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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02/23 주현후 제7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5. 2. 19. 15:36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창세기 45:3~11, 15

      응송 | 시편 37:1~11, 39~40

    2독서 | 고린도전서 15:35~38, 42~50

    3독서 | 누가복음 6:27~38

     

    # 설교음원

    http://naver.me/xRhyDfS2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N26AZjU0tiM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Jacob de Wet Joseph and his Brothers, 1633 68 x 80 cm Oil on panel Musees d'Art et d'Histoire, Nimes

     

    '시간' '역사', 그리고 '하나님'

    1.

    형제들에 의한 핍박과 환란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된 1독서 ‘요셉’의 이야기,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서신서’와 그리고 ‘원수 사랑’에 대한 주님 말씀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오늘 성서일과 본문간의 연관성이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응송과 서신서를 건너뛰고 자신을 박해했던 형들을 용서하는 ‘요셉’과 ‘원수’를 사랑하라던 주님의 말씀을 조급하게 연결하곤 결론을 맺고 싶은 유혹도 있습니다. 하기사 ‘이웃’사랑이라거나, ‘원수’ 사랑의 황금률은 동서고금을 무론한 가르침이기도 하지요. 다시 말해 ‘생명’과 관련한 성서만의 고유한 가르침으로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겁니다.

    일단 이런 질문을 드려볼까요? 대체,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런 설교를 하는 목사님들도 많고 우리도 이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할 뿐만 아니라, 연일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런 고백에도 불구하고, ‘원수’는 둘째치고라도 여전히 우리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웃’ 조차 조건 없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부끄럽게도 분열, 혐오, 차별같은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갈등’의 문제 속에서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모습을 발견하기가 어렵지가 않습니다.

     

    2.

    저는 오늘 복음서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참으로 ‘원수’마져 사랑할 수 있다면, 그때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상상해보곤 합니다. 그런 ‘사랑’이라면 ‘평화’를 이루거나 인류를 ‘구원’하는 일도 요원하지 않을테니, ‘사랑’이란 세상 모든 ‘무기’보다 강하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지나치게 낙관적인 걸까요? 

    ‘사랑’이란 본래 모든 관심이 ‘나’에게서 ‘너’에게로 옮겨지는 것, 그러니까 나는 굶어도 너는 먹고, 나는 망해도 너는 살아내라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더욱이 제 맘에 드는 사람이 아닌 ‘원수’같은 이들을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 집중’이나 ‘자기 중심주의’라는 것이 스스로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긍정적이고 역동적으로 살아가게 해주는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언제나 그리고 결국 이기적으로 뒤툴리거나 타자를 향한 폭력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고대’의 시대로부터 내려온 ‘내가 이것을 가지면 상대는 가질 수 없지만, 상대가 가지면 나는 굶어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자유롭지가 않으니까요. 단편적으로만 생각해 보아도 이건 분명한 사실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군축만이 답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으면서도 세상은 대량살상무기를 늘리는 일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해마다 ‘온실효과’로 인한 극심한 재해를 경험하면서도, 단 하루만이라도 ‘에어컨’을 끄고 공장 가동을 멈춰보자는 환경운동가들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뿐입니다. ‘우리’만 그럴 수 없다는 ‘이기심’이 막연한 두려움과 만나 ‘공존’해야만 하는 지구별의 평화를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그런 우리가  ‘원수’를 사랑한다니요? 결론부터 말씀드릴까요?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아내가 남편을 향하는 사랑도 있지 않습니까?’ 물으신다고 해도, 제 답변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숭고한 ‘사랑’조차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국한된 이기적인 것에 그칠 뿐, 우리의 사랑은 늘 한편으로 기울어져있기 때문입니다.

     

    3.

    사도 요한은 ‘사랑’이야 말로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라고 말했습니다. 왜냐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존재론적으로 볼 때 ‘사랑’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선에서 구약 본문의 ‘요셉’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우리는 17살에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다가 30에 애굽 총리가 될 때까지 ‘요셉’이 어떻게 파란만장했던 역경을 극복하고 인생 승리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었는지에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하지만 성서기자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성서기자는 그저 그를 지금까지 살게 하신, 그리고 그를 통해 그의 가문 뿐만 아니라 애굽 주변의 모든 민족을 살려내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설명하려고 할 뿐입니다. 재미난 것은 ‘성서’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요셉’은 미디안 상인에 의해 팔려 갈때에도,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할 때에도,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술 맡은 관원장의 무심함 때문에 감옥에서 잊혀져갈 때 조차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말씀이나 계획에 대해 전해 들은 바가 없다는 겁니다. 다만, 어린 시절 자신에게 ‘놀라운 꿈’을 보여주셨던 ‘하나님’께서 비록 아직도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인생을 향한 ‘계획’과 ‘꿈’을 가지고 계시다는 믿음 하나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 이르기전까지는 ‘요셉’ 자신은 하나님도, 하나님의 일하심도, 그리고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른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창세기 45:5b

     

    그리고 마침내 얽혀있던 인생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통치가 ‘요셉’의 전 삶을 붙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자, 이제 질문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다 확인했지만, 과연 고난의 시간을 지나고 있던 23년간 ‘요셉’은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손길’을 실감할 수 있었을까요?

     

    4.

    우리는 구비구비 생명이 위기에 내몰렸던 순간에도 ‘요셉’은 허허롭게 웃으며 지나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속단합니다. 그걸 가능하게 했던 ‘능력’이나, 찬란한 내일을 내다 볼 수 있는 ‘신통력’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에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단박에 무엇이라도 바꿀 수 있는 큰 ‘믿음’ 같은 것을 바라곤 합니다. 정말 ‘요셉’에게 그런 일이 있을까요? 

    우리는 말씀을 통해 이미 ‘요셉’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와 선하신 손길이 늘 함께 했음을 알고 있지만 ‘요셉’ 자신은 결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마치, ‘요셉’은 우리와 믿음의 수준이 다른 사람이라는 식으로 본문을 읽게 된다면, 성경은 더 이상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죽은 글이 될 뿐입니다. ‘믿음’은 불신이 갑작스레 확신이 되고, 슬픈 마음에 위로가 차오르고, 부족함의 자리가 채워지는 마술같은 능력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본문의 이야기안에 우리가 미쳐 읽지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생략된 하나의 단어가 있다고 봅니다. ‘마침내’가 그것입니다. ‘오늘’이 오기 이전까지 비록 ‘요셉’ 자신은 아니라고 해도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의 인생은 ‘비참한’ 그것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요셉’의 인생안에 어릴 적 그가 꾸었던 ‘꿈’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 자신의 말처럼 그의 인생 전체가 ‘목숨’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큰 계획안에 있었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이 23년 동안 전혀 보이지 않다가 ‘지금’에 이르러서 ‘마침내’ 드러난 사실일 뿐이라는 겁니다. 이 만큼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서 보이게 된 겁니다. 자그마한 화분에 심기워진 ‘씨앗’ 한 알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을 주고, 볕을 쬐어주고, 정성을 다해 생장에 좋은 양분을 공급하고 돌보아 준다고 해도, 조바심만으로는 아무것도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그저 아무 일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생명이 담겨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언제나 ‘시간’ 뿐 입니다. 그렇게 유독 ‘시간’을 지나야만 길어올리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간’과 ‘역사’를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시고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과 ‘능력’이라는 것을 가르쳐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백년간 노예로 전락해 버렸던 ‘히브리’인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 마치 ‘신’이라도 된 듯 우쭐거리는 ‘바로’와 영원히 해가 지지 않을 것만 같던 그의 제국 ‘애굽’을 무엇이 무너트렸습니까? 강대국에 의해, 상황과 여건 때문이었을까요? 애굽 사람들 뿐만 아니라 히브리인들에 이르기까지, 당대에 누구도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시간’앞에서 ‘애굽’의 권세라는 것이 얼마나 속절없는 것인지가 드러나고 말았던 겁니다. 세계사를 주름잡던 제국들 모두 다를 바 없습니다. ‘시간’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이건 과거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 중에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같은 나라의 내일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앞에서 절대적이거나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태양’도,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도 언젠가 ‘시간’앞에서 끝을 맞이하고 말 겁니다. 그러니 ‘인생’은 더 말해 무엇할까요? 다들, 영원히 살 것처럼 하늘 높이 자신의 소유와 명성을 쌓아 올리려고 하지만, ‘시간’앞에서 ‘인생’은 무너진 ‘바벨탑’처럼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드러나고 말겁니다. 그러니 ‘시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앞에서 과연 누가 큰 소리칠 수 있겠습니까?

     

    5.

    이제 ‘원수 사랑’에 대한 복음서 말씀을 읽는 것으로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설교 첫머리에 말씀드렸듯, ‘원수 사랑’은 우리에게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할 것인가?보다는 대체 ‘원수’가 누구인지를 물을 수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원수’란 누구일까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어둠의 세력입니까, 아니면 인생을 파멸로 몰고가는 ‘마귀’, ‘사탄’입니까? 저는 예수님 말씀에 언급되고 있는 ‘원수’란, 우리가 ‘나’와 함께 할 수 없다고 밀쳐낸 모든 ‘타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동안 사회안에서 ‘나’와 다른 사람이란, 내 일상과 평화를 위협하는 불편하고 거슬리는 비교와 경쟁의 대상으로만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늘 그래왔고,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은 ‘시간’의 문제일 뿐입니다. 더디 가는 것 같아도 결국은 온 땅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테니까요. 그날이 오면, 하나님 안에서 우린 모두 마침내 하나가 될 겁니다.

    두번째, 주목해야할 것은 부담스럽기만 했던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이 누구에게 주어진 것이냐?겁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 누가복음 6:27a

     

    이 말씀에 직접적으로 구속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너희’입니다. ‘너희’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시간’과 ‘역사’를 통해 통치하시는 분임을, 또한 그 놀라운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났음을, 그리고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시간’이 오고 있음을 믿는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주님의 제자들에게 요구받는 삶은 무엇입니까? 사회나 공동체안에서 차별과 소외로 내몰린 모든 ‘타자’들과 기꺼이 한 운명공동체로 받아들이는 ‘원수 사랑’하는 일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 마태복음 5:9

     

    ‘평화’를 이루는 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원수’와도 하나가 될 수 있는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안에 거하거나 주님의 능력에 잇대어 살아가는 것이, ‘시간’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 말씀으로 듣는다는 것이 바로, ‘역사’를 통해 찾아오시는 하나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은 더욱 ‘역사’를 통해 배워야만 하며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오늘’의 삶을 허투루 여기지 않고 소중히 간직한다는 뜻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혀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주목하지 않는 결과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언급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를 통해 일하시는 분이니까요. 그 동안 우리 사회에는 크고 작은 사건과 참사들, 또 그안에서 희생당한 이들에 대한 ‘기억’을 부정하고 ‘잊혀짐’을 강요하는 어리석고 악한 무리들이 많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이방인들처럼 새로운 것이나 뾰족한 비법을 배우려들거나 ‘도덕’, ‘윤리’적인 경건만 말하지 말고, 쉽게 잊혀지고 마는 ‘망각’과 싸워야만 하지 않을까요? 하늘에서 뭔가 툭 떨어지고, 하루 아침에 신앙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모든 것을 하나님 탓만 하는 못난 습성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시간’안에 함께 하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배운 이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십시오. 그래야 어둠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 믿음의 근거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능하도록 하는 모든 것은 ‘시간’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것인지, 그런 날은 없을 것이라고 외면할 것인지 ‘선택’은 자유이지만, 선택의 결과는 분명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 고린도전서 15:42

     

    비록 썩어 없어질 것들 안에서 썩어 없어질 것처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 그리스도 안에서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반드시 썩지 않을부활 거두게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오늘 작고, 여리고, 볼품없고, 상처입고, 깨어졌고, 잊혀지고 있더라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오늘 아직 모두 드러나지 않은내일 그림자일 뿐입니다. 아직은 움이 돋지 않았고, 아직은 흙을 뚫고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은시간 통해 일하시는 분이기에, 그가 가져다 주실내일 오롯이 하나님 자신에게만 속해 있을 결코 우리의 절망이나 세상의 기만에 의해 깨어지지 않을 겁니다. ‘자비사랑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라는 말씀은 이런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더욱이 썩지 않을 영광을 거두게 되는 그날까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본성을 거스르며 ‘원수’를 사랑하는 ‘평화’를 이루는 걸음에 동참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원수’로 내몰린 모든 이들이 사랑안에 용납되는 ‘그날’을 이끌어오는 일을 위해 ‘내일’의 부름을 받은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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