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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24 성령강림후 다섯째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18. 6. 23. 18:08
본문 - 말라기 3:1 ~ 7
https://youtu.be/vBWK1l9dze8 = '클릭' 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
1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 이 질문이야말로 따지고 보면 인류의 운명과 역사의 외침이 아닐까요 ?
말라기가 예언하고 있던 이 때, 이스라엘이 직면하고 있던 시대적 상황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다시금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하지만, 기대하던 메시야 왕국이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일어나는 신앙적 회의가 결국 그들의 삶을 세속적 가치로 뒤 덮고 마는 때였습니다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회복'의 소망을 잃어버린 삶의 현 주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이 말은 결국, ‘지금’, ‘이곳’은 아니라고 하는 저항과 거부감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말라기 선지자의 눈에 비추이는 지금의 삶의 자리는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다들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체념하는 시대에 현실의 상황을 정확히 직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영적인 감각이 있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 영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현실 세계에 대한 ‘불만'을 안고 살게 됩니다
하지만 이 ‘불만’이라는 말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마라는 식의 선동적 언어는 아닙니다 무엇인가 잘 못되어 있고, 이렇게 살면 않되는 것임에도 순응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살게 되는 비굴함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말입니다
오늘에 대한 '불만'이 없다면 ‘오늘’은 변화되지 못합니다 !
2
특별히 말라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서안에는 '영적 불만'을 담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있습니다 왕족, 제사장, 평민, 농민, 나그네, 고아, 과부, 객 ... 적어도 성서의 세계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사람들에게는 ‘지금’에 대한 영적인 불만이 있었고, 그들은 현실 세계의 부조리와 불법, 부정의에 대한 불만을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신’ 자비로운 하나님께 기댐으로 답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 누구나 현실에 아파하고, 이 고통과 헤어날 수 없이 반복되어지는 삶의 무게에 신음하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만이 삶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자존감을 무너트리며 굴복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
3
오늘 본문으로 선택된 마지막 절 7절은 그러므로 어찌보면 인류의 외침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싶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 '... 이렇게 하면 된다', '이렇게 살면 된다'라는 소리는 많이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갈 바를 알지 못한채 헤매이고 있는 군상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언자 말라기를 향하여 외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질문에 이미 하나님의 답은 주어졌습니다 7절의 상반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우리가 있지 않아야 할 이곳, 우리의 마음을 두어서는 않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과 하나님의 규례안에 머물며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등가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죄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결코 쉬울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제 정말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
이 ‘어떻게’ 는 오늘 우리의 자리를 강화시키기 위한 질문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이곳이 아니므로, 이렇게 살면 않되므로 묻는 본질적 물음이어야 합니다
4
그래서 '어떻게'에 대한 답을 경험하는 자리를 성경은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은혜'는 가만히 앉아 있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은혜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가 그렇게 경험되고 누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가 은혜가 되려면, 반드시 '은총의 수단'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대체 '은총의 수단'은 무엇이고, 어떻게 우리를 있어야 할 곳을 경험하는 은혜안에 있게 할까요 ?
말라기서를 통해 함께 말씀을 나눔으로 답을 찾아가 볼까요 ?
* 전체 설교는 '영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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