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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4/21 부활절 넷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4. 17. 15:16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도행전 4:5 ~ 12

      응송 | 시편 23

    2독서 | 요한일서 3:16 ~ 24

    3독서 | 요한복음 10:11 ~ 18

     

    # 설교음원

    http://naver.me/GDNM0TB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BnuDWzuonZM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What Our Saviour Saw fro the Cross, James Jacques Joseph Tissot (1836 - 1902 ), Gouache, 1886 - 1894, The Brooklyn Museum

    부활과, 사랑 능력

     

    # 01

    지난 주에 이어, 1독서로 사도행전을 읽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했던 사도 ‘베드로’의 담대한 모습이 이어집니다. 지금 그는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를 재판하는 대제사장 안나스, 가바야, 요한, 알렉산더 같은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유대의 유력자들입니다. 이들은 다름아닌, 예수를 십자가로 내몰았던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의 서슬퍼런 권위가 두려워 베드로는 세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주눅이 들만도 한데, 지금 그의 입에서 외쳐지는 말씀은 담대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 사도행전 4:12

     

    그는 이전에도 주님을 따랐던 제자였습니다. 그것도 그냥 뒤따른 것이 아니라, 수제자였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려내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어쫓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서 주님을 따르면서도 여전히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놀라운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을 뿐, 정작 자신 앞에 계신 주님이 세상보다 큰 하나님의 나라를 담고 계신 분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세상보다 크신 분과 함께 하면서도, 세상에서 호령하던 이들이 두려워 실족했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이전의 베드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 그 자신이 더 훌륭해지거나, 더 큰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는 주님과 함께 하면서도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해 쭈볏거릴 수 밖에 없었고 세상의 권세 앞에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지만, 부활을 경험한 이후로, 이제야 그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은 힘이 있고, 대제사장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당당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하나의 사실로 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 02

    이제야 ‘베드로’가 주님을 잘 알게 되었다는 말씀을 전하다보니, 문득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만일 누군가 여러분에게 사랑하는 어떤 이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을 받는다면 어떨까요. 그 또는 그녀에 대해 얼마나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분명히 여러분이 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보다는 여러분의 가족에 대해 훨씬 더 상세하고 자세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을 겁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라면 아마도 밤이 새도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주님은 어떤 분이신지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받으시면 어떨까요?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어디 한번 밤이 새도록 한번 이야기해보자고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몇마디 대화로 밑천이 드러나고 말까요?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요? 이런 질문을 괜시리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서 이야기안에 이런 우리의 마음을 철렁이게 할 만큼 대단히 위험천만한 주님의 말씀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 요한복음 10:14

     

    ‘예수님’을 아는지 모르는지가, 우리 자신이 과연 예수님의 양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기준이라는 말씀입니다. ‘알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기노스코’는 히브리어 ‘야다’에 대한 헬라어 번역어입니다. 단순한 정보로서의 앎이 아니라, 말없이 눈빛만으로도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의 ‘앎’, 내가 너에 대해 알고 있듯, 너 또한 나를 알고 있는 그런 사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그 동안, 주님과는 무관하게 우리 좋을 대로 예수님에 관해 잘 알고 있다고, 혹은 잘 아는 사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 03

    재판중에 있는 베드로의 변론을 좀더 꼼꼼히 들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피의자로 불려왔던 그에게 던져진 물음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상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특권을 드러내길 좋아합니다. 상대를 윽박지르고 폭력적인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어, 때로는 가진 것으로, 때로는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그런 것으로 자신을 감추고 덧씌우려고 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덧씌어진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덮고 있는 ‘참된 권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 사도행전 4:10b

     

    아픔과 절망, 귀신의 힘이나 죽음 조차도 굴복시키는 권위의 정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이라도 이 이름을 힘입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 있으니, 자신이 아닌 그 능력이 구원했다는 베드로의 진술은 참입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 사도행전 3:6

     

    하지만 이 권위는 베드로 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그의 믿음을 통해 발현되고 있습니다. 성전 앞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어떤 이를 일으킬 때도, 베드로는 이 이름의 능력을 힘 입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무슨 주술처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당시에도 주님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흉내내어 그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으려고 하던 유대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 사도행전 19:15-16

     

    그 이름으로 명령했지만, 오히려 그들은 귀신에 의해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 04

    허기사 지금 우리 가운데에서도 이 사실을 오해하여, 이방인들처럼 그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닌, 인격을 대변하는 것처럼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지는 겁니다. 실제로 누군가를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 때로부터 이름으로 불린 대상을, 이것, 저것 혹은 그들이 아니라 나와의 사이에 매우 특별한 관계안에 있다는 메시지를 담게 됩니니다. 베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무엇을 얻거나, 무엇을 해야겠다는 식의 도구로 그 이름을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 이름은 그에게 세상에 하나 뿐인 이름이고, 그 이름은 그에게 단 한분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베드로 자신은 늘 그분과 함께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바로 그 이름으로 불리우는 무리들인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사용하는 이들이 아니라, 그 이름 안에서, 그 이름과 함께 존재하는 이들임을 드러내는 겁니다. 적어도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아멘’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그때마다 ‘그 이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사실은 그 사람을 아는 것이며,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와 하나가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의 이름으로 여기에 모였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당신을 아는 사람들만 당신의 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요?

    이 질문에 먼저 답변해보세요. 율법이나 계명 같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때 어떤 생각이 먼저 드시나요? 영혼의 ‘양식’이나 하늘로부터 내리는 ‘복’된 말씀으로 들리시나요? 아니면 혹시 무거운 짐처럼 여겨졌던 적은 없으셨나요?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법’이라고 하면 지켜내야 하는 부담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애당초 ‘법’은 ‘법’의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과 사회를 지켜내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계명을 주신 까닭도 동일합니다. 죽음의 법에 의해 짓눌리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 구원해 내시고 하나님 백성으로 살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모든 말씀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말씀을 듣는 우리 자신을 위해 주신 겁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법안에서 생명충만, 구원을 경험하고 맛보게 될테고, 주님의 법이 기쁨과 평안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줄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주님의 양이 아니라면, 계명은 삶을 구속하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겁니다. 그러므로 만약 말씀을 들으면서도 평화를 경험할 수 없다면 이건 무언가 틀림없이 잘못된 겁니다. 들린 말씀이 주님의 말씀이 아니거나, 우리가 주님의 양이 아니거나 둘중의 하나일테니 말입니다. 주님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언제나, 주님이 나의 목자이신지 또한 나는 그분의 양인지라고 하는 관계로부터 시작하고, 그 사랑의 관계안에서만 유효합니다. 

     

    # 05

    그렇다면 주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여러분은 어떤 것이, 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의 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도 요한은 2독서인 서신서 말씀안에서 두 가지의 사실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 요한일서 3:23

     

    첫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출석한다거나 그렇게 믿기를 바란다는 희망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여주신 그분의 운명에 나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일치시킴으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구원에 참여하고 또한 그런 삶을 살겠다는 적극적인 태도여야만 합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의 삶을 완성해보려는 모든 노력들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겉으로 그럴듯해 보일 뿐이지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믿음의 내용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세 가지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단어들은 교회나 신앙에서만 접하게 될 뿐, 일상에서는 접할 일이 없다보니 그 안에 담겨있는 무게를 실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시라는 말씀은, ‘생명’이란 우리가 수고하고 애를 써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두번째는 ‘서로 사랑하라’는 겁니다.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득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또 교회나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보려고 수고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문제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는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16절 처럼 예수님이 그리하셨듯 우리도 또한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에는 흔쾌히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내 눈에 들지 않는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쓴물이 올라올지도 모릅니다. 그걸 그런 감정이 없는 척하면서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가식에 떨어지는 겁니다. 주님은 분명 그 마음과 중심을 판단의 기준 삼고 계시니까요. 요한은 대체 주님의 말씀을 왜 이렇게 전하고 있는 걸까요? 그는 우리와 심정이 다른 사람이라 주님처럼 사랑하는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요?

     

    # 06

    사도 요한이 정의하고 있는 ‘사랑’에 대해, 너무나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과한 채 지나친 것이 있습니다. 16절 전반부를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 요한일서 3:16a

     

    요한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는 이 한 문장안에 있습니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비롯한다는 겁니다. 이 한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에 응답할 수 있도록 불러주셨고, 우리도 또한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겁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했던 제자들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예수님의 운명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명’을 얻게 하는 것 보다 큰 사랑이란 없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으니, 요한 사도의 말처럼 참으로 하나님만이 사랑이실 수 밖에요. 결코 사랑할 수 없는 무능하고 이기적인 민낯이 드러나는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방식이 아닌, 생명을 주기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용기를 얻습니다. 또한 여전히 ‘서로 사랑하라’는 하늘의 명령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우리는 마침내 참된 사랑의 걸음을 걸어가게 될 겁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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