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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1/ 22 주현절 세번째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17. 1. 22. 18:05

    2017- 1- 22 주현절 세번째 주일


    본문 - 고린도전서 1:10 ~ 18


    https://youtu.be/vhxDNvvu3Y8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교회"






    1

    그닥 유쾌하지도 생산적이지도 않고, 이것을 바라는 사람도 없지만 사람이 두 명 이상만 모일 수 있는 공동체라면 언제나 불쑥 생겨나고 마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이것을 잘 해결하여서 더욱 견고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곳은 이것 때문에 끝내 상처를 주고 받다가 갈라지고 와해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 


    ‘분열’과 ‘분쟁’입니다

     

    분쟁이란 선하지 못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있는 곳에는 분쟁은 언제나 함께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며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이 분열이나 갈등을 가볍게 여기면 않됩니다 굳은 땅에 고랑을 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단 한 삽을 뜨고 난 이후에 다음 삽은 더 잘 들어가는 것처럼, 분열이 일어나고 갈등이 생긴 골은 점점 크게 벌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최고의 팀웍을 자랑하는 견고한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그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은 한두 사람안에서 시작한 작은 갈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최고의 팀웍을 자랑하며 챔피언의 자리를 지켜내던 명문 축구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볼을 독점하던 스트라이커와 수비선수 사이에서 시작된 작은 불화가 팀내에 편이 나뉘는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음해 이 팀의 성적은 리그 하위권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리그 최하위 팀에게도 패배하는 수모를 겪고 말았습니다 심판의 휘슬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지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이에게 볼을 전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비를 서로 미루기만 합니다 그러니 골을 넣어야할 때는 넣지 못하고 막아야할 골을 막지 못하니 패배할 수 밖에 없던 것이지요


    2

    반면에 갈등이나 분쟁이 무조건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말씀 드렸다 시피 갈등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생기는 차이입니다 오히려 갈등이라는 서로 다른 차이와 균열을 발견하고 이것을 메꾸고 채워 더 견고하고 튼튼한 상태로 나아갈 수도 있게 됩니다 벽돌을 쌓을 때 벽돌만 차곡 차곡 쌓지는 않습니다 벽돌 사이는 벌어져있고 그 벌어진 사이를 시멘트를 발라 채우는 것이 구조물이 더 단단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갈등을 통해 내가 보지 못하고, 내가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도 볼 수 있게 됩니다 나와 다른 이의 시각에서 보이는 것, 나와 다른 이의 마음에서 느껴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갈등은 ‘나’라고 하는 기준이 무너지고, 더큰 기준인 ‘우리’라고 하는 든든한 공동체를 세우도록 해주는 양분이기도 합니다 갈등없이 언제나 마음이 통하고, 언제나 똑같은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는 할까요 ?과연 그런 공동체가 행복한 것일까요?


    공동체가 누려야할 최고의 덕목은 하나됨입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하나됨을 경험할때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이런 모습으로 설 수 있는 하나됨에 기뻐하게 됩니다 

    하나됨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일까요 ? 서로 다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하나됨이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오늘 본문 고리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써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는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땅입니다 철학과 신화에 사로잡혀 있던 그리스의 항구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성적 타락이 극심했던 곳이었습니다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의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코린토죠마이’라고 하는 고린도도시 이름을 단어로 사용했는데, 그 뜻이 ‘고린도인처럼 산다’라는 의미입니다 부폐하고 타락한 이들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될 정도였으니 얼마나 무너진 도시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땅에서 예수를 그리스도 믿는 이들이 세워졌습니다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가슴 벅찬 일입니다 신들의 도시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풍요의 도시에서 예수를 믿는 이들이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본디 사람의 천성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후서 안에 담긴 내용은 참으로 주옥같지만 실상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모르거나 없기 때문에 하는 것임을 감안해 본다면 고린도교회는 사랑이 없었고, 고린도교회에는 은사의 남용이 있었고, 오늘본문을 보면 심한 갈등과 분열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똑똑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철학과 신화라고 하는 문화적 토양이 그들을 다른 도시의 사람들보다 세련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도 뚜렷합니다 그런 이들이 지금 교회에 모여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를 떠나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글로에를 통해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이 기쁘지 않습니다 분열과 갈등이 교회안에 극심하다는 소문입니다 단순한 갈등이라면 바울이 그닥 걱정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대체 왜 그들은 분열하고 있었을까요 ?


    4

    12절을 보니 고린도교회가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의 네파로 나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나뉨의 이유는 1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 ? 라는 것으로 다투고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로 치면 나는 유명한 목사님께 세례를 받았다 나는 감리사에게, 나는 감독회장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다툼입니다 다툼의 근본은 결국 ‘내가 더 잘났다’는 것입니다 나는 더 훌륭한 사람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임을 은근히 자랑하려는 못난 마음이 베어있습니다 


    바울의 호통이 13절에 이어집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가가 못 박혔으며 너희가 받은 세례가 바울의 이름으로 받은 것이냐 ? 되묻습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 세례는 내가 예수를 믿어 이전까지의 삶을 모두 죽은 것으로 여기고 이제부터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임을 믿는 신앙고백을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온 교회가 확증하여주는 예전입니다 세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는 죽고 다시 살아났다’ 에 있습니다 


    지금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 내가 죽었다면 죽은 내게 무슨 자랑 거리가 있을까요 ? 내가 죽었다면 누구의 빽이나 배경이 대체 무엇이 그리 대단할까요 ? 죽은 이에게 돈은 무엇이 필요하고, 권력이나 빽은 뭐가 필요할까요 ?


    안타깝게도 우리는 본질은 보지 못하고 중요하지 않은 허상을 붙들고 말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이 우리 입니다 


    여러분 한번 눈을 감고 생각해보세요

    만일 여러분에게 한달간의 생명이 남아있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

    일주일이 남았다면, 하루가 남았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 생이 한달 남았다고 생각했던 것과 하루가 남았을 때 하려고 했던 것이 같은가요 ? 하루가 남았는데도 돈 벌러 가시겠습니까 ? 하루가 남았는데도 권력과 명예를 찾아다니시겠습니까 ? 하루가 남았는데도 욕심을 채우며 살아가시겠습니까 ? 하루가 남았다면 하려고 마음 먹은 것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하며 삽니가 그것이 '죄된 인생'입니다



    5

    성경은 우리를 ‘죽은 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고발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행복을 얻으려고, 평안히 살려고 달려가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과 삶은 죽음을 쫓고 있습니다 여전히 생명을 소비하면서 죽음을 붙들려고 하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허망에 눈이 가려진 이유가 우리가 바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사망의 지배를 풀어내시고 우리를 살아있는 자되게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영원히 사는 자가 되게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과정안에 우리들의 공로는 하나도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음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보지 않았으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체 우리가 어제 저녁에 믿었기에 아침이 온 것입니까 ? 우리가 믿었기에 역사는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 우리가 믿었기에 오늘 이 모습, 이 삶의 자리가 찾아온 것일까요 ?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와 관계 없이 지금도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기에 곧 저녁이 올 것이며,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와 관계 없이 역사는 존재해왔고, 내가 받아들이 수 있느냐 없느냐와 관게 없이 이 땅은 수 많은 신비로운 돌보심을 통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의 죽음이라는 가장 처절하고 가장 절망적인 최후의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내셨습니다 이 사건은 여러분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와 관계 없이 이미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문제는 이제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해하신 이 사건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이지요


    이 믿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말도 되지 않는 사건을 통해 누군가는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믿지 않으면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건일 뿐입니다 주어진 구원이니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절망의 삶에서 건짐을 받았음이 구원입니다 그러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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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음을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잘나서도 아니고, 내가 똑똑해서도 아니고 내가 돈이 많아서도 아니고 앞으로 잘나갈 것 같아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은혜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 즉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나는 이제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 세례를 어떤 목사님이 주었는가 ? 얼마나 유명한 사람이 주었는가 ? 어디에서 받았는가 ? 이것입니까 ? 내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내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구원자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를 살리려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어준 예수, 그러니 '십자가의 도'는 나 죽어 너 살리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예수를 통해 나의 죽음을 발견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들은 살아있습니다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자신들의 무능과 절망으로부터 구원받은 존재, 죽음에서 살림을 얻은 존재임을 잊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예수 없이 살아있습니다 지금 그들에게는 바울, 게바, 아볼로와 같은 번지르르한 이름값으로 채우려는 자신만 존재할 뿐, 자신을 위해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보이질 않습니다 그 어디에도 !!!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똑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지혜있고 합리적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부자로, 권세있게 살 수 있는지 잘 아는 이들입니다 자신들의 가치, 자신들의 방법, 자신들의 명예만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전히 그들에게는 그들 자신의 살아있음이 크게만 보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교회안에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도 구원도 십자가의 복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가진 똑똑함이, 그들의 지혜가 도리어 구원을 받은 이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습니다 구원의 길을 막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들의 살아감을 가만히 살펴보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 본질과 부수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버리고 정말 가치 없는 것은 소중히 여기는 어리석음이 우리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처럼 꽤 똑똑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것을 구분할 줄도 모릅니다


    내 가진 것 자랑하는 것이 미련하고 하나님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내 명예를 드러내는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에 머무는 것이 기적입니다

    내 힘과 지혜를 믿는 것이 아닌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7

    바울은 18절에서 외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이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의 방식이나 유명세나 업적이나 사람됨됨이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한 평생 호흡이 끝마쳐지고 흙으로 돌아가 사라지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으니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입니끼 ?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심’으로 초대하신 사건입니다 죽어야만 살아납니다 지혜있고, 똑똑하고 말 잘하는 고린도인들에게 이것은 여전히 이해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잘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능력은 말 잘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능력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도를 따라 구원받은 우리의 삶의 걸음은 늘 ‘내가 죽고’를 발견하는 자리가 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죽으면 손해보고, 내가 죽으면 끝이 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도는 실패가 승리임을, 죽음의 자리가 생명이 되는 자리임을 증거합니다


    2017년 한해 십자가에서 발견되어지는 한 사람 한 사람, 십자가에 속하여있는 복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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