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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4/14 부활절 셋째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4. 10. 18:49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도행전 3:12 - 19

     응 | 시편 4

    2독서 | 요한일서 3:1 ~ 7

    3독서 | 누가복음 24:36b ~ 48

     

    # 설교음원

    http://naver.me/FzQa5Reu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0KXA93ZRyWk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St. Peter Preaching the Gospel in the Catacombs by Jan Styka

     

    우리가, 이 일에 '증인'입니다

     

    1

    아마도 교회력 본문으로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이라면, 요 몇주간 힘겨운 씨름을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부활’에 관한 설교는 ‘부활절’에만 하고 그치는데 반해서, ‘성령강림절’이 오기 전까지 ‘부활’에 대한 설교를 계속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부활’에 대한 공부가 쌓여갈 수록 생명 사건의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으니, ‘복’이요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늘상 입버릇처럼 말씀드리지만, 신앙은 관념이 아닌 삶으로, 타성이 아닌 감동과 감격으로 고백되어야만 합니다. ‘부활’에 관한 소식에 머무는 것이 아닌 ‘부활’이 능력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겉으로는 똑같아 보여도, '부활' 신앙을 살아가는 사람의 내면은 자족함과 평화로 가득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이시라는 사실에 운명을 걸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현실성, 그것만이 삶을 무너트리고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힘을 거스르고 자유와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 주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모쪼록 부활절의 기간동안,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비밀스러운 방식을 통해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궁극적인 생명 사건을 이루고 계시다는 믿음위에 세워져 가시기를 빕니다.

     

    2

    1독서 사도행전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은 사도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이후였기 때문인지, 베드로의 목소리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수를 잡아 죽이고 자신을 포함한 무리들도 해코지 하려던 유대인들 앞에서 이런 설교를 한다는 것은,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을 경험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는 일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의 걸음이란, 이처럼 늠름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 사도행전 3:15a

     

    베드로의 설교는 대단히 날카롭습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고 그들의 죄를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그럴듯한 말을 덧붙이기는 하지만 목사가 하고 싶은 말의 명분과 근거로 사용되는, 이런 비슷한 분위기의 설교가 넘쳐납니다. 그런 설교는 듣는 이들의 영혼을 파괴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 | 19절

     

    ‘설교’를 빙자해 목사 개인이 하고 싶은 말을 꺼내놓는 이들과 달리, 베드로는 설교안에서 자신을 전혀 드러내질 않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떳떳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주님이 잡히시던 그 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그 날에 배신으로 곤두박질쳤을 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는 이들을 정죄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저 새롭게 변화된 삶으로 자신을 초대해주신 부활하신 주님을 이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만 간절합니다. 그래서 잔뜩 날이 선 칼처럼 날카롭게 들리지만 그의 설교는 들춰내고 훈계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외쳐지고 있을 뿐입니다.

     

    3

    베드로가 외친 설교의 핵심 메시지는 15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 15b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이 말씀을 오늘 우리야 거리낌 없이 고백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말씀은 당시의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신앙 밖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터무니 없는 헛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 부활의 소식’이 이런 겁니다. 부활의 복음을 전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부활’을 이해할 수 있고 설득력있는 방법으로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이건 당연한 겁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애당초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무지해서 인지, 실제로는 우리도 믿는다고는 해도, 부활의 현실성이 아닌 교리적 고백에 머물때가 많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시고, 또 어떻게 일하실까요?’ 아마도 문제가 해결되고, 병고치고, 장애를 극복하게 되는 것, 아니면 전도가 잘 되고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떠올리실 겁니다. 이런 것들이 필요없다거나 이런 것들을 구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평안과 행복을 위협하는 현실의 대부분의 문제들이 이런 것들이니까요.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단지 우리가 이 땅에서, 세상을 좀더 편하고 만족스럽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들일 뿐임을 알게 될 겁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리지만 굳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도 이런 것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세상안에서 공평하게 땀흘리고 수고하면서 이루고 누려야 될 일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수고함없이 거저 하늘에서 툭하고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자꾸만 이런 수준에 머물게 되면, 오히려 하나님이 결국 돈벌이나, 성공, 세속적 만족을 얻기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더 본질적인 것을 지향하고 질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셨다’는 사도 베드로의 말을 곱씹어 보십시오.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이 일’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것, 곧 ’구원’을 말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구원’에서 인간의 모든 노력은 배제됩니다.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하고,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한다고 해도, 결국 그런 것들로 ‘생명’을 지켜낼 수 없고, 그런 것들로 생명을 대신한 만족을 얻을 수는 없는 것처럼,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을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으니 그래서 ‘은혜’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이 실감나시는지요?

     

    4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 15c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던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요?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느냐는 논외로 하고, 과연 우리는 자신을 부활의 증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예수 부활’의 핵심이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도했느냐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신다’는 신앙경험에 있다면, 어떤 면에서 오늘 우리는 ‘증인’이라기 보다는 ‘소문’을 전하고 수군거리는 쪽에 가깝지는 않을까요? 하지만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주눅들지는 마십시오. 여전히 성경은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지지해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부활’을 듣고 믿을 수 밖에는 없는 처지이지만, ‘하나님께서만 구원하신다’는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활의 증인들이나 우리들이나 동일한 사실을 증언하는 ‘증인’들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부활’을 사실로 보았는지 혹은 보고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사실에 마음이 움직이고, 주어진 삶에서 그 말씀이 참으로 옳다고 ‘아멘’으로 동의되어지는 삶을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돈’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오늘 같은 세상에서 비교에 내몰려 주눅들지 않고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에 의지해 풍성한 기쁨과 평화를 길어올리며 살아갈 수 있으신지요?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런 식의 구원이야 말로 참되고 진실하다고 세상을 향해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 사도는 서신서 말씀에서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말을 습관처럼 말하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여러분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실감하고 계십니까? 또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따지고보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말처럼 아득한 것이 또 없습니다. 이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조차 볼품없고 비루해 보이고, 스스로도 인정해주지 못하는 우리가 천지의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의 자녀라니요? 정말 이 말씀을 실감하며 살아간다면, 서슴없이 교회 밖의 사람들을 향해 ‘악마의 자식’이라는 막말을 내뱉거나, 불친절하거나, 미춰하지는 못할 겁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만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으스대지도 않을 겁니다. 나를 자녀삼아주신 것은 전적인 은혜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비록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자연스레 신앙을 가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만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한 거리감과 반감이 우월의식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타인들에 대한 시선은 거두고, 우선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향해 먼저 질문해 봅시다. 과연, 우리는,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무어라고 하실까요?  나 자신을 향한, 이런 물음 앞에서 정죄감 때문에 쭈볏거리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죄’에 대한 부담감 때문입니다.

     

     

    5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는 악마에게 속해 있습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짓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 요한일서 3:8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다거나, ‘죄를 짓는 자는 악마에게 속해 있다’는 이런 식의 말씀은 우리를 실족하게 할 만큼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씀에 걸려 스스로는 아직 구원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속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신앙적 회의에 떨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애써 모른 척 무시하면서 지나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미 요한 사도는 앞선 1장에서 오늘 본문인 3장에서 말한 내용과 완전히 모순되는 말씀을 말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 요한일서 1:10

     

    이건 여전히 우리 자신은 죄를 범하는 ‘죄인’임이 분명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걸 아닌 척하고 않 그런 척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지금 요한 사도가 한편에서는 ‘죄인’이라고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는 이게 지금 같은 저자가 기록한 같은 책에 담겨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물론 우리가 어느 정도 노력하면 남에게 나쁜 일은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을 행하는 것만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단지 일반적인 윤리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훨씬 근원적 차원에서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련되게 변한다고 해도 여전히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처럼, ‘죄’는 우리의 존재 자체에 관한 문제일 뿐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이나 예수 믿은 이후나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과 원수된 길로 치우치고 마는 ‘죄인’일 뿐입니다. 신앙을 가진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가 지난 길에 ‘죄’의 결과와 흔적이 남는 것은 우리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요한 사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죄를 용납해주셨으니, 이후부터는 우리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시겠다는 의미인 겁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죄에 떨어질까 전전긍긍하거나, 반대로 죄를 짓지 않을 것처럼 스스로를 억누르는 가식에 떨어지지 않아도 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서 멍에가 벗겨지고 ‘죄’의 모든 강요로부터 벗어나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요한 사도는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6

    ‘죄’로부터 벗어난 ‘하나님 자녀’에게 나타나는 삶의 증거들에 대해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하여 이러 희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합니다.’ | 요한일서 3:3

     

    이 말씀을 그저 교회 다니고, 정직하고 순결하게 살아가는 신앙이나 삶 정도로 생각하시면 않됩니다. 그러면 또다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겁니다. 이 말씀은 ‘스스로를 구원해 내라는 세상의 작동원리’가 아니라, 온전한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만을 믿으며 나아가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라는 겁니다. 그 길에서만 우리는 구원을 경험할 수 있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증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거짓 증인도 있고, 때로는 ‘확신범’처럼 망상에 떨어진 증인들도 있습니다. 앞선 이들이 거짓을 말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횡설수설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그저 주워 들은 풍월 뿐, 그것을 증언해 낼 힘도 없거니와 그렇게 살아내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부활의 증인이었던 제자들이 살과 뼈를 지닌 분으로 예수님을 경험하는 '부활의 현실성'안에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부활'을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시는 구원으로 경험한 사람만 하나님의 일에 대한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는 메시지를 붙들고 살아가십시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영원히 사는 길이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우리를 불러 주셨고, 또한 자녀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의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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