기다리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도 졸음과 싸우며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초기 교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믿음에서 떨어진 이들이 예수의 재림을 믿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십자가와 부활, 다시 오실 예수를 믿었습니다. 본문속에 등장한 이들에게 일어났던 치명적인 문제는 따지고보면, 그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있었지만, 자신들을 둘러싼 열강의 정치적 혼돈과 역사의 소용돌이가 그들을 삼키고 말았습니다. 신랑일행이 제 때에 도착하기만 했다면 다섯 처녀가 곤란해질 상황 같은 것은 애당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곧 오시겠다’던 말씀 대로 주님이 오셨다면, 믿음에서 실족한 사람들이 있을리 없고, 오늘 우리가 치열한 신앙의 투쟁 가운데 내몰릴 이유도 없습니다.
3
그러나 여전히 성경은 ‘하나님만을 믿으면 살것이고, 하나님만을 믿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현실의 상황 안에서, 주의 재림의 지연이라는 형편을 극복할 능력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답을 세상이나 어떤 성공한 이들이 아니라, 반드시 이천년 기독교 역사안에서 믿음과 신앙을 지키며 살아냈던 이들로부터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 전통을 따르는 것이야 말로, ‘사도적 전통’위에 교회를 세워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요즘의 교회는 다른 답을 찾습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답을 찾기 위해 신앙의 중심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갔던 그들의 이야기 대신에, 자꾸만 세상에서 배운 풍요와 성공 같은 것들을 통해 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외에 다른 신들을 필요로 했던 과거의 그들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비틀거리고, 아파하고, 쓰러지던 때라고 해서, 우리에게 믿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또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리고 그저 ‘주님만’을 믿는 일에서 실패했을 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불안과 두려움에서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건져줄 수 있는 또다른 무언가를 찾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우리의 충만이 맞고, 주님이 우리 생명의 전부라고 한다면, 왜 우리는 주님께 묻고, 주님께 듣고, 주님께 배우려들지 않고, 하나님만을 찾는 일에는 소홀한 걸까요? 우리는 의외로 ‘주님 한분만이면 충분하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지도, 믿지도 못합니다. 이유는 비교적 명확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혜, 주님을 믿을 때 부어지는 채움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채우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충만’을 경험해본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부족한 것도, 바라는 것도, 내몰린 상황도 모두 상대화되는 능력을 경험해야만 하는데, 오늘도 여전히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공해야하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교회가 성장해야하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 개발을 해야하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해야할 것들이 많습니다.
‘이천년전 그들이 어떤 식으로 살았더라’는 도전은 있는데, 정작 무엇이 그들이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했던 것인지와 같이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했더니 문제가 해결되었고, 그런 식으로 했더니 병이 나았고, 그런 식으로 했더니 자녀들이 성공했고, 그런 식으로 했더니 교회가 성장했다는 식의 이야기만 난무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근거 삼아, 예수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은 성경에서 지워진 것같습니다. 과연 예수께서 다시 살아돌아오신다면, 바울이 다시 살아돌아온다면, 웨슬리 목사가 다시 돌아온다면 우리가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할까요?
4
우리에게 최선은 무엇일까요? 이천년 기독교 역사를 지탱해 왔던 핵심은 이 말씀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마태복음 25:1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 때문에, 앞으로 한잠도 자지 않으며 밤을 지새우겠다고 하실 분은 없겠지요. 하루 이틀 정도면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신랑이 얼마나 늦어질는지,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턱대고 밤을 지새우다가는, 정작 중요한 시간에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들 수도 있습니다. 사실 주님 말씀안에서도 열처녀 모두 졸음에 떨어졌습니다.(5b) 다만,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잠을 자지 않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기름을 준비한 것이야 말로 ‘깨어있으라’던 주님의 말씀의 핵심인 셈입니다.
여기에서 ‘기름’이 정확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신랑이 올 때를, 누구도 정확히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쉽게 초조해지거나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말씀이 단순히 깨어있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경고라고 한다면 너무나 가혹합니다. 마치 구원에 대한 모든 책임을 너희 자신이 짊어지라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다시한번 찬찬히 읽어보십시오. 신랑되시는 주님께서 어떤 이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걸까요? 그렇습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주님이 아닌 세상에 타협하며 살아가던 시대에도, 여전히 오실 주님께 인생을 걸고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깨어있는 교회를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통해 다함없는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주어진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의 시간으로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인 우리, 성도인 우리가 나누고 있고, 또한 나누어야 할 ‘위로’는 이 것 뿐입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 살전 4:17 -18
바울이 초기 교회 공동체와 함께 나누었던 이 위로가, 이천년이 흐른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큰 위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며, 그분이 함께 하심이 ‘위로’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그날!’에 있습니다. 고단한 인생이라고 하더라도 오늘 우리는 주어진 삶을 감당하고 인내하고 버텨내야 합니다. 그날이 올 것임을 기억하고, 의식을 집중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다고 무엇이 바뀌고, 그렇게 산다고 무엇이 달라질까요? 신랑은 또 언제 올까요? 오기는 할까요? 이런 물음과 의심은 그토록 기다리던 신랑이 도착하고, 잔치가 시작되는 순간에 무의미해질 겁니다. 우리는 그 기쁨을 이미 맛본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삶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다시말하면, 바로 내일이라 하더라도 이 세상이 완전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생명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다 알 수 없는 방식, 이해하기 어려운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그날은 이미 문 앞에 와있습니다.
이제 큰 기다림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대림의 절기를 준비하는 우리의 기대안에서, 지난 한해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구원까지 길어올리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에 마음과 영혼과 삶을 집중하며 살아가십시오. 그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것이 주 안에서 깨어 있는 삶입니다. 눈을 뜨고 보면 어느새 그 날은 도적같이 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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