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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12/10 대림절 둘째주
    성서일과로 써가는 묵상일기 2023. 12. 6. 17:42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40:1-11

      응송 | 시편 85:1-2, 8-13

    2독서 | 베드로후서 3:8-15a

    3독서 | 마가복음 1:1-8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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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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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침례)를 베풀다 –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作

     

    마땅히,  보고 듣는  '복'

    # 01

    대림절 두번째 주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만약 ‘대림절’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설레임이 식는다면, 기독교의 심장을 잃어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가 그냥 허투루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그 태생부터가 하늘을 향한 기다림에서 시작했고, 예수 재림으로 역사가 완성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마무리 될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기다림이라는 것은 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대감만으로 모든 것이 저절로 채워지거나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에 익숙해진 분들에게는 ‘기다린다는 것’이 지금의 삶을 포기하고 파괴하게 만드는 힘겨움으로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꾸만 ‘기다림’이나 ‘소망’에 대해 냉소적일 수 밖에는 없게 됩니다. 한고개를 넘으면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싶은 나그네의 마음처럼 ‘약속’만 분명하다면 기다림이 반복된다고 해도 설레임을 잃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이것이 힘겨운 분들에게는 여전히 기다려야 하는 현실은 답답하고 힘겨울 뿐입니다.

    사실 ‘무언가를 기다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빼놓고 보면, 오늘은 어제와 별반 달라진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늘 똑같다는 말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 기다림이 언제 끝이 날지, 어디까지 가야하는지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기다려야만 하는 ‘오늘’에만 시선이 갇혀, 기다림이 비추어주고 있는 ‘내일’을 놓쳐버리게 되면, 곧장 절망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 보다 먼저, 그리고 더 극심한 암울한 현실에 떨어졌음에도, 약속을 붙들고 기다렸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1독서 구약본문에서 읽게 되는 ‘이사야’의 말씀은 이런 형편에 떨어진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여전히 변한 것 하나 없는 투박하고 거친 삶을 믿음으로 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의 삶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불의와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에서도,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이사야’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소망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까요?

     

    # 02

    물론, 선지자가 전한 이야기라고 해서 읽기만한다고 절로 힘이 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되려 마음이 힘들어지고, 시험에 떨어지게 될른지도 모릅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읽어볼까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 이사야 40:6b - 8

     

    여기에서 ‘풀’은 바벨론과 같은 ‘제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선지자는 현실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보일 뿐입니다. 바벨론은 bc 587년 유다를 멸망시켰을 만큼, 세계사를 주름잡고 호령했던 거대제국입니다. ‘바벨론'입장에서 보면 ‘유다'는 속된 말로, 끽소리 조차 내지 못한 채 무력하게 망할 수 밖에 없는 볼품없는 나라일 뿐입니다. 그러니 풀이 말라 버리는 것처럼 ‘제국 바벨론’이 망하게 될 것이라는 선지자의 외침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겁니다.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기가 더 쉬웠을 겁니다. 지나고 난 이후의 결과로 읽게 되는 성경의 기록이나 역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패망의 때로 돌아가서 이사야의 외침을 듣게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선지가가 외치는 이 말을 듣고 현실에서 공감하고 실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경험이나 본성은 이사야가 전하는 말이나, 하나님 말씀이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틀렸다고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아우성과 하나님의 말씀, 어느 것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까? 어떤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 03

    복음서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 마가복음 1:1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야가 맞으시다면, 그야 말로 1독서 이사야서에서 언급되었던 ‘주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 틀림이 없습니다. 8절까지의 본문은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장면을 통해, 요한이 기다려야 할 ‘메시아’가 오시기 전까지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오늘 본문은 11절까지 읽어야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찾아오신 대목입니다. 9절부터 시작해서 11절에 이르러 마침내 그는 그토록 기다렸던 ‘그분’과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9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은 8절까지 강가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외치던 사도 요한의 기다림이 마침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세례 요한의 기다림이 성취된 이 장면은 두가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 마가복음 1:10, 11b

     

    하늘로부터 시작해서 땅으로 이어지는 ‘장면’과, 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자신이 세례자 요한의 있던 그곳에 서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사실 요한 자신도 이 장면을 보고 들은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후일에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혔던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분이 당신이냐?’고 물었던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장면을 보거나 듣지 못한 채 지나쳤을 겁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그때 예수님에게서 일어났던 이 사건을 믿고 있을 뿐입니다. ‘믿는다는 것’을 보거나 듣는 것 보다 열등한 것처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믿음’이야 말로,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계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실 수도 있습니다.

     

    # 04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이 조건이나 형편 같은 것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인생 자체가 충분히 만족스러워졌고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여기에 계시는 예수님을 실감하는 것이, 믿는 것의 핵심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실감한다는 것은, 곧장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어야만 합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만이 ‘기업’이시라고 외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팔복’을 가르쳐주시면서,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 있어도,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조건이나 형편에서만 본다면 주님이 가르쳐주신 ‘팔복’을 ‘행복’의 이유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삶이란 비참하고 서러울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가 생각하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과 너무나 다르다보니, 실감이 나질 않고 능력이 되지 않으니 여전히 삶이 힘들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팔복’의 말씀을 통해, ‘가난’하거나, ‘애통’하면 행복해지게 될 것이라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행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선언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경험’이 핵심인 겁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우리는 주님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릅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 그 안에 어떤 것이 담겨있는지를 아는 것과 실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이 차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05

    요한이 외쳤던, 하늘로부터 임하게 되실 그분에게 일어났던 현상은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는 것을 ‘보는 것’과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말씀을 ‘듣는 것’ 두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말씀이 실제로 그런 장면이 눈에 보였다거나, 귀로 듣게 되었다는 식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이게 실제로 보이고 들리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겨울 밤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달이 떠있는지 조차 모른채 추위를 피하기 위해 황급히 집을 향해 달려가기도 하고, 또는 힐끗 올려다 본 겨울 하늘의 달이 맑다고 말하는 것이 전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토벤 같은 사람은 밤 하늘의 달안에서 소리를 듣고 고스란히 악보로 옮겼습니다. 그것이 ‘월광’ 소나타입니다. 시인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보통이라면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고 말지만, 시인들은 잎을 모두 떨구고 앙상해진 겨울 나무들의 슬픈 이야기를 듣습니다. 온통 오염으로 탁해지는 하늘을 보면서 지구의 아우성을 듣기도 합니다. 실제로 들리는 어떤 소리는 아니지만, 실체를 읽어내고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는 겁니다. 이제 다시 읽어보십시오. 이 두 가지 장면이 우리들에게 전하는 것은, 지금 이 모든 것이 ‘하늘’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예수님과 이제부터 이루실 그분의 모든 사역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늘의 음성인 겁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세례를 받으시던 그 순간을 다른 사람들이 보거나 듣지 못했던 것처럼,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을 보거나 듣는다는 것이 아무에게나 일어나고, 경험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들을 수 없으니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들은 듣고 볼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신비’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 ‘신비’를 들여다보는 사람들,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경험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예수님 또한 우리에게 전혀 다른 존재가 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개혁이나 변화를 이끄는 혁명가로, 어떤 이들에게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과 함께 하는 휴머니즘의 화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구원입니다.

     

    # 06

    11절의 말씀은,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라는 소리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건 경험하기 이전까지는 결코 믿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애당초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들이면서 아버지이고 아버지이면서 아들인 것처럼 하나님이면서 사람일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살해했던 겁니다.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십자가’ 역시 아무리 이야기하고 찬양하고 내세운다고 해도, 무능하고 무익한 실패의 자리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유대인들이 꺼리고 헬라인들이 어리석다고 말했던 것(고전 1:23)처럼 피하고 싶은 자리로 남을 수 밖에는 없습니다. 죄인들이나 매달리는 ‘십자가’는 여전히 ‘실패’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나 기준과 무관하게,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거나 다른 것을 바라는 우리들 생각일 뿐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놀랍지만, 여전히 우리 몫으로 주어진 ‘십자가’는 세상이 조롱하고 비웃는 실패의 길로 밖에는 보이질 않습니다. 그런 탓에 목회자들도 큰 목회, 작은 목회를 비교하고 우월감이나 좌절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예수 믿어 세상 사람들처럼 잘 살고 형통해지는 복받지 못하면 실패한 것처럼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주 달리신 십자가’는 철저하게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일 뿐, 우리는 이런 이런 길을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십자가’안에 오롯이 새겨져있는 하나님의 구원이 보이질 않는 탓입니다. 이게 솔직한 겁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은혜라는 것도 경험하기도 하고 실감한다고 해도 어느 순간이면 한 여름 뙤약볕 아래에 뿌려진 이슬이 말라버린 것처럼 흔적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뿐만인가요? 주님을 믿고 있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채워지질 않고, 구원의 확신이 사그러지기도 합니다. 어떻게해서든 이런 현상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럴 수록 신앙은 조급함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이건 내가 특별히 열등해서가 아니라, 당연한 겁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하나님과의 소통이 깨어진 탓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정의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이 보이질 않고, 하나님의 생명이 실감나질 않으니, 자꾸만 하나님 없이 자기 힘으로 삶을 완성하려는 자기애로 떨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늘상 모든 상황과 일들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만 해석하려는 자기 중심적인 존재라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문제를 끌어안고 평생을 걸쳐, 그 날이 올때까지 싸워야합니다. 죽는 날까지, 종말이 찾아올 때까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죄의 속성과 싸우는 겁니다. 이 문제는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에 의해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기꺼이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할 만큼 마음이 부드러워질 때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하고 할 수 있는 것은, 허무해 보이고 납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고 들이지 않는 말씀안에서, 하늘의 영광을 보고 하늘의 소리를 들었던 이들의 경험을 바짝 따라가는 것 뿐입니다. 그 걸음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쫓아가다보면, 어느 순간 하늘을 울리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는 오늘도 대림절 두번째 초에 불을 밝힙니다.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 어둠을 몰아냄으로, 내 마음안에 먼저 오실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를 경험한 이들만 재림의 주를 기다릴 수 있고,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만이, 재림의 주님이 가지고 오실 그 날을 기대하는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대림절 두번째 주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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