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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05/ 14 부활절 5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17. 5. 14. 14:27

    2017/ 5/ 14 부활절 5주


    본문 - 사도행전 7:55 ~ 60


    https://youtu.be/Sbj-RFd51bw  = '클릭' 하시면 설교 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보았길래 .....'



    1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주님의 평화 가운데 살아내셨습니까 ? 선거를 치르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한 주간 그가 보여준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첫번째 만난 이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이었음을 보면서, 그의 가치와 시선이 아픈 이들, 상처받은 이들을 향하고 있음을, 첫번째 외부일정으로 찾아 간 곳이 공항 비정규직들이었음을 보면서 사회적 약자를 보듬고자 하는 사람임을 보게 됩니다 그가 디모테라는 세례명을 받은 카톨릭 신자라고 하는 이야기가 그의 사람됨을 증명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의 신앙이 그의 삶의 모습, 그의 가치관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 생각하니, 개신교 성도들의 신앙과 삶은 어떠한가? 라는 조심스런 질문이 올라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신앙이 일상의 삶에 투영되도록 살아 갈 수 있을까요 ? 내 입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 말하지 않아도 내 삶이 예수 믿음을 말하는 살을 살 수 있을까요 ?


    2

    신앙을 갖는다는 것,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 우리는 왜 예수를 믿고, 함께 교회를 이루는 것일까요? 실상은 신앙을 가진다는 것,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측에서 보면, 세상과 삶을 신앙의 눈으로 살아내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가치관, 문화, 삶의 모습속에서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존재를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막상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의 주권과 행하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습들이 우리들 주변에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3

    선한 사람이 잘 살고, 잘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실재로 삶은 이런 보편적인 일조차 쉽게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선한 사람들이 핍박과 고난을 당하고, 악한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정직하고 성실하게 땀 흘리며 노력해도 늘 헐벗고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삶 뿐이니다 아무런 잘 못 없어 보이는 이들이 핍박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때로는 갓 태어난 아이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보게 되고, 그저 태어남 자체가 불행한 인생도 있으니 말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있을 수 없는, 도무지 우리로서는 설명하기 어렵고 곤란한 일들은 지금도 수 없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4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이곳에 함께 모여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가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 떠날 날의 구원이 아닌, 지금 우리의 삶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말하는 것은 또한 무엇입니까 ? 누군가의 기도 가운데 응답하신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지금 그 먹먹한 삶의 언저리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내 삶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는 언어가 아닙니까 ?

    실재로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예수님을 구원자라는 것이 말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 하지는 않지만, 이미 지나버린 어제나,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내일이 아닌, 바로 지금, 다른 사람이 아닌, 다른 민족이 아닌, 바로 나의 구원자로 믿지 않는 경우도 또한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간절히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이 예배 가운데 함께 하는 우리 모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이 내 삶을 구원하시는 구원자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이 열리시기를 축복합니다


    5

    ‘하나님이 구원이시다’ 하는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며,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짧은 고백은 누가복음 18:27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라는 믿음을 압축시킨 다른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 개개인과 신앙적 삶에 이 고백을 담아내고 있지 못함이 현실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이 구원이심을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경우 즉, 하나님도 불가능한 것이 있으시다고 지레 포기하는 경우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다른 것을 믿는 경우입니다

    첫번째 경우 하나님은 누구든지 받아들일 수 있고, 납득될 수 있는 분일 수 있지만 실재 성도들의 삶 가운데 아무런 능력도 없는 어떠한 복도 될 수 없는 허무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실재로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으니, 말이 되지 않으니, 하나님은 그렇게 구원하실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나의 이해여부와 관계 없이 사실은 사실일 수 밖에 없고, 진리는 진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늘이 하늘이 아닌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두번째는 꽤 신앙이 좋다고 하는 이들에게서 더 자주 발견되어지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의 대학입학을 두고 작정 기도하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시간을 정해 열심으로 기도합니다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그의 구원은 하나님이 아닌 자녀의 대학입학인 셈입니다  건강을 두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건강이 주인되고, 건강해야만 잘 살 수 있고 행복하다고 여기는 셈이니 건강이 구원입니다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것이 있어야만 지금의 삶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셈입니다


    하지만 진정 하나님이 구원이시다라는 신앙은 다릅니다 돈이 없어도, 자녀의 내일이 선명하지 않아도, 건강하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내 삶의 의미와 행복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것들이 내 구원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는 자는 또한 모든 것을 잃은 자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관계 없이 저마다 구원자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어떤 이는 돈이 나의 내일을 구원할 구원자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명예, 어떤 이는 건강, 어떤 이는 평판, 어떤 이는 자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시는지는 분명하게 알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구원자시라고 믿는 이에게 하나님은 늘 구원이 되심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6

    이런 신앙의 자리, 그러니까 하나님은 구원이시라고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의 모습은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발견됩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의 신실한 집사였던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들앞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인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한 일이라고는 대제사장에게 붙들려간 자리에서 복음을 전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우는 그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이 유별하다고 하던 그들이 스데반 집사를 쳐죽입니다 그들이 스데반 집사를 잡아 죽인 본질적인 이유는 ‘그가 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구원하실리 없다’는 왜곡된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2천년전 이 땅에 ‘예수’가 찾아왔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예수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구원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라는 말은 ‘예수아’ ‘여호수아’의 헬라식 표기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키는 셈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부를 때마다, 예수를 기억할 때마다,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7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말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대망하던 하나님의 구원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기름 부으시는 메시아를 통해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을 혁파하고 출애굽하던 때처럼 로마를 무너트리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일을 행하시는 것, 승리하게 하시는 것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대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이라니요 ! 그가 왔으나 세상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고 로마의 지배는 더 폭압적이고 시대를 억누르던 세기말적인 울분과 절망은 깊어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라 불리우던 갈릴리의 청년안에,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던 이들이 자꾸만 소리를 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야 말로 인간을 햐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말입니다 대체 내 삶에 무엇이 바뀌었던 말입니까? 예수를 믿고 바뀐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 굶주림도, 억눌림도 여전한데 말이지요

    이런 식의 구원은 말 뿐인 구원이 아닐까요 ? 이런 식의 구원은 내가 원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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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보니 오늘 우리는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이고 만 유대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내 삶은 변한 것이 없고 예수를 믿고 있지만 내일도 그닥 달리 변할 것 같아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실재의 내 삶의 문제들 앞에서 내가 바라고 기대하고 믿고 있는 구원은 예수가 아닌, 운과, 출세, 돈과 명예였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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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초대교회와 성도들은 모두 이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구원’임을 믿고 그에 자신들의 생을 걸고 살아갔습니다 예수를 믿고 문제가 해결되거나 삶이 바뀌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생활 수준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그들이 믿고 따르는 예수처럼 환란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도 당하빈다 스데반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대체 유대인들은 볼 수 없었지만 스데반은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예수’가 구원이라고 외쳤으며, 예수가 구원임을 경험하였으며, 예수의 구원을 내것으로 얻기 위해 죽음을 택할 수 있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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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았던 것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메시아이시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일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비교적 상세하게 스데반의 죽음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5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그 절체 절명의 순간, 서슬퍼런 유대인들의 살기 속에서, 죽음이 삶을 덮어오는 그 순간에 성령이 스데반의 믿음의 선택을 위하여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눈은 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그분만이 하실 수 있으신 능력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를 보았습니다 이미 십자가에 달려 죽은 현실의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예수의 부활이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이, 예수안에 하나님의 구원과 그의 나라가 있음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 스데반이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예수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볼 수 있을까요 ?


    11

    오늘 성서일과 요한복음 14장에서 힌트를 얻어봅니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천국에 있을 곳을 마련하기 위해 떠나신다고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하지만 도마는 천국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다고 했고,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천국도 하나님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답은 각각 6절 (내가 곧 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과 11절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입니다 


    두 구절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In Christus) 입니다 !

    도마와 빌립은 예수 밖에서 길을 찾았기에 볼 수 없었습니다 길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스데반도, 사도들도, 초대교회 성도들도 모두 예수 안에서 길을 본 사람들입니다 일단 예수안에서 길을 본 사람들은 예수를 외면할 수 없고, 예수의 길 위에 설 수 밖에는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구원을 돈에서 찾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세상은 온통 물질로만 파악되고 해석되고 설명되어집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하고 없으면 불행합니다 많은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고 없는 사람은 못사는 사람입니다 실재로 우리들에게는 다른 구원도 많이 있습니다 !!!


    여러분의 눈은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시고 계십니까 ? 오늘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 믿어지십니까 ? 

    우리의 눈은 물질이나, 풍요, 문제해결과 같은 눈에 보이는 수준을 뛰어 넘어,

    갈릴리 출신 연약한 청년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를 통해 내 삶에서도 그 하나님의 구원이 함께 하고 있음을 보아야만 합니다


    그때 마다 성령께서 예수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스데반은 혈기 서린 사람들의 분노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기에 흔들림 없는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은 패망이 아니라 마지막 승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60절 말씀에서 누가는 스데반이 자니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니라’는 말은 끝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이들의 눈에 스데반은 죽었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그를 죽음에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실재로 스데반의 죽음으로 교회에 박해는 시작되었지만 도리어 이 박해를 통해 흩어진 이들, 평신도들의 손에 의하여 안디옥에서 교회가 세워집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임을 믿지 못하였던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기에 자신들도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스데반은 예수를 구원으로 믿으며 죽었으나,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구원을 바라보시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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