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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4/ 01 부활주일 아침성서의 거울 앞에 2018. 4. 1. 14:30
본문 - 요한복음 3:1 ~ 15
https://youtu.be/3hVrYKrdQc0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
1
태어난 아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를 엄마와 아빠로 알아가면서 성장합니다 그들이 있으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도 배웁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고 함께 어울리면서 사회성을 배우고, 학교에 진학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소양부터, 전문적인 지식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것들을 배우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사랑을 알게 되고,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걸음으로 우리들의 삶은 가득 채워져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배우면 배울 수록 여전히 우리는 모르는 것이 더 많이 있습니다 덧셈을 배우니 나눗셈과 곱셈을 배우고, 그것을 배우니 함수를 배워가는 것처럼, 무언가를 아는 순간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우주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생명에 관하여는 인공지능의 개발을 말하는 우리이지만 여전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전체 앎에 비하면 해변가의 모래알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2
우리 나라 사람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곳곳마다 녹아 있습니다 집안에 어른이 돌아가시고 나면 위패를 모시게 되는데, 위패 대신에 쓰게 되는 지방에 ‘현고학생부군신위’라고 적습니다 돌아가신 어른이 ‘학생’ 즉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지식이나 깊이, 경륜만은 아까운 이였음을 추서하는 배려입니다 사람은 ‘배우는 존재’여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겠지요 요즘은 내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어미의 마음은, 늘 남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공부’를 잘했으면 하는데 이어지고 있음도 매한가지인 것을 보면, 여하튼 이 땅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배움’에 대한 갈망이 다른 이들에 비해 컸던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실상 ‘공부’(工夫) 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사뭇 진중합니다 공부의 공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뜻이며, 부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있는 곳이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공부란 우리의 평범한 일상속에서 마땅한 이치를 터득해 가는 것, 숨기워진 생명을 드러날 수 있도록 키워내는 것이며, 세계와 나 자신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부는 고행이 전제가 되는 구도이기도 합니다 본래 의미로의 ‘공부’는 오늘 출세와 명예를 일궈내는 도구로 삼는 ‘공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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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공부가 되었든, 학업이 되었든 그 근본의 목표는 ‘앎’에 있습니다
하지만 언급했던 것처럼,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이들어 생의 끝자락까지 계속해서 무언가를 배우고, 공부하는 우리인데 정작 삶의 의미와 가치, 내일의 일 조차도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우리입니다
그러니 옛 고전의 기록처럼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앎’이이야 말로 반드시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안다는 것만큼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도 없지 않을까요 ?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의 말과 행동은 교만하고, 폭력적입니다 그런이들은 상대에 대하여도, 또한 무엇을 나누어야할 지도, 자신은 누구인가에 대하여도 여전히 모르므로 설득되어지지 않는 상대를 그저 강요하고 억압하는데에 익숙합니다 자신의 모름을 감추어야 하기에 점점 더 아는 척을 하게 됩니다 섣부른 앎이 담긴 존재야 말로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존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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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 선민임을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며 그들의 앎의 지식을 사람들앞에 쏟아놓기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말라기로 마쳐지는 구약의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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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는 그래도 정직한 사람입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이들 틈에서 예수님에게 ‘모름'을 묻기 위해 나아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나아온 니고데모가 2절에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라고 자신의 ‘앎’을 전합니다 얼핏 예수님을 칭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니고데모의 말은 ‘나는! 알고 있습니다’라는 조금은 삐딱함이 들어 있습니다
이 대화속에는 뼛속까지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담겨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민족성과 삶의 존재이유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생이라고, 즉 예수는 우리와 같은 부류라고 인정해주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비유대인이 유대인, 즉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선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될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례’와 ‘할례’입니다 세례를 받고 나서 할례를 행하여야만 유대인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셈입니다 그것을 비유대인의 유대인으로의 ‘거듭남’ 이라고 여겼습니다 이것이 자신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하나님 백성, 유대인으로 받아들여지는 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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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은 곧장 그의 앎이 예수님의 그것과 같음을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거듭남의 길은 반드시 물과 성령으로의 거듭남이 있어야만 합니다 8절의 예수의 말씀은 사역(私譯)하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나님의 백성됨에 대하여 잘 안다고 말하고 있지만, 성령으로 난 자를 알아 보지도 못하는구나’로 풀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앎은 11절을 보니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는 앎’입니다 앞서 말했듯 글로 배운 지식이 아닌, ‘삶의 언어, 삶의 고통과 상처, 한계를 뚫고 깊은 물음 가운데 얻은 지식’입니다
바람이 불고 지난간 자리에 나뭇가지는 반드시 흔들려야만 합니다 !!!
성령으로 거듭난 삶은 반드시 그 살아가는 삶에 흔들리는 가지처럼 흔적이 남을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 흔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큰 소리는 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탐욕, 불의함, 안일주의, 폭력, 가혹함, 이기주의와 같은 삶을 가로지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지나간 흔들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탐욕과 미움과 증오의 노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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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이 주일아침 교회마다 부활을 외치고, 부활의 성가가 울려퍼질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아침 우리의 외침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것, 보지도 못한 것을 아는 척하는 의미를 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부활’, ‘다시 살아남’이 무엇입니까 ?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 안에 정확히 무엇이 담겨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부활은 부활이 필요한 사람, 부활을 사모하는 이들에게만 복되고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입니다 부활을 사모하지 않으면서,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는 가슴 절절히 맺힌 안타까움 없는 이들에게 부활은 전혀 낯설은 언어일 뿐입니다
부활은 오늘이 저주스러운 사람에게, 이런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고 기대하지 마라고 하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오늘과 똑같은 내일일 수 없는 이들에게만 누려질 수 있는 기쁜 소식입니다
거듭남은 또 무엇입니끼? 이제 교회 나가겠다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는 통과의식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오늘의 자리를 떠날 용기를 가진이들의 출발에 주어지는 이름입니다
거듭남은 어제와 같을 수 없다고 떠나는 이들, 지금까지처럼, 남들도 다 그렇게 사니까? 라는 말을 거부하고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역사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실패와 죽음으로 보이는 길로 내 딛는 용기있는 이들의 발걸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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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거듭남은 성령으로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남은 위로부터의 다시 태어남입니다
거듭남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치관과 세계관이 바뀌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안에 우리를 이루고 있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렇게는 살 수 없기에, 구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기 위해 내딛는 걸음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거듭남이야 말로 이것은 성령이 행하시는 창조의 사건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업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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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떠나려 하는 사람, 오늘의 걸음을 부정하려는 사람, 새로운 하나님의 아들을 좇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하는 이들에게 하늘로부터 성령이 찾아오셔서, 그들의 심령을, 그들의 삶을, 그들의 걸음을 이끄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십니다
‘앎’이란 지식의 파편으로 채워내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내 삶이 익어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른 ‘앎’이 ‘거듭남’이고, 그 앎의 걸음이 ‘거듭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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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두분의 성도님이 계십니다 오랜 세월 모진 풍파와도 같은 삶의 시간을 홀로 몸부림치며 걸어오신 걸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분이 세례를 받으시는 결심에는 나의 몸부림으로 바뀔 것은 없다는, 이렇게 살아서는 바르고 합당하게 살 수 없다는, 이렇게 살아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이렇게 살아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가 없다는 ‘앎’이 담겨있습니다
이제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앎’을 삶으로 이어가실 때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셔서 주님 나라 가는 그 날까지 지키고 채우실 줄 믿습니다
바람이 반드시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가듯, 거듭남을 향해, 거듭남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에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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