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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5/ 07 부활후 4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7. 5. 7. 19:30
2017/ 5/ 7 부활후 4주
본문 - 요한복음 10:1 ~ 10
https://youtu.be/C_kCWNFUDgc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
1
며칠전 가족들과 식사중에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면 상금 삼백만원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최종 관문앞에 출연자들이 서 있습니다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우승으로 받은 상금 삼백만원을 기쁜 마음으로 불우한 이웃에게 기부하시겠습니까 ?’
‘예’라고 말한다면 어차피 상금 삼백만원은 내것이 아니게 되고,
그렇다고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상금은 받을 수 있지만, 탐욕스러운 자신의 모습이 여과없이 방송을 타게 됩니다
한 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
모두들 꾀를 내보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예’라는 거짓말이 드러나고 맙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출연자는 조금도 생각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예’라고 답변하였는데, 그 답이 ‘진실’이었습니다 어떻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선뜻 예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 그는 상금이 아깝지 않았던 것일까요 ?
참으로 고마웠던 것이, 망설임 없이 진실을 말했음이 입증된 그 순간 국민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던 그 출연자의 지나온 삶의 모습들이 얼마나 한결 같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한결같이 믿을 만한 사람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 무슨 보상이라도 받은 기분이 드는 것은 오늘 우리 사회가 그만큼 믿을 사람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하니 씁쓸하기만 합니다
2
‘한결 같다’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처음과 끝이 같다’는 것입니다
또한 처음과 끝이 같다는 말은, 그 과정 또한 처음이나 끝과 변함없이 동일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언제고 불쑥 찾아가도 머릿속에 기대하던 모습 그대로 이질감 없이 만날 수 있음이고,
다른 이들이 보고 있지 않은 자리에서도 여전히 그는 같은 모습으로 있을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결 같다’ 라는 말이 가져다 주는 느낌과 기대감이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한결 같은 사람 만나기는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그런 류의 사람을 만나게 되어도, 그 한결 같음이 다른 이들을 아프게 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모습으로의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야 말로 참으로 한결 같기는 합니다 비록 그 한결 같음 때문에 마음은 답답하고, 살아감은 버겁기만 하지만 말입니다
세상이 변하였다고 해도,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삶의 수준이 올라갔다고는 하여도, 촛불의 힘이 부패함을 물리치고, 장미대선을 치르게 만들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사람들의 삶은 팍팍하기만 합니다 여전히 청년들의 내일은 불투명하고, 여전히 고통 가운데 거하는 이들은 눈물 짓고, 탐욕에 물들어 진리를 거스르는 이들의 큰소리도 여전하기만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어렵사리 땀 한방울 처럼 건져낸 ‘한결 같음’을 살아낼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해야 선한 일에 한결 같고, 불의하고 그릇된 길에서는 변화되어질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요 ?
3
지금 한반도는 ‘5월 장미 대선’을 치르고 있습니다 여러 후보들이 나와 저마다 주장을 하며 표를 호소합니다 딸 아이가 어떤 사람을 선택할 것이냐고 묻기에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하는 말에 현혹되지 않고, 그 사람이 지나온 한결같은 삶을 보고 판단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한 사람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지나온 시간들이 그가 누구인지를 한결같이 말해주니 말입니다 평상시에 그가 누구를 만나고, 누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무엇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왔는지 말입니다 그것을 보게 되면 앞으로도 그 사람이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과연 그의 말이 그 자신이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한결 같음’은 참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냅니다
4
자… 이제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 봐야겠습니다
‘한결 같음’이란 참으로 어려운 주제입니다
아니, 어쩌면 ‘한결 같음’은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가치일 뿐, 도달 할 수 없는 불가능의 언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여러분의 ‘한결 같음’은 어떤 점에서 발견되어집니까 ?
여러분의 한결 같음은 누구를 향하고 있으며,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
한결 같이 게으르거나, 한결 같이 이해심이 없거나, 한결 같이 부정적인 모습이지는 않습니까 ?
사람이 보이지 않고, 한결 같이 물질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
나의 ‘한결같음’이 나 자신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까 ? 아니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소리치고 있습니까 ? 지나온 패배주의로부터 벗어나 있습니까 ? 아니면 여전히 그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까 ?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성장이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그를 믿고 그의 세계를 들여다보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까 ?
우리의 정직성은 정말 처음이나, 과정이나, 끝이 동일하였었나요 ?
예를 들어,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가요 ? 인간의 가치중에 가장 고귀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랑말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 같음을 약속할 수 있으셨습니까 ? 부모 자식간의 사랑도 한결 같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부모의 욕망이, 부모의 감정이 투사되기도 합니다 왜곡된 감정으로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 않았나요 ?
한결같음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갈등이나 유혹으로부터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것보다 더 큰 가치와 기쁨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한결 같음’ 이라는 말은 그것을 추구해가는 우리의 평균적인 것을 의미할 뿐, 애당초 우리는 한결 같음이 불가능한 존재들일 뿐입니다
새로운 각오와 결단을 세워도, 그것이 한결 같음으로 이어지지 못함은 우리에게 시험이나 유혹을 이겨낼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5
그런데 오늘 성서일과로 주어진 사도행전 2장을 읽어보면, 이 불가능한 한결 같음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행 2:42 ~ 47 까지의 본문을 보니, 부활의 기쁨과 감격으로 살아내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이 기술되어 있습니다읽어볼까요 ?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떤 이들이며, 그들의 교회 공동체는 어떤 삶 위에 세워졌었나요 ? 예수를 믿기 이전이나, 예수를 믿고 난 이후의 삶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그냥 동일한 것이 아니라, 난과 절망의 시대라고 말하는 오늘 우리 시대보다 더한 가난과, 핍박, 고통이 함께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믿고 난 이후 그들에게 찾아온 기쁨 그대로, 모이기를 힘썼으며, 그들은 매일 함께 떡을 떼며 나눔의 식탁을 가졌고, 또한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힘을 썼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처량하고 비참한 매일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길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메시지성경은 “그런 살아감에 자신의 삶을 드렸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kjv 버전은 “그들은 한결 같았다 /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하는데에…. “ 라고 소개합니다
여전한 가난, 여전한 핍박과 고난, 여전한 좌절과 고통, 계속되는 죽음의 공포속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함께 나누는 식탁에 모였고, 여전히 기도하는 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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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들보다는 나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힘이 들거나, 바쁜 일이 있으면 기도하지 못합니다 스케줄이나 약속이 생기면 예배를 지켜내지도 못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도, 그렇게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한결같음으로 지켜내지 못하고 마는 우리 입니다
생활에 필요가 생기면 하나님 앞에 드림도 무너집니다 조그마한 유혹이 찾아오면 예수 믿는 이가 걸어가야할 진실함과 정직함의 길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이들과 우리의 사이에 차이를 만들어낸 근본이 무엇일까요 ?
오늘 같이 읽은 요한복음 본문은 선한 목자와 삯군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얼핏 양들의 책임에 관한 주제로 읽힙니다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를 것인지, 삯군의 소리에 홀릴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읽고보면, 그의 삶의 자유와 구원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있는 문제일 뿐입니다
그런데 조금더 주의 깊게 읽어보면 본문은 어떤 양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선한 목자’가 누구이신에 대한 메시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선한 목자는 각각 양의 이름을 불러내는 목자입니다
각각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각각의 양을 아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자는 불러낸 양 앞에서 인도하며 생명을, 더 풍성히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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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요한복음은 가장 빠른 것이 AD 80 ~ 2세기까지 사이에 기록된 기록물로 보고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이미 다 순교한 이후, 노구의 몸을 이끌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던 사도 요한의 눈에 들어온 교회의 모습은 안타깝기만 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미루어지고 있고,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과 대 학살, 민족의 상실감, 그리고 교회에 대한 박해라는 현실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결국은 주를 따르는 길을 포기하는 이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눈에는 그래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그래도 이 믿음의 길을 한결같이 지켜내겠다고 몸부림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언제 죽을지 모를 현실속에서 비틀거리면서도 신앙을 붙들고 있는 그들이 빈들에 버려진 양들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시련을 이겨낼 소망을 가져보려고 해도 멈추지 않는 가시밭길, 아무리 기도하고, 간절함으로 걸어도 변하지 않는 현실,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야 말로 진리의 길임을 알기에 버티고는 있지만 양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선한 목자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양을 지켜내기 위해 절벽이나 낭떠러지, 사나운 짐승의 영역이라도 주저함 없이 달려가는 선한 목자, 다리가 부러지고 깨어져 일어날 수 없는 양을 내 양이라며 기꺼이 들쳐업고 걸어가는 선한 목자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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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처럼 들리는 말씀으로 맺음을 지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의 걸음을 주 안에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함에 한결같음으로 걸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각오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목자되시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여전히 한결 같이, 허튼 유혹과 기만하고 속이는 이들이 아닌, 같은 믿음안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한결같음은 우리가 하는 어떠한 행위가 아닙니다
그분의 양이기 때문에 우리를 지켜내시고 이끄시는 선하신 목자, 그 한결같으신 목자가 바로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 출발입니다 우리의 한결 같음은 바로 그 지점에 있어야만 합니다
어떻게 그분을 믿을 수 있습니까 ? 그분의 한결같음을 읽어내면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분이 나를 아시고, 이끄시고, 생명을 주시는 목자이심을 믿을 수 있습니까 ? 그분이 한결같이 걸어가신 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한결같으심 - 우리는 그것을 ‘신실하심’이라고 읽습니다 - 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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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믿을 만한 분이심을, 그분이 한결 같은 분이심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다시금, 우리는 다시금 떡을 떼고, 교제하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 자리에 언제나 우리를 찾아 성큼 성큼 뛰어 오시는 선한 목자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다리 부러진 그 양과 같지만, 선한 목자 예수께서 지치고 상한 저와 여러분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어찌해야하는지가 아닌, 우리의 선한 목자가 함께 하신다는 것 ! 나를 아시는 선한 목자가 함께 하신다는 그것이 진정한 소망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찬에 참여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고, 기도하면서 선한 목자를 기억해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이 식탁에 참여함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는 선한 목자를 만나게 됩니다 병들고, 다쳐서, 주저 앉아 있는 양을 향해 찾아오시는 선한 목자가 지금 이 식탁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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