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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03/02 주현후 마지막 주일 *주의 변모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5. 2. 25. 16:16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출애굽기 34:29~35

      응송 | 시편 99

    2독서 | 고린도후서 3:12~4:2

    3독서 | 누가복음 9:28~36, (37~43)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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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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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phael , The Transfiguration (1520)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1.

    저는 사진찍는 것은 좋아하지만, 제 사진을 담는 것은 별로 유쾌하게 여기지 않는 편입니다. 요즘들어 더 그런 성향은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우연치 않게 오래된 사진을 보게 되거나, 누군가 찍어준 제 얼굴에서, 기억으로 갖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줄 때의 당혹스러움이 유쾌하진 않은 탓일 겁니다. 그래서 사진을 볼 때마다 지금 내 얼굴은 또 얼만큼 변해있을까? 이전보다 좋지 않아 보이지는 않을런지 조심스럽습니다. 사십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사람’의 얼굴이 그 사람의 인생을 대변하는 창이라는 말 때문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얼굴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요?

    오늘 1독서 본문은 산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본문의 이야기는 얼마전 출애굽 공동체 안에 일어났던 참혹한 사건 뒤에 있었던 일입니다. 앞선 3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금송아지’ 사건이 그것입니다. 하나님만일 믿어야 하는 출애굽 공동체가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기로 했던, 첫번째 언약은 산산히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불신앙은 일벌백계로 다루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공동체의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에, 하루 아침에 동족 삼천명이 살해당하는 참혹하고 끔찍한 일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지도자였던 ‘모세’의 입장은 어떠했을까요? 이유와 명분이 어떻든 자기 손으로 동족을 살해했다는 죄책감에 내몰렸을지도 모르고, 혹은 앞으로 이들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른지 암담한 심정에 떨어져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라도 다시금 지도자로서 자신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두려움도 컸을 겁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가나안까지 가게 될른지도, 음식이나 식수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수도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다시금 감당할 수 없는 내일을 끌어안고 다시금 산위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입니다. 고대로부터 ‘산’은 ‘신’을 만나는 곳으로 여겨졌던 탓에, ‘하나님’을 만날 목적으로 산을 찾은 겁니다. 그건 나름의 설득력있는 까닭이 있습니다. 

    애당초 ‘신’이란 인간을 초월한 존재다보니, ‘일반적인 방법’이나 ‘일상’에서 ‘신’을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식, 또는 그런 장소를 찾을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목사님들이나 신자들 중에는 기도하러 산이나 기도원에 올라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무언가 중대한 결심이나 선택을 해야하거나, 뾰족하고 시원한 답을 찾지 못한 궁지에 내몰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2.

    모세가 산위에 처음 올랐을 때 받았던 첫번째 언약인 ‘십계명’의 성격은 대단히 ‘윤리적’이었습니다. 생존을 위해 공동체가 지켜내야 할 숙제와 과업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32장의 사건때 첫번째 돌판도, 첫번째 언약도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언약이 체결됩니다. 두번째 언약의 증표인 돌판에 다시 새겨진 것은 다름 아닌 첫번째 돌판에 새겼던 십계명입니다. 하지만 기록된 형식은 같지만 내용은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 앞에 주어진 6절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선포하셨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 출애굽기 34:6

     

    하나님은 두번째 언약에서 공동체가 지켜내야 할 책임이 아닌, 자기 자신의 성품과 속성을 드러내고 계시하십니다. 첫번째 언약에서 소개된 하나님이 엄한 ‘아버지’같았다면, 두번째 언약에서 마주하게 되는 하나님의 성품은 따듯하고 인자한 ‘어머니’입니다.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시는 당신 자신을 ‘긍휼’하신 분으로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본래 ‘십계명’이라는 계명의 핵심은 지켜내야 할 ‘명령’으로서가 아니라, 이 계명과 언약이 ‘긍휼’하신 하나님과의 사이에 맺어진 것이라는 ‘관계’에 있는 것임이 분명해집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이 백성의 운명은 그들이 이 법을 얼마나 명령을 잘 이행하고 완수했느냐가 아니라, ( 이미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실패할 것이 뻔한지 드러났으니까요 )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에 달려있는 겁니다. 그래서 34장을 새롭게 체결된 ‘두번째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두번째 언약을 체결하고 그 증거판을 들고 ‘모세’가 산위에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산 아래에서 눈이 빠지게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오히려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30) 그의 얼굴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광’으로 가득찬 하나님을 뵌 자리에서 그 영광에 물들은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경외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던 겁니다. 이때의 장면을 묘사하는 성화나 성상들이 대개 ‘모세’의 모습을 이상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알고 계신가요? ‘모세’의 머리위에 사람이라면 있으면 않될 뿔 두개가 매달린 모습 말입니다. 여기에는 웃지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제롬’이 히브리어로 ‘빛나다’는 뜻의 ‘콸렌qalen’을 ‘뿔’이라는 뜻의 ‘콸란qalan’으로 읽었던 탓입니다. 그때 이후로, 라틴어 번역본인 ‘불가타’성경에 따라 사람들이 모세의 머리에 뿔이 달렸다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남들과 다른 낯설고, 낯설은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것, 신적 ‘카리스마’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3.

    사람들의 낯설음과 두려움 때문인지, 슬쩍 모세는 제 얼굴을 감춥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던 말을 다 마치자,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 34:33

     

    남들과 다르다는 것 자체가 권세가 되고, 성공으로 인정받는 세상입니다. 아마 이런 영광의 빛을 입게 되었다면,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사람들 앞에서 으스대기 십상일 겁니다. 사람의 본성이란 남들보다 인정받고 탁월해지길 바라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 대목에서 ‘모세’가 참으로 겸손하고 사려깊은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앞에 서는 것을 힘들어 하는 이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2독서 본문인 고린도서에서 사도 ‘바울’은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전혀 다른 이유를 소개해줍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얼굴에 너울을 썼지만, 그와 같은 일은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 고린도후서 3:13

     

    ‘광채가 사라져간다’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특별한 ‘카리스마’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고, ‘너울’을 쓴 까닭은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당시에 출애굽 공동체에는 그 어느때 보다도 강력한 카리스마가 필요했던 때였습니다. ‘금송아지’ 사건 때문에 하루 아침에 삼천명이 학살당하는 참담한 사건을 경험한 뒤였으니 군중들의 분위기도 어수선했을 겁니다. 언제라도 불만과 터져나와 폭동으로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카리스마’가 사라진 자신의 지도력을 군중들이 따르지 않게 될 것이 불보듯 뻔합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너울’로 얼굴을 가렸다는 ‘바울’의 말이 한편으로 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저는 ‘바울’의 이 해석에 조금 딴지를 걸고 싶습니다. 그런 식으로 읽게되면 자칫 ‘모세’가 권력과 지위에 내몰려 전전긍긍하던 사람처럼 비쳐보입니다. 오히려 이 사건에서 ‘너울’을 가린 행위가 아니라 점점 옅어졌다는 ‘영광’은 무엇이고 왜 옅어졌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복음서 말씀을 읽어보면 수긍이 가실겁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언급된 이야기입니다. 소위 ‘변화산’ 사건이라고도 하지요.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신 후에 일어납니다. 물론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 뿐 아니라 분명 ‘부활’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의 귀에는 온통 ‘죽음’의 이야기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만큼 ‘부활’이란 말은 그저 말도 되지 않는 있을 수 없는 일일 뿐이었겠지요. ‘하나님에 의해 일어날 일’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없음’을 일깨우시려고 했던 것인지, 주님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이렇게 제자 셋을 데리고 산위에 올라가셨습니다. 이유는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기억해야할 단어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시던 중에 주님의 겉모습이 변모되었습니다. 굳이 ‘겉모습’이라고 말하고 ‘변화’가 아닌 ‘변모’라는 단어를 쓰는 까닭이 있습니다. 아직은 ‘부활’을 통해 주님의 존재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고, 겉모습과 외형에 치중된 사건이었기에 ‘변화’ 대신에 ‘변모’라는 단어를 사용한 겁니다. ‘부활’은 ‘죽음’을 지나지 않고는 경험될 수 없는 일이기에, 아직은 ‘변모’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완전히 변화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나셔야만 합니다.

     

    4.

    분명히 그날 산위에 오른 것은 넷이었습니다. 하지만, 변모된 것은 주님 한분 뿐이었습니다. 말씀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차이점은 주님은 기도하고 계셨지만, 기도하러 올라왔음에도 나머지 셋은 졸고 있었다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졸지말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본문에서 산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하늘’이 허락한 사건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열심을 쌓고, 능력을 발휘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35절의 구름 속에서 났던 소리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랐다는 43절의 결론도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본문을 통해 ‘기도’의 참된 의미를 새길 수도 있습니다. ‘기도’라는 것이 땅위에서 쌓아 올리는 열심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애당초 ‘기도’라는 단어 자체가 하늘을 향해 납작 엎드러진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단어입니다. 옛 사람들은 ‘하늘로부터’임하는 것에 대한 경외감을 안고 ‘하늘’을 향하는 태도가 ‘기도’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여튼 주님은 산 위에서 변모하셨고 제자들은 그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미 죽은지 한참인 구약시대의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도 그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역시 우리 주님이야’라며 뿌듯해 했을까요? 아니면 상상조차 해본적 없는 일 앞에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두려움에 압도당했을까요? 

    놀라움 때문인지, 자다가 깨어 이 장면을 목격했던 ‘베드로’가 대뜸, ‘초막 셋을 짓고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겠다’고 말합니다. 변모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그곳’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던 탓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엿볼 수 있던 이곳이 정말 신령해 보였을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만 있다면 삶의 모든 시련과 질고로부터 벗어나고,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제자들의 이런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됩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식의 ‘천국’을 바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오늘’을 살아내기에는 너무 힘겨워서, 하루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길 바라거나 이런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뭔가 대단한 능력이라도 얻기를 바라는 마음 말입니다. 하지만, 결국 주님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와야만 했던 제자들 처럼, 여전히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야 할 뿐입니다. 도무지 ‘변화산’은 보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1독서의 ‘모세’이야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얻은 ‘영광’의 광채를 덧입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속적없이 사그러들고 옅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제 아무리 대단한 비경을 목격하고 하늘의 영광을 덧입는다고 해도 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산 위에서 ‘영광’의 빛으로 충만했던 주님께서도 산 아래에서는 누구도 특별하다고 눈여겨 보지 않을 평범한 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내몰았던 겁니다. 그렇다면 ‘산 위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그 날의 일은 단 하루의 ‘해프닝’에 불과했던 걸까요?

     

    5.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들과 달리 신령한 ‘산 위’에 올라 신탁을 받는다거나 초월을 경험하거나 그런 식의 능력을 받으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은’ 우리의 시선을 철저히 민낯 그대로의 각자의 ‘삶’으로 이끌고 갑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할 곳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곳도, 삼층천도 높은 산도 남의 삶도 아닌 바로 내게 허락된 내 몫의 ‘삶’일 뿐입니다. 그러나 ‘순서’가 중요합니다. ‘산위에’ 오른 뒤에는 반드시 내려가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덮고 있는 ‘영광’안에서 하나님을 능력을 발견한 뒤에 비로서 삶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마치 산위에 올라보니 산 아래에서 가리워져있던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 전체를 아우르고 있음을 알게 된 것처럼, 똑같은 현실을 마주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고 있음을 믿는다는 것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할테니까요.

    오늘 본문의 사건이 예수님의 ‘첫 번 수난 예고’이후 그러니까 ‘십자가’로 나아가는 길목 앞에 일어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죽음보다 강하시고, 태산보다 크신 ‘하나님’을 실감하셨습니다. 제게는 이 장면이 마치 주님을 위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향하는 당신 아들을 위해 선물처럼 준비한 한없는 위로와 격려의 자리로 보입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고, 마침내 죽음을 불사하는 장수처럼 제자들과 함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산 아래로 향할 수 있었던 겁니다. 대체, 주님은 그곳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무슨 능력을 받으셨던 걸까요?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누가복음 9:35b

     

    그날 산위에서 주님께 주어졌던 것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이 한 말씀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후에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흔들림없는 오롯한 걸음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아무리 꿈만 같은 은혜를 경험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가 직면해야하는 현실은 ‘십자가’가 드리워진 현장, 산 아래의 삶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모세’와 같은 카리스마나 신적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을 둘러쌓던 영광의 빛이 드리워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치열한 삶을 살아내고 ‘십자가’를 통과하기 위해서 꼭 그런 신비로운 능력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모세’의 얼굴에 드리워졌 영광의 빛도, 주님을 둘러쌓던 광채도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산 아래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감싸안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당신을 포기하시지 않을 아버지의 충만한 ‘사랑’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실 때 주님의 표정은 어두웠을 겁니다. 아무렴요. 홀로 감당해야 할 ‘죽음’의 길이지만, 아무도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으니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겠습니까? 그러나 산 아래로 내려올 때, 비록 주님을 둘러쌓던 광채는 모두 사라졌지만 그 얼굴은 오히려 더 빛나고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사랑받는 이들의 얼굴은 빛이 나는 법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한 그 빛은 어떠한 시련과 역경, 죽음의 위협에서조차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확인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지나 우리는 곧장 ‘재의 수요일’로부터 ‘사순절’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모쪼록, 사십일 간의 여정 가운데, 우리의 얼굴에도 가뭇없이 사라지는 영광의 광채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빛으로 깊게 물들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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