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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의 경계에서...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2017. 3. 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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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시간, 대한민국은 헌정사에 오점으로 남을 현직 대통령 탄핵 선고를 하루 남기고 태풍의 눈 속에 잠겨 있는 듯한 긴장속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내일이 오면' 지금까지 걸어왔던 걸음과는 전혀 다른 걸음을 시작해야만 할 것입니다
대통령 탄핵이 옳은가? 그른가? 에 대한 의견은 잠시 접어두고 대체 왜 우리 사회가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 기관차 마냥 이렇게 갈등을 향해서만 치닿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국정논단, 무능과 무책임, 비도덕성 등의 문제보다 더 엄중한 현실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팩트와 그에 대한 해결책을 두고 민의를 모으고 뜻을 모아도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앞에 있음에도, 작금의 갈등 국면에서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상대라고 지목한 대상을 향한 맹목적인 적대감만 발견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해석의 메카니즘이 다르니 그에 대한 반응이나 대응도 당연히 다를 수 밖에는 없을터이지만, 오늘의 현실은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 '본능적?' 선동만 보이지 않던가요 ? 그것은 비단 박사모라 불리우는 측 뿐 아니라 촛불로 대변되는 측면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 관찰하고, 해석하고, 반응하는 이성적 직관을 발현하지 못하고 프레임의 틀과 선동, 거짓과 왜곡을 분별하지 못한 채 보편적 이성과 시민사회의 의식, 양심이 무너지게 되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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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을 부추겨야만 하는 세력의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부추김이 직접적인 원인이겠지만, 조금만 더 시야를 넓혀보면 더 큰 틀에서의 문제가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원인은 '관점'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약점은 '다름'에 대한 천박한 폭력적 반응이라고 단정지을 수 밖에는 없으며, 이는 신학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발견되어지는 모습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다름을 주장하는 이나, 우월적 지위에서 다름을 부인하려는 이나 표현은 다르지만 본질은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너는 틀리고, 나는 맞다' 라는 주장말입니다
나는 틀릴 수 없고, 너는 맞을 수 없다는 속 마음이 있는 한, '내가 틀리고 네가 맞을 수 있다' 가 거북합니다 그리고 '나는'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다수 앞에서 자신을 숨기고 싶을 때 '우리'라는 말 속에 숨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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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현실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민주주의'를 수호해야한다는 사명감으로 상대를 향한 무차별적 폭력과 증오에 붙들려 있는 모습의 이면에는 실상은 언제나 '나'는 옳다는 기막힌 오만이 자리잡고 있지 않나요 ?
'민주주의' 라는 것은 한 사람의 철인이나 초인에 의하지 않고, '민의'라고 하는 다수의 의견에 의한 가치로만 존재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내 가치와 상반되어도, 함께 하는 다수의 가치에 승복하는 것 말입니다 이 출발은 소수의 독점적 권력과 폭력, 부당한 착취와 지배로부터 다수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부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식의 가치가 충돌하고 있을까요 ?
애국을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내 가치가 무시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며, 내가 나라를 지켜야겠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힘들었던 옛 시간이 무시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 그 시간이 부정되는 것은 결국 그 안에 살아온 내 삶이 부정되는 셈이니 말입니다
다른 한편도 실상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꼰대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자신이 손을 들고 있는 자리의 의미도 모른 채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 두지 않는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삶, 단 한번도 현실의 모습에 책임적으로 참여해보지 못했던 시간을 반성해보지 않은 채, 패거리 속에 안주하며 나는 정의?로운 편이라고 소리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다수속에 머물면서, 편을 만들면서 역시나 타인을 향해서는 무례하고 난폭해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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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선동하는 정치인들이나, 그것이야 말로 신앙적 사명이라 여기며 왜곡된 기사와 거짓 뉴스를 퍼 나르고 있는 기독교인들, 많은 후배들에게 존경을 받던 목사님들의 변절?의 이야기들이나, 신학과 신앙을 들먹이며 공적 사회와 타인을 위하여 살아야하는 기독교 신앙의 가치를 '나'라고 하는 이기적인 탐욕의 경계로 끌어내리려는 모든 시도들은 악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은총과 자비에 기대고 있음에도,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사랑 대신에 맹목적 신앙과 차별, 경계의 벽을 통해 끊임없이 '나'와 '우리'의 바벨탑을 쌓으려고 하고 있으니 그의 지향하는 바는 악하다고 할 수 밖에요
진리가 될 수 없는 '나'를 위한 소리를 높이려닌 거짓을 양산하고 기댈 수 밖에 없는 악순환에 매몰됨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공동체의 윤리와 가치에 맞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겸비하고 끊임없이 들어주고 끊임없이 양보할 수 있 삶의 태도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실 너무나 당연한 삶의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온 세상의 주가 한 하나님이시니, 세상 모두는 섬김과 화해, 그리고 사랑의 대상이며, 우리의 주되신 예수께서는 끝까지 자신을 죽여 타자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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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름의 가치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 다름 속에서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폐기시키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름의 인정이 '악', '불의', '거짓'에 대한 용인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기독교 신앙의 수용과 인정은 진리와 진실을 거스르는 일체의 행위를 '악'으로 규정하고 저항하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그 언어가 때로는 목숨도 내어놓게 만드니 기독교신앙이 고백하는 이 말들은 대단히 적극적인 언어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여하튼 우리는 다름의 사이에 있을 때에야 '나'도 '우리'도 건강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름이 왜 다름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때에야 내가 서 있는 길도 보이기 마련입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옳고,
내가 세상을 바꾸고,
내가 구원자라고 하는 오만적 독선을 벗어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자이심을 믿는 이라면,
'나는 구원자 일 수 없다'는 세례 요한의 고백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관점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입이 '사랑'을 말하든, '정의'를 말하든, 어느 쪽에 있더라도 적용해야할 해석의 기준이 있습니다 이 주장의, 이 결정의 결과와 목적지가 '나'를 위한 것인지 '타자'를 향한 것인지 말입니다
자기 만족을 위한 선행은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하여도 탐욕의 결과일 뿐입니다
연약하고 가련한, 힘없이 고통당하는 권력의 변방에 있는 타자를 향한 자비로움이 우리의 눈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선이 바로 그곳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한 없이 반응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자기 내적인 신앙적 삶으로 뿐만이 아니라, 자기 외적인 공적 삶의 영역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빛과 소금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의 삶이지 않을까요 ?
사순절 두번째 주일을 향하고 있는 오늘 밤은... 깨어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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