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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11/01 성령강림 후 23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6. 10. 28. 16:48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여호수아 3:7~17 혹은 미가 3:5~12

      응송 | 시편 107:1~7, 33~37 혹은 시편 43

    2독서 | 데살로니가전서 2:9~13

    3독서 | 마태복음 23:1~12

     

    * 설교영상과 음원은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The Children of Israel Crossing the Jordan" by Gustave Dore (d. 1883)

     

    내 작은 기대를, 뚫고 오시는 이

     

    1

    11월의 첫 주일, 벌써 한 해의 끝자락에 닿았다는 것이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돌아보면 참으로 숱한 일들이 있었던 시간이었지만 놀라운 것은, 무심히 잊고 지냈을 뿐 우리의 걸음안에 감사할 일이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건강하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마음먹은 대로는 아니었어도 큰 탈 없이 지내온 것, 그토록 힘겨웠는데도 무너지지 않고 제 몫의 걸음을 감당하고 있는 것까지, 따지고보면 감사할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씩 기억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기특하고 대견하게도 한해를 잘 걸어왔구나! 싶으니 마음까지 따뜻해집니다.

    하지만 돌아보니 이 흐뭇한 감사의 내용들이 하나같이 ‘내가 기대한 대로 되었는가’를 기준으로 평가된 것들 뿐입니다. 기대에 맞으면 감사가 되고, 기대에 어긋나면 곧장 한숨이 되고맙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감사라는 것이 정말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내 기대가 얼마나 채워졌는지를 따져 보는 일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서일과 말씀이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다른지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가 바라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가 구원이 왔음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아니 요행히 알아차린다 해도, 내 기대와 다른 모습으로 주어진 구원을 기뻐하기는 할까요? 우리의 좁은 기대와 만족의 울타리를 넘어, 때로는 우리의 예상을 깨고, 때로는 우리의 절망을 뚫고 들어오시는 그분을, 오늘 말씀 속에서 만날 수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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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먼저 제1독서 미가서 말씀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예언자 미가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예언자라는 자들이 나의 백성을 속이고 있다. 입에 먹을 것을 물려 주면 평화를 외치고,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면 전쟁이 다가온다고 협박한다.” (미가 3:5)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예언자가 자기 입에 무엇이 들어오느냐에 따라 말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다는 고발입니다.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눈여겨볼 것은, 이들이 우리와는 다른 변두리의 악인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시대의 예언자요 지도자였습니다. 겉모습에는 권위가 있었고 그들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인정했고, 우러렀으며, 기꺼이 따랐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유독 어리석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듣기 좋은 말에 쉽게 마음이 열리고, 번듯한 사람에게 신뢰를 줍니다. 평화를 외치는 이에게는 고마워하고,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이를 불편해합니다. 내가 옳다고 느끼는 것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닐텐데, 그렇다면 우리의 기준은 말씀이 제시하고 있는 기준,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맞닿아 있을까요. 돌아볼수록 두려워집니다.

    앞서 언급했던 감사의 문제가 바로 이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기대가 채워져야 감사하는 마음이나, 듣기 좋은 말과 번듯한 모습에 끌리는 마음이나, 뿌리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두 ‘내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를 잣대로 삼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과 허세를 3독서 복음서 말씀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마태복음 23:2)

    사람들은 자신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가르치는 그들을 대단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는 우리와 달리,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계셨습니다.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어야 하는데, 그들이 가르치던 의로움과 거룩함은 늘상 사람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남의 어깨에 짐을 지우는 것, 그것이 그들의 외식하는 신앙의 정체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입으로는 불평하면서도 여전히 그들을 높였습니다. 학위와 직함, 대형 교회 목사라는 명함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오늘의 모습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런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높은 사람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랍비나 지도자 같은 이들을 닮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중간에 끼어있는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라는 9절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우리 식의 표현으로 바꾸어본다면 “우리 아버지가 뭐 하시는 분인 줄 알아?” 정도로 읽을 수 있겠습니다. 한번에 와닿지요? 그러니까 자신이 어느 지파, 어떤 집안의 후손인지를 앞세워 사람들 위에 서려는 그런 얄팍한 마음을 닮지 마라는 말씀인 겁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하나님만 아버지가 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하나님보다 높은 이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분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모두 그분의 자녀가 된다면, 그 순간 사람의 높고 낮음은 송두리째 무너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잘났는지 못났는지, 가진 자인지 아닌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같은 이름은 모두 지워지고, 높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이들이라는 이름만 남게 될테니 말입니다. 이보다 큰 복음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자, 그렇다면 당시의 사람들은 이 복음을 환호하며 받아들였을까요? 안타깝게도 그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늘상 높은 것을 바라보고, 큰 것을 신뢰하고, 눈에 보이는 권위를 부러워하는 세상에 너무 오래 길들여져 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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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렇다면 세상의 권위와 겉모습을 좇는 이 흐름 속에서, 참된 말씀의 길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2독서 데살로니가전서는 우리가 던지는 질문의 방향을 ‘누가 말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듣는가’로 바꾸도록 이끌어줍니다. 

    사도 바울은 종교적 권위를 내세워 군림한 이들과 달리, 밤낮으로 손수 일하며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어떤 이들이 종교의 권위를 근거 삼아 호가호위하는 동안, 복음의 전달자는 땀을 흘려야 했고, 오히려 교회로부터 외면과 배척을 받기도 했습니다. 바른말을 하는 이가 외면당하기 일쑤인 그런 세상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반응은 놀라웠습니다.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b)

     

    이 한 구절이 오늘 말씀 전체를 꿰는 열쇠입니다. 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이는 사람의 말로 듣고, 어떤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습니다. 사람의 말로 듣는 이는 그 말이 내 기대와 체면에 맞는지부터 따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이는 기대가 무너진 자리에서도 새로운 길을 찾아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눈에 보이는 것, 그럴 듯해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겁니다. 그렇게 주님께로부터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이들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이고 있던 겁니다. 그말씀이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믿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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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제 말씀이 듣고 흘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살아있는 능력으로 드러났던 구약의 현장으로 건너가 보겠습니다. 1독서 계속본문으로 읽은 여호수아 3장 말씀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젊은 지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장벽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 눈앞인데, 요단강이 둑까지 차올라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강이 넘쳐흘렀다는 장면은 사람의 힘으로는 더 이상 한 걸음도 건널 방법이 없다는 것, 그러니까 능력 밖에 있는 낯선 상황 앞에 직면했다는 것을 말하고있는 겁니다. 내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절망의 순간 말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대단한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주님의 언약궤를 메고 범람하는 강물 속으로 발을 내디디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선뜻 “아멘” 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이 본문을 두고 요단에 얕은 길목이 있었다는 식의 해석도 있습니다. 나름의 설득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그 타당성을 따지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런가하면 또 한편에는 문자 그대로의 기적사건으로 받아들여야 믿음이라고 윽박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분들은 으레 범람한 요단 앞이 아니라 아무일 없는 평지에서 큰소리를 냅니다. 왜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느냐고들 말하지만, 막상 홍해나 요단 같은 자리에 서게되면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 조급함에 떨어지고 맙니다.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아닙니다. 그들과 똑같은 상황에 있지도 않고, 똑같은 경험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말씀은 우리더러 요단에 뛰어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더 열심히 해 보자, 이렇게 살아 보자는 권면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 말들은 듣기에는 좋으나 실제로 살아내는 일과는 무관한 한가하고 느긋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강은 범람해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기적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언제나 바로 이런 순간입니다. 죽음이 뻔한 자리에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나라와 나라 사이의 불가능한 절망 앞에 선 예언자들의 예언도 같은 말씀들입니다. 그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다름아닌 하나님은 구원이시라는 것, 하나님이 이끄시고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올해 요단강은 무엇이었습니까? 도저히 건널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던 강이 있으셨을 겁니다. 강은 범람해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 우리로서는 정말 끝입니다. 성경의 기적사건들은 바로 이지점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고, 길을 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스스로 길을 열 수 없던 그 자리에서, 백성이 순종하며 내디딘 걸음 끝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을 밟고 건너서, 온 백성이 모두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주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강 가운데의 마른 땅 위에 튼튼하게 서 있었다.” (여호수아 3:17)

    제사장들이 선 곳은 마른 땅이었지만, 그들이 그 땅을 마르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물을 가르지도, 길을 내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말씀을 따라 발을 내디뎠을 뿐이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마른 땅 위에 서 있었을 뿐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곳에서, 마침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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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이제 우리의 자리로 돌아와 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 시선이 향하고 있는 번듯하고 힘 있는 곳에 있지 않음을 거듭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람한 강 한가운데, 홍해의 바다 앞에, 물이 없어 목마른 바위 위에,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절망하던 바로 그곳에 언제나 먼저 와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는 사실은, 말씀이 걸림돌이 아니라 복음이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이 우리의 기대대로만 온다면, 우리는 딱 내 기대만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넘어 오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지도 못한 곳까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모든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십니다.

    하반기 감사절로 예배하는 오늘 아침, 여러분은 어떤 감사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계십니까. 세상이 부러워할 만한 성취라도 있으셨나요. 오랫동안 바라던 꿈이라도 이루어졌나요. 아마도 우리 가운데 그런 일을 경험한 분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올 한해 범람한 강 앞에서 한 해를 보낸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도 건널 수 없는 건강 문제 앞에, 풀리지 않는 관계 앞에, 해결되지 않는 생계 앞에 여전히 비틀거린 채 서 계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까닭은, 우리의 형편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비록 죽음밖에 보이지 않는 세상, 여전한 삶의 무게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지만, 우리가 마른 땅을 딛고 서있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을 가르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건널 수 없는 강 한가운데 함께 서 계신 증거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의 찬미와 감사는 바로 그분을 높이는 기쁨의 고백입니다. 

    지금껏 그리했던 것처럼, 우리 시선이 닿는 곳마다 하나님이 이미 일하고 계신 ‘마른 땅’을 발견하는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말로 듣던 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로 열리고, 사람의 높고 낮음을 따지던 마음이, 만민을 자녀삼아 주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뀌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다시 그렇게 걸어갈 우리의 걸음마다, 내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어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로 채워지는 생명의 흔적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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