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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8 주현절성서의 거울 앞에 2017. 1. 8. 20:23
2017/ 01/ 08 주현절
본문 : 이사야 42:1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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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길어올리는 ‘주현절’ : ‘체다카’
1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인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우리들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의 현실속에서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라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경험상태를 말합니다
왜 하나님의 존재보다는 부재가 더 익숙할까요 ? 다시 말해 왜 우리들 삶에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시다는 경험이 더 많은 것일까요 ?
혹시 하나님이 부재하심의 경험이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닫힌 눈에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아니면 하나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은 아닐까요?
성경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은 직접 땅에 내려와 인간들과 만남도 가지시고, 말씀도 하시고, 때로는 직접 적군과 싸우기도 하시면서 자신의 전능성을, 자신이 살아있는 신임을 증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 지금은 이런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까요 ?
성경을 통해 발견하고 만나게 되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이런 세상에 호통을 치며 나타나 능력을 보이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
왜 하나님은 이 땅에 피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게 하시는 대신에 전쟁을 막지 않으실까요 ?
왜 하나님은 굶주려 죽는 이들에게 빵을 내려주시지 않을까요 ?
왜 하나님은 병들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낫도록 해주시지 않을까요 ?
왜 하나님은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죽임당하는 현실을 방관하시고 ?
왜 하나님은 이 땅에 모든 악을 송두리째 쓸어버리지 않으실까요 ?
성경의 기록속에 생생하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 부재하시는 하나님 사이의 간격은 대체 왜 생겨난 것일까요 ? 대부분의 성경이 완성되어졌던 AD1세기 즈음까지 그렇게 생생하게 역사속에 개입하시던 하나님이 이제는 사역을 쉬기로 작정하신 것일까요 ? 아니면 무신론자들의 주장처럼 애초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허약한 사람들의 상상속 존재일까요 ?
2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대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만나고 경험했던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어떤 경험이었을까요 ?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식으로 들려졌고, 전쟁에서 적군을 물리치던 역사는 어떤 경험이었고, 하나님의 사람과 만나주시던 만남은 어떤 식이었을까요 ?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성경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사람들의 서투른 일상과 치열한 역사속에서 경험된 ‘구원’ 을 통해 입증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만나시고 개입한 사건이 먼저일까요 ? 성경의 기록이 먼저일까요 ? 사건이 있고, 그 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게다가 성서학은 사건과 성서의 기록은 훨씬 더 후대에 이루어진 시간의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 해줍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역사의 한 복판을 살아내고 있던 사람들과 민족과 나라가 그들의 생존과 구원을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사건으로 해석한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릴적 사고로 부모를 잃고 천에 고아가 된 아이가 훌륭한 한 사람으로 성장해 낸 삶의 괘적을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삶을 돕고 계셨다고 … ‘
하지만 진짜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마음 착한 이웃들의 손을 통해 핏덩이었던 그 고아가 성장해 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증명됩니다
그 아이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세상 무엇보다 분명한 실재입니다 그가 죽지 않고, 버려지지 않고, 실재로 살아있음이 그 증거입니다 바로 그의 주변에 함께 한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의 사랑의 손길 가운데 하나님이 실재하고 계셨음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굶주려 죽게 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밥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밥이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밥을 제공할 사람을 보내십니다
돈 몇푼에 목숨을 걸어야하는 어떤 이들에게 하나님은 하늘에서 돈을 떨어트리시는 것이 아니라, 선한 독지가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십니다
자유를 찾아 지중해를 건너야하는 피난민들을 하나님은 쑥하고 이동시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휩쓸린 돕는 사람들을, 피난민들을 따듯하게 맞이할 수 있는 나라를 사용해 일하십니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은 숨어 계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속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실재로 하나님은 부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에 살아계시며, 실로 성실하게 일하고 계시는 분이분명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가 되게 하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한 거지 아이가 있었습니다 앵벌이 조직에 붙들려 있었기에 동냥한 목표금액을 상납해야만 하는데 채우질 못해 거진 죽을 정도로 맞아 버려졌습니다 사람들이 지나칩니다 더러운 거지 아니 하나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습니다 괜시리 불편한 일에 휘말리까 피해갑니다 그런데 사경을 헤매고 있던 그 아이의 눈에 한 사람이 보입니다 늙은 할아버지 거지입니다 수건을 적셔 피를 닦아주고 극진히 보살펴주어 살아납니다 이 아이는 나중에 커서 극적으로 목사가 됩니다 이분에게 하나님은 늘 자신의 생명을 살려주려 섬기던 늙은 거지였습니다
3 세상이 동경하는 구원자
그렇게 보면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사람은 참으로 중요한 존재입니다 이 사람안에, 이 한계 많고 연약한 사람안에 하나님이 계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권력이 있거나 힘이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이 땅을 구원할 구원자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아니 그 정도는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삶을 조금 낫게 해주려면 돈이 많은 사람이 필요하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힘이 있는 사람, 권력있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일 수록 걸음 걸이는 광폭스럽고 요란하기만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그 시대 바벨론과 같은 나라들이 그러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이나 유럽 열강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세상의 심판자처럼 으스대며, 큰 소리치는 사람들, 그런데 세상은 그런 이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구원자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기대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분이실까요 ? 아니, 그런 사람만 사용하시고, 그런 사람들에게만 함께 하시는 분이실까요 ?
4 체다카를 살아내어 이루는 미슈파트
오늘 본문속에 히브리어 ‘체다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의’라는 뜻입니다 본문 1~4절까지 3번이나 사용되고 있는 ‘미슈파트’ 즉 ‘정의’라는 단어와 항상 따라다니는 단어입니다 ‘체다카’는 형태가 곧거나 바른 것, 또는 도량형의 저울추나 자가 바른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무게나 가치를 재야하는 도량형의 저울추가 또는 길이를 재야하는 자가 정확하기 않다면 그것으로 재야하는 모든 것의 가치는 엉망이 되고 맙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무거운 추를, 어떤 사람에게는 가벼운 추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불의함입니다
그러니 ‘체다카’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사람 사이에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 악이나 죄가 없는 바른 삶을 말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본문 6절 ‘의롭게 살라고 너를 불렀다’는 말에서 ‘체다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르게 재어낼 수 있는 저울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에게 비추었을 때 그릇되었는지, 모자라는지, 넘치는지를 알 수 있도록 바르게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더해주고, 누구에게는 덜해주는,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편의를 제공하고, 나와 관계 없는 이들에게 엄한 사람되지 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그렇게 살아내라고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만일 오늘 우리가 이렇게 ‘체다카’ , 의를 이루며 살고 있다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종인 셈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그렇게 ‘체다카’를 이루며 살아갈 때,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본문 1절 이방에 베풀어지는 ‘미슈파트’ 즉, ‘정의’ 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의롭게 살아갈 때,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종의 의무는 ‘체다카’를 이루는 것이며, 하나님의 종의 사역은 요란한 소리하고 잘난 척하지 않고 ‘체다카’를 이루는 삶입니다
5 하나님의 종으로 드러나신 예수
오늘은 주현절입니다 주현절은 이 땅에 성육신 하신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의 그리스도, 인류 구원의 뜻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종이심이 드러나셨음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부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실재를 기대하고 있는 세상에 (이스라엘) 예수의 현현은 의아한 사건 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종이시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은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젊은이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이웃에 그저 그렇게 살던 사람의 본래 신분이 대단한 사람임을 발견할 때의 당혹감 처럼, 하나님의 아들예수, 하나님의 종인 예수의 현현에 세상은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차제하더라도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종이라면, 막강한 권세자임은 삼척동자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기에는 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은 대단히 의기양양했을 법도 한데, 예수의 삶은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예수의 현현은 사실 당혹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6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현현)
예수님은 헤롯왕이나 로마의 황제처럼, 으스대며,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소란스러운 자리에 앉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처럼, 그런 사람들에게만 잘 보이려 애쓰고, 힘없는 이들에게 냉정한 일그러진 저울추처럼 마음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하듯 가장 연약한 자들, 어린아이와 병자들을 대하셨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대하듯, 죄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곁을 하나님을 섬기듯 섬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에게 ‘체다카’를 이루는 삶을 살아내심으로 하나님의 ‘정의’인 ‘미슈파트’를 이스라엘 백성안에서 이루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7 오늘에 살아내는 체다카 ( * 우리 서 있는 그 곳에 주님의 주현이 임하도록
본문 5절을 유진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하늘을 펴셨으며, 땅과 거기 자라는 모든 것을 펼치신 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생명 불어 넣어, 그 생명으로 그들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체다카’ 의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란하고 으스대는 힘으로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배고픈 광야의 오천명 앞에서 작은 소년의 도시락을 통해 일하시고, 대단한 왕이나, 제사장이 아닌, 무명의 뱃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의롭다고 으스대는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던 세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이셨고, 힘없는 여인들의 헌신을 통해 부활의 아침을 여셨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사람 사이에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 악이나 죄가 없는 바른 삶을 사는 것,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진 그 일상에서 체다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생명의 주는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에 현현하시게 됩니다
우리가 길어 올리는 ‘체다카’를 통해 하나님은 7절 ~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풀어 주며, 어두운 감방을 텅텅 비우는 ‘미슈파트’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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