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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12/21 대림절 제4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5. 12. 16. 08:34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7:10~16

      응송 | 시편 80:1~7, 17~19

    2독서 | 로마서 1:1~7

    3독서 | 마태복음 1:18~25

     

    * 설교영상과 음원은 주일 에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Henry Osswa Tanner '수태고지'. 19세기. 필라델피아 박물관

     

    징조를 구하는 사람들|

     

    기다림 앞에서

    어느덧 대림절 네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이 마지막 주간은 언제나 묘한 긴장 속에 머물게 됩니다. 곧 성탄을 맞을 것이라는 기쁨과 기대감이 커가고 있지만, 그 만큼 마음 한편에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조급함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고요한 기다림 가운데 맞아야 할 이 시기가, 동시에 무언가를 해내야만 할 것 같은 소란스러움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종교적인 열심이나, 세련된 행사, 그럴듯한 말로 포장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저 우리를 ‘임마누엘' 신앙으로 초대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게 될 성서일과 본문들은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이 신앙으로 수렴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위기에 처한 유다 왕국에 선포했던 임마누엘의 징조, 바울이 로마 교회에 전했던 은혜와 평화의 복음, 그리고 마태복음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고백을 머리로 아는 것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위기의 순간,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할 때,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신앙과 현실의 긴장

    오늘 첫 번째 본문인 이사야 7장은 기원전 8세기, 유다 왕국이 처한 절박한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앗수르 제국이 절대적 패권을 행사하던 시대, 북쪽의 이스라엘과 아람은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결성했고, 남쪽 유다에게도 연합에 참여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상대를 먼저 무너뜨리지 않으면 결국 내가 당할 수 밖에 없다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이를 거절했고, 동맹군은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먼저 앗수르가 아닌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남쪽 유다의 힘만으로 이 연합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극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유다의 왕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원조를 요청하기로 결정합니다. 적의 적은 나의 동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라고 하지요. 당장 눈앞에 다가온 적군을 막아낼 방법이 필요했고, 앗수르는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진 강대국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저들과 원수 지간이니 나와는 기꺼이 한편이 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대단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그 결정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였습니다. 그의 눈에 이건 패망을 초래할 악수(惡手)였습니다. 앗수르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곧 그들의 속국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지금 이 민족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하나님께 징조를 구해보라고 권합니다. 그리해서라도 하나님만이 구원이시라는 사실을 확신했으면 했던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7:12)라며 선지자의 권고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언뜻 대단히 신앙적인 결단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니, 얼마나 경건한 말입니까? 하지만 이미 그는 앗수르 군대를 부르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묻거나 기도할 생각이 전혀 없었을 뿐입니다.  선지자 앞에서 그저 경건한 척 행세하며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사야와 아하스, 누가 옳은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그닥 어렵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이사야의 말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염려와 근심, 불안한 상황에 내몰렸을 때 우리는 하나님만을 믿으며 의연하게 버티는 일에 수도 없이 실패해왔으니까요. 오히려 더 조급했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 더 열심히, 더 헌신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불안에 떨어지곤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면 주저하지 않고 선택하는 것이 우리였습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신앙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이미 정해놓은 방향을 합리화하는 아하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거울일 뿐입니다.

     

    2. 보이지 않는 징조, 임마누엘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기를 거절하자, 이사야가 하나님께서 주실 징조에 대해 말합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7:14.

    이 구절은 오늘 복음서 본문인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로 다시 인용됩니다. '동정녀 탄생’이야기입니다. 본래 ‘처녀’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원문의 '알마'(עַלְמָה)는 '젊은 여자', 곧 '혼인 적령기의 여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70인역이라고 하는 셉투아진트 성서에서,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처녀'를 의미하는 헬라어 '파르테노스'(παρθένος)로 대체되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 즉 처녀잉태를 문자 그대로 믿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믿음이 없다고 비판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믿는 사람들을 향해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읽는다는 점에서 본질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들을 낳은 이가 처녀인지 아닌지, 그러니까 기적이 있었는지 아닌지가 아닙니다. 핵심은, 아이가누구인가라는 겁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부활이라고 하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되었고, 거슬러 올라가 그의 탄생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바로 그 해석의 결과였고 고백이었던 겁니다.

    문제는 아무리 대단한 사건이 전제되어도, 여전히 우리 눈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손으로 잡을 수도 없으니 막연합니다. 확신이 드는 듯 하다가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표징을 찾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분명히 알고 있으면 보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이건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가하는 물음입니다. 이걸 모르는 분들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우리 중 어떤 이도 죄와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어떤 상황에 떨어지더라도 망하거나 버려지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용납하고 받아주실 테니 말입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종교적 교리 차원에서만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건 세상의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갖가지 의약품이 넘쳐나고, 운동에 매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고가의 의료 시술을 받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은 무상히 스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을 지켜낼 도리가 없다는 겁니다. 생명은 여전히 하나님께만 속한 고유하고 배타적인 능력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선으로 하루하루의 일상이나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전체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내일에 대한 염려와 근심에 내몰리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들이 선물처럼 주어졌으며 하나님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구원의 구체성

    세 번째 본문인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전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혼인은 했으나 아직 동거하기 전인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겁니다. 요셉은 파혼으로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때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전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마리아를 정식 아내로 맞으라는 것과 마리아가 낳게 될 아들의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는 겁니다.

    '예수'는 평범한 유대식 이름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예수아'이고, 조금 길게 발음하면 '여호수아'입니다. 마리아가 낳은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야 했던 이유는 그 아들이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 마 1:21.

    저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말이 요즘에는 '도덕'이나 '윤리적' 개념으로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거짓말을 했는지, 간음이나 음란했는지, 탐욕에 내몰리지는 않았는지 같은 차원으로 말입니다. 그런 잘못들을 부추겨서 정죄하고, 신앙을 그런 부담이나 정죄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통로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회개'하라는 요청에 어떤 식으로 기도하는지만 보아도 이 사실은 명백해집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꼼꼼히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런 식의 도덕주의를 '죄'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도덕과 윤리 문제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런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훨씬 철저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도덕과 윤리, 종교와 사회 시스템이 비난하는 죄인들을 찾으셨고, 늘 그런 이들과 친구처럼 지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죄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의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이 사실일 때만 우리에게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가장 정확하고 확실하게 깨닫고 경험했던 유일한 인물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장 친근한 표현인 '나의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했습니다. 단순히 이런 것들만 보아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는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도덕과 윤리적 삶을 살게 해주는 분이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해주시는 분입니다. ‘죄’의 본질은 생명을 파괴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세력들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생명을, 즉 우리의 일상인 '삶'을 파괴하는 것들일까요? 

    이건 언제, 어떤 문제 때문에 삶이 위축되는지를 확인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각자 처한 형편에 따라 다 다를 겁니다. 이미 실직했거나 앞으로 해고를 앞둔 분들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평생 쌓은 사업이 부도가 날 수도 있습니다. 큰 병에 걸린 사람이나 실연당한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사고를 치면 부모의 일상이 무너집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먹고살아야 할 최소한의 생존 조건이 위태로울 때 삶이 위축되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우리가 피하고 싶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릅니다. 삶이 온통 뒤흔들리게 됩니다. 파렴치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나 고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교회 다니는 신자들이나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이나 구원에서 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많이 하고, 선행이나 신앙생활에 열심이면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이건 불가능합니다. 인간에게서는 구원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생명을 보는 눈

    그런 상황에 떨어지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이 손에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일상의 어디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표징이 되어야 아하스가 아닌 이사야처럼 ‘하나님만’ 믿는 구원의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가 그것입니다. 그런 감각이 열릴 때만, 생명은 눈에 들어옵니다. 생명이 보이고, 그 신음이 귀에 들리는 곳에서, 우리는 함께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 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이 잘 와닿지 않을 겁니다. 사실 지금의 삶이란 것이 이런 본질적인 생명에 집중할 수 없을 만큼 분주하고 바쁘기 때문입니다. 과잉된 일상이 멈추어 서서, 주의 깊게 들여다볼 여유를 빼앗아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달려가기만 합니다.  2독서인 로마서를 통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임마누엘’ 신앙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부활'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죽음'도 끝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사라지고, 더 필요한 것도 없게 됩니다. 쫓기지도 않고, 누구를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에 허덕일 이유도 없습니다. 매일 은혜와 평화가 가득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복음'입니다. 이것을 경험하고 있었기에, 바울 사도는 로마 제국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던 교우들에게 이렇게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 롬 1:7.

    은혜와 평화. 이것이 임마누엘 신앙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선물입니다. 은혜는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평화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상태가 아니라, 문제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안식입니다.

    살아있음을 실감하며 산다는 것은 이런 겁니다. 본질적으로 무엇으로 살고 있는지, 무엇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는지를 깊이 들여다보는 겁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기다림은 막연한 먼 미래의 어떤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눈을 떠서 그분을 보고, 귀를 열어 그분께로부터 듣기를 기다립니다. 매 순간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생명을 알아차리기를 기다립니다. 

    이제 곧 성탄을 맞이하게 됩니다. 성탄은 오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선포입니다. 그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예수님을 통해 깨닫고 보게 되었습니다.

    위기 앞에서 조급해하며 눈에 보이는 해결책을 찾아 헤매다 길을 잃은 어리석은 아하스를 닮지는 마십시오. 요셉처럼 천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하면 바울 사도의 말처럼 은혜와 평화가 우리의 일상에 충만하게 채워질 겁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표징을 통해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죄와 죽음을 무너트리는 이 기쁜 소식이 먼저는 우리 모두의 마음과 영혼, 그리고 삶 가운데 가득히 채워지길, 그리고 또한 우리가 시대가 찾고 있는 그런 '징조'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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