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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11/19 성령강림후 스물 다섯번째 주일 (* 추수감사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11. 16. 09:47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사기 4:1-7  혹은 스바냐 1:7, 12~18

      응송 | 시편 123

    2독서 | 데살로니가전서 5:1-11

    3독서 | 마태복음 25:14-30

     

    # 설교음원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 설교영상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

     

    다 여문 밀밭 Jules Bastien-Lepage The Ripened Wheat 1880 oil on canvas 50.5cm x 105cm ⓒMusee de Guezireh

     

    '주인'을 오해한, '종' 이야기

     

    # 01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을 한 없이 인자한 아버지처럼 믿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마치 밀린 빚을 추궁하는 무서운 채무자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한 없는 은혜와 사랑에 감동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업적과 성과를 강요하는 우상처럼 두려워합니다.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데, 말씀을 어떻게 읽고 대하는지가 다르니, 결국 이런 차이가 만들어지게 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오해하거나 왜곡되면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고, 그렇게 된 인생과 삶은 쉽게 무질서해지고 한번 깨어진 삶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여러분이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상투성’에 떨어져 성경을 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할 수 만 있다면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하고, 더 깊이 나아가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님 역할을 해주셨으니, 이제 우리가 응답해야할 차례입니다.

     

    # 02

    오늘 복음서 본문 같은 경우가, 상투적으로 읽고 마는 대표적인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걸까요? 많은 경우에 이 본문을 ‘은사론’이나, ‘사명’에 대한 말씀으로 갈무리한 채, 덮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교양이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얻기 위해 읽습니다. 한 구절의 말씀이라도 그 안에서 ‘생명’을 길어올리지 못한다면 말씀이라고 할 수 없고, 아무리 그럴싸 해보인다고 해도 주님의 의도와 다른 본문 읽기는 영혼을 살리고 삶을 풍성히 길러올리는 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떤 식으로 본문을 오해하고 있었는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우선 첫번째 생각해 볼 것은, 주인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분명 본문에는 1, 2, 5달란트 받은 종들이 등장합니다. 명백히 차별처럼 보이실 겁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결코 주인이 불공정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섣불리 주인에게 불만을 가지는 이유는 종들이 받은 달란트의 가치를 실감하지 못한 탓입니다. 달란트는 금 33kg, 약 8,800 돈입니다.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 여러분에게 아무 조건없이 이런 돈을 준다면 ‘왜 이것만 주느냐’고 불평하시겠습니까? 게다가 주인은 ‘각 사람의 능력’에 맞게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습니다.(15) 그런데도 우리는 저마다 능력이 다르다는 사실은 모르는 채하고, 주어진 것이 다르다는 사실에 주인을 타박하려 듭니다. 제 분수를 벗어나는 것을 성경은 탐욕이고 ‘죄’라고 합니다.

    두번째, 2, 5달란트 받은 종들은 열심히 일해서 둘다 갑절의 결과를 얻었고,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됩니다. 자칫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던가, 능력만 있으면 인정받는다는 식으로 읽기 쉽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주인이 맡긴 엄청난 자본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서 돈을 불렸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애당초 이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성공하라는 비법을 전수하거나, 공정하고 정직하게 살라는 교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을 읽고 ‘최선을 다해 결실하는 삶을 살자’는 식의 구호로 그친다면, 예수님과 전혀 관계 없는 엉터리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겁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먼저 고려해야할 것은, 이 비유 이야기가 놓여진 본문의 위치입니다. 본문의 앞단락인 1 ~13절까지는 지난 주에 읽은 ‘열 처녀의 이야기’가 있고, 본문의 비유를 지나 뒷단락인 31 ~ 45절 까지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리고 본문까지 포함해서 이 세가지 비유들은 모두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지난 주일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서 본문은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과 신앙의 위기로 떨어진 신앙 공동체를 향해 주어졌습니다. 이 비유를, 주의 ‘재림’과 ‘심판’이라는 특별한 상황안에서 읽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03

    사실 오늘 비유에서 중심에 있는 인물은 주인과 더불어 한 달란트 받은 종입니다. 2달란트나 5달란트 받은 이들을 똑같이 대하시는 것을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한 달란트 받은 종이 했던 말이나, 취했던 행동을 유의깊게 읽어보셔야 합니다. 당시 유대에서는 귀중한 보화나 재산을 땅에 묻어서 보관했다고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주인으로부터 받은 돈을 고스란히 땅에 묻어두었다가 가지고 왔습니다. 그가 한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 받은 이들과 달리 선택을 했던 이유에 있습니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 마태복음 25 24b ~ 25a

     

    종은 자신의 주인을 ‘굳은 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굳은 분’이라는 이 말은 ‘모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종의 말은, 주인이 모진 사람이라 두려웠기 때문에 잘 지키는 쪽을 택하였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 동안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던 탓에, 우리는 주인이 심지 않고 뿌리지 않는 사람이라던 그의 말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흘려 들었습니다. 하지만 불한당이나 불법을 자행하는 이들처럼 남의 것을 강탈하고 빼앗지 않는다면, 심지도 않고 뿌리지도 않고 거둘 수 있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종이 자신의 주인을 아주 몹쓸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셈입니다. 그가 책망받게 된 선택을 한 이유도 모두 주인을 그릇되게 해석했던 이 판단에서 비롯된 겁니다. 명백한 오판입니다. 모질고 악한 주인이 역량에 따라 종을 인정하고, 이런 무모한 투자를 했을리가 없습니다. 그는 제 생각대로 주인을 판단했던 탓에 주인의 신뢰와 선물처럼 주어진 기회를 몽땅 달란트를 땅에 묻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실제로 주인이 자신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했었는지와 관계 없이 순전히 제 생각에 치우친 결과입니다. 

     

    이제 비유에 등장한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로 돌아가 봅시다. 본문속에서 우리는 종들이 남긴 갑절의 결실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선은 하나님은 결실을 거두는 능력이 있으면 인정하고 칭찬하시는 분이라는 오해로 우리를 밀어트리고 맙니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어찌보면 우리는 신앙을 통해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는 장사꾼처럼 행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만큼 봉사하고, 이 만큼 열심히 했고, 이 만큼 기도했고, 이 만큼 헌금했으니, 그 만큼은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만큼 했으니 그 만큼 달라는 식이랄까요? 심지어는 천국도 그런 수준에서 기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기준과 요구에 굴복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주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은 29절입니다.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 마태복음 25:29

     

    얼핏 들으면 능력있는 이들만 인정하는 불공평하고 자비 없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건 하나님의 셈법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주인이 자신의 것을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셈법과는 무관하게, 자꾸만 이런 저런 무거운 짐을 짊어집니다. 이렇게도 하고 저런 것도 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나 만큼은 해야하지 않겠느냐’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짐을 지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께서 다시 오시고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이 땅에서 무거운 짐을 강요하던 모든 기준은 깨어지고 무효화될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기대와 전혀 타협하지 않는 철저하게 배타적인 나라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을 뿐입니다. 

     

    # 04

    1독서 본문인 ‘사사기’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악한 일을 저지르자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내주셨습니다. (사사기 4장 1~2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소유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의 손에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엎드려 회개하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야빈’이 가지고 있던 막강한 철병거와 군대를 모두 ‘바락’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가나안의 왕 뿐만 아니라, 천하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니 가능한 일입니다. 찬찬히 그리고 한눈에 역사를 들여다보면, 놀랍기만 합니다. 망한 것 같지만 살아있고, 영원할 것 같았지만 먼지처럼 흩어지기도 합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소한 일들로 역사가 바뀌기도 하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역사가 시작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처음과 마지막, 역사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고 살고 죽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들이라면, 이것들은 우리에게 좋은 걸까요? 나쁜 걸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지만, 그것을 어떤 것으로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 자신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삶의 조건이라도 어떤 사람은 원망거리로, 어떤 사람은 감사와 은혜의 이유로 삼습니다. 좋은 것으로 받을 것인지 아닐 것인지는 우리 몫인 겁니다. 

    낮잠 Van Gogh Noon -Rest from work 1890 oil on canvas 73cm x 91cm ⓒ오르세 미술관

    이것은 ‘때’에 관한 우리의 물음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성도들이 ‘대체, 언제까지 입니까’ 하나님을 향해 올리는 눈물의 기도는 종말의 그날까지 멈추질 않습니다.(요한계시록 6:10) ‘지금’은 가혹하고, ‘내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날’에 대한 갈급함이 크다는 것은 한편으로 주어진 오늘, ‘지금’을 소홀히 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지나고 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없음'이, 어느 순간이 되면 ‘느닷없는 일’로 드러나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만 보아도 이건 명백합니다. ‘언젠가 미래에는’이라며 재잘 거리던 터무니 없던 어린 시절의 꿈들이 현실이 된 오늘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루 빨리 어른이 되어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다고 투덜 거리던 십대의 그날과 오늘은 마치, 눈 한번 깜빡한 찰라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눈을 뜨고 보니, ‘오늘’인 셈입니다. 누구나 지나온 시간이지만, 오늘을 마음에 두고 하루 하루 꿈을 이루어온 사람과 어느덧 지금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마주하는 ‘오늘’이 똑같을리가 없습니다. ‘주의 날이 도둑처럼 온다’던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이런 차원에서 실감이 납니다. ‘도둑같이 임한다’는 말은, 현실에 파묻혀 잊고 있던 그날,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체념하고 포기했던 일들이 ‘느닷없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생태 사진작가라면 누구나 찍고 싶어하는 동물이 있습니다. 멸종위기에 있는 ‘눈 표범’입니다. 개체수도 적지만 ‘히말라야’라고 하는 거친 환경에 서식하다보니, 뒤를 쫓는 방식으로는 평생을 쫓아다녀도 못찍는 이들도 허다합니다. 그래서 눈 표범을 찍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녀석들이 지나친 흔적있는 곳에 몇날 몇달이고 렌즈를 고정해두고 기다려야만 합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칠 때 즈음, 끝까지 기다린 사람만 단 한장의 사진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지난 주일에 함께 읽었던 열처녀 이야기에서 ‘깨어 있으라’던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이겁니다. 깨어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밤이 새도록 일나갔던 어머니를 밤이 새도록 기다리다 지쳐 잠에 떨어진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오셨는지 아침상을 차려놓고 일어나라 깨우는 어머니 소리에 눈을 뜨는 순간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겁니다.

     

    # 05

    ‘불안감’이나 ‘두려움’에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마태공동체나 ‘데살로니가’ 처럼 초기 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날’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승천 이후 이천년이 지난 오늘,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된다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마치 깊은 잠에 떨어진 것처럼 ‘그 날’에 대한 이야기 마저 까마득히 잊고 있습니다. 그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는 무엇을 해야할까? ‘그날’과 그 날에 오실 ‘주님’과는 무관하게 우리 자신의 업적을 쌓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거나, 혹은 못들은 척 외면한다고 해도 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던 그 주님께서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면, 이 정도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업적과 이 쯤은 해야한다는 기준들이 모두 해체되고, 하늘 나라의 주인이신 그분만의 기준, 그분만의 셈법으로 우리는 모두 판단을 받게 될 겁니다.

    추수 철 Harvest time 1887 oil on canvas ⓒRussian Museum

    오늘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한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에 그치지 않고, 오늘처럼 ‘추수’의 날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농사를 그치고 ‘추수’를 하게 되는 날이 온다고, 모든 이들이 기쁨에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시류에 물들지 않고 깨어 주님과 함께 살아온 이들에게 그 날은 ‘기쁨의 날’이라는 겁니다. 그날은, 주님에 의해 ‘참된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 받는 날, 죄와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해방을 경험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날이 되면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 주시는 아버지시라는 것을 온 몸으로 실감하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의 날이 오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으로 인해 그 날은 이미 문 앞에 와있습니다. 졸지만 않는다면 ‘쾅쾅’ 시대를 향해 문을 두드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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