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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9 사순절 제1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5. 3. 6. 10:43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신명기 26:1-11
응송 | 시편 91:1-2, 9-16
2독서 | 로마서 10:8b-13
3독서 | 누가복음 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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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다”, James Tissot, '오늘'의 말씀 / '오늘'의 따름
1.
우리 말 사전은 ‘신앙’이라는 이 말을 ‘믿고 받드는 일’,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ㆍ사랑ㆍ의뢰심을 갖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한다는 것은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신뢰와 믿음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신앙하는 우리에게는 자연스런 물음이 따라올 수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걸까요? 우리 신앙의 지향이 ‘과거’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가요? 아니면 ‘현재’나 ‘미래’중에 어디에 주목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오늘의 현실을 체념하고 무시한 채 언젠가 마주하게 될 ‘미래’에만 천착한다는 이유로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신앙은 배척되곤 합니다. 하지만 그들 뿐만 아닐 우리의 신앙 행태도 사실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개인적 신앙이나 내세적 신앙에 머무는 탓에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시던 주님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곤 합니다. 그저 죽어서 가는 ‘천국’에만 천착한 탓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과연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무엇을 지향하는 신앙, 예수께서 걸어가셨던 생명의 걸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함께 돌아볼 수 있기를 빕니다.
2.
성서일과 본문들의 공통된 메시지는 신앙의 대상이며 목적되시는 ‘하나님’입니다.
1독서 구약 본문은 ‘모세’의 설교집이라고 불리우는 ‘신명기’ 말씀입니다. 신명기는 광야생활 40년의 결산이며, 또한 다가올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결단으로 채워져있습니다. 그 내용은 한결같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출애굽 공동체의 운명을 이끄셨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과거의 하나님 기억을 바탕으로, 신앙으로 내일을 살아가자는 설교인 셈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말씀은 ‘과거’ 시제로 씌여져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 신명기 26:9
모세의 설교는 출애굽 공동체를 과거의 기억으로 이끌고 갑니다. 모세에 따르면, 이 공동체가 직면하게 된 ‘오늘’은 ‘약속’을 지켜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설교를 하는 까닭은 이제부터 마주하게 될 가나안에서의 ‘내일’ 때문이었습니다. ‘내일’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이 달려 있는 불안하고 두려운 미지의 영역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오늘’을 염려와 근심으로 짜부러트리는 것은 늘 ‘내일’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내일’을 두려움에 내몰리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과 함께 했던 어제의 기억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는 ‘과거’의 기억이라는 터위에서 ‘내일’을 지켜내는 일에 실패하고 맙니다.
응송인 시편 말씀안에도 하나님을 향한 찬미와 고백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의 하나님 기억은 이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는 신앙 공동체의 시선을 ‘내일’로 이끌어 가고 있으니, 모세의 설교와 방향성이 반대인 셈입니다.
‘나는 주님께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다.’ | 91:2
그래서인지, 그의 노래는 모두 ‘미래’시제로 씌여져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가 아니라 ‘되실 것이다’(9)라거나 그러므로 ‘어떤 불행도, 재앙도 찾아오지 않을 것’(10) 이라는 언급도 모두 ‘내일’에 대한 고백 입니다. 이쯤 되면 대체 시인이 처해있던 ‘오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집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얼마나 받고, 누리고 있기에, 또 얼마나 평안하고 행복하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대부분의 시편의 노래는 현실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해석되는 ‘현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은 오히려 피난처가 되고, 요새가 되고, 의지해야 할 분이 ‘주님’ 뿐인 아득한 상황이었던 셈입니다. 이런 현실속에서도 ‘하나님은’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확신에 찬 시인의 ‘믿음’이 경이로울 만큼 부러울 뿐입니다.
3.
1독서 구약 본문은 하나님을 향한 ‘과거’의 고백이, 응송인 시편은 ‘미래’를 의지하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현재’에 관한 고백 뿐입니다. ‘복음’서 말씀이 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 복음서 말씀의 앞서 3장에서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던 장면과 하나님까지 이어지는 예수님의 ‘족보’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을 열기 바로 직전의 사건을 소개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은 ‘성령’께서 주님의 손을 이끌고 ‘광야’로 가셨다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선 3장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향하셔야 할 곳이 바로 ‘광야’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사전 정보였던 셈입니다. 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신 주님께서 ‘광야’를 지나셔야만 했을까요? 광야에서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악마’였습니다. 그 시험은 ‘유혹’이었습니다. 어떤 유혹입니까? 평행본문인 마태와 달리 두번째, 세번째 유혹의 순서가 바뀌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을 건드리는 유혹입니다. 먹고 사는 생존의 욕구,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의 욕구, 그리고 세상 모든 것으로 표현된 소유의 욕구입니다. 이런 욕구는 우리 신앙을 송두리째 무너트릴 만큼 달콤하기도 하고, 인생과 삶을 비굴하고 힘겹게 만들 만큼 치명적인 것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를 악마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광야로 이끄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온 몸으로 전하실 ‘하나님 나라 복음’이 바로 그곳에서 ‘복음’으로 드러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하고 척박하고 아프고 상처받고 비교와 경쟁에 내몰리는 그런 현실의 삶에서 ‘복음’이 ‘복음’일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분의 ‘복음’이야 말로 인간을 구원하는 ‘복음’일 수 있음을 증명되어야 하는 곳은 언제나 우리의 현실의 자리여야만 합니다. ‘악마’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유혹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파산하도록 하고, 악마에게 굽신 거리며 살도록 만드는 세상에서, 하나님만을 믿으며 살아가는 승리의 길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주님은 그곳에서 세번에 걸친 악마의 유혹을 모두 이겨내셨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한결같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독서의 출애굽 공동체를 향한 모세의 설교처럼 ‘하나님이 구원하셨다’는 ‘과거’를 고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단한 믿음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일’ 도우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기억하거나 암송하고, 설교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오늘’,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는 것 같은 ‘광야’ 한복판에서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을 고백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에서 실패하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언제나 ‘오늘’이었으니까요. 대체 주님은 어떻게 말씀에 잇대어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진 악마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우리와는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어서 그런 걸까요?
4.
바울 사도는 ‘로마’에 써보냈던 편지안에서, 주님처럼 ‘믿음’을 현재를 살아가는 능력으로 경험하기 위한 길을 소개합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 로마서 10”10그러나 믿음과 고백에 선행하는 것은 또한 ‘말씀’ 뿐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 로마서 10:8b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말씀’이라니 너무 식상하다 싶진 않으신가요? 말씀을 묵상하고, 읽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설교도 많이 듣는데 ‘현재’의 십자가를 짊어내지 못한 채 쓰러지는 기억만 가득하니말입니다. 대체, 똑같은 말씀인데 왜 주님께는 악마의 유혹을 깨트리는 능력이 되는데, 우리에게는 아무런 능력으로도 경험되지 않는 걸까요?
그러고보니 뜨악하고 아찔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주님을 시험하던 악마도 시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쯤되면 ‘말씀’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을 갖는 것이 오히려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을 우리는 유념해 보아야 합니다. 다시 악마와 주님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주목해 봅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악마’는 분명히 시편 92편을 고스란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안에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사특한 ‘말’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꾀임에 넘어가는 순간, ‘말씀’이 아니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고 말이 크게 보이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 때 말씀은 그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고, 그런 존재로 입증받고 싶은 욕망을 이루어주는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주님의 답변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스스로를 입증해야만 한다는 조급함이 조금도 보이질 않습니다. 어디 감히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길을 방해하느냐?는 의기심도 없습니다. 주님의 답변은 한결같이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 뿐입니다. 그분의 관심사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생명의 근거되시는 하나님 말씀에 오롯이 일치되는 것 뿐임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말씀을 통해 ‘거창한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는 인생이 아니라, 말씀을 이루어가는 삶을 택하셨던 겁니다.
5.
사도 ‘바울’은 로마의 교우들에게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만이 구원받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그것은 언제나 ‘오늘’, 그리고 바로 ‘지금’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과거’의 신앙이 어떠했는지 ‘미래’에는 어떻기를 바라는 확신이나 기대와 같은 말은 그만 내려두고, ‘오늘’의 믿음을 시인하십시오. 이전에 얼마나 대단한 신앙생활을 했는지도 앞으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 것인지도, 바로 ‘지금’ 현실의 삶에서 ‘말씀’에 잇대어 있지 못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우리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어제의 고백이 어제를 구원했듯, 그리스도께 응답하는 오늘의 고백을 통해 ‘오늘’을 구원할 수만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악마는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가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 | 누가복음 4:13
유혹이 실패로 돌아간 악마가 끝장나 버렸는 줄 알았는데, 본문은 ‘어느 때가 되기까지’ 주님 곁을 떠나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처럼, ‘악마’ 또한 우리를 이 믿음에서 실족시키기 위해 ‘지금’, 우리의 ‘오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주님도 ‘악마’가 아니라,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고, ‘믿음’으로 살고 있으니 ‘악마’의 유혹이 없는 것처럼 자신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악마’도, ‘악마’의 유혹도 두려워할 까닭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주님의 앞선 걸음을 통해 ‘악마’의 유혹이 가장 치명적일 수 밖에 없던 그곳 ‘광야’(미드바르 מִדְבָּר)에서 오히려 ‘돌을 떡으로 만들어 살라’는 악마의 유혹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하나님의 말씀(다바르 דָבַר)안에 생명이 담겨 있음이 폭로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때로는 목줄을 움켜쥐듯 먹고 사는 문제가 태산처럼 커 보일 때도 있을 겁니다. 여전히 온갖 시름과 유혹이 마음을 어지럽힐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악마’는 예수를 따라 ‘광야’를 가로지르는 우리에게 끝도 없이 ‘십자가’는 ‘죽음’이라고 겁을 줄 겁니다. 과거의 지나온 걸음도, 내일에 대한 자기 확신도 우리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악마’의 유혹앞에서 말씀을 ‘오늘’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셨던 주님처럼, ‘오늘’, 그리고 바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우리 자신의 운명을 걸고 따라 가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사순절 첫번째 주일입니다. 여전히 ‘사순절’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절기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순절’ 기간 교회가 ‘금욕’과 ‘절제’에 힘쓰는 까닭을 채움과 소비의 문제를 극복하거나, 어떤 고상한 수준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던 ‘악마’의 유혹처럼, ‘무엇’을 얻기 위함도 이루기 위함도 아닙니다. ‘사순절’은 그의 몸된 교회로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그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사랑에 짙게 물들어 감동하고 감격하는 여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욕망 자체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예수께서 그리하셨듯 순전히 하나님 말씀에 잇대기 위해 매일의 간절함을 담아 갈 뿐입니다.
우리는 영광과 신화가 서려있던 변화산 위가 아닌 ‘악마’의 유혹이 거센 ‘오늘’의 자리에서, 교회의 전통을 따라 매일 매일 ‘오늘’의 ‘사순절’에 참여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사십일의 기간 동안 온 마음과 영혼을 담아 ‘영생’의 삶을 향해 나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향하여 나아갈 겁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 로마서 10:12-13.
우리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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