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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04 성령강림후 8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19. 8. 3. 23:46

    성서일과

                1독서 호세아 11:1 ~ 11/

                2독서 골로새서 3:1 ~ 11/

     (본문)  3독서 누가복음 12:13 ~ 21 /

                응송 - 시편 107:1~9, 43

     

    음성파일https://drive.google.com/open?id=1mK4fK_NGTphjoiWhZ2FGlh5RcdCsPRG2

     

    용량https://youtu.be/LKFcjLyQJWI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용량https://youtu.be/zB8ovJ_eLMg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 01

    버려지고, 원수되었던 우리를,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사건으로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찬송을 불러도, 말씀을 들어도, 예배에 참여하여도 아무런 감동이 없던 우리가, 이제는 찬양중에 주님의 소망이 넘쳐나고, 말씀안에서 위로를 발견하며, 기도함 가운데 응답이 있는 주님이 지금 내 삶에 살아 역사하시는, 성도에게 부어지는 하늘의 은혜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 02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주와 그리스도, 즉 내 인생의 주인이시며, 내 인생의 구원자로 예수를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며, 삶과 죽음의 주인이시고, 온 땅의 구원이심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보이시고,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예수를 따르며, 예수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이 예수를 따르는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삽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는 말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다른 언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삶도 살아가면서,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말, 생각, 사고, 기호, 선택,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삶의 태도, 타인을 대하는 방법 모두가 예수를 따르며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 03

    죽을 만큼 고생을 하고나서 보니, 밥먹는 것이 다릅니다 한 숟가락의 밥을 먹고 소화시키는 것도 다릅니다 감사합니다 들이마시는 공기도 다릅니다 마주치는 사람도 다릅니다 모든 것이 다릅니다 이전에도 밥은 먹었고, 이전에도 똑같이 살았었는데, 지금은 다릅니다 예수를 믿고보니, 이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이 새로워 보입니다 모든 것이 의미있고, 모든 것이 감사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전과는 다른 것들을 보며 살게 됩니다

    # 04

    무엇을 보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어떤 것을 기대하며 사는지는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세계관, 인생관을 좌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보든 그 안에서 예수를 보고 무엇을 경험하든 그 안에서 예수를 예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왜 사느냐?고 물을 때 '그냥 웃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에 살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사는 것입니다

    # 05

    우리가 왜? 이렇게 예수만 보고, 예수만 믿고, 예수만 따르며, 삶의 길과 진리로 삼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 또한 왜 성경은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넌 이후에,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걸음을 되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호세아 11:3)

    이제는 온전한 구원을 향해 가나안 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건너 바다였기에, 자신의 힘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없이 건너는 바다는 죽음의 땅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만났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르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애당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만을 구원자로 믿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지고, 때로는 상하고, 때로는 아프고, 언제 예수믿었었는가? 싶을 만큼 형편없어져도, 우리는 다시금 예수님 앞에서 몸부림칠 수 밖에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렇게 밖에 못삽니다

    # 06

    이제는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내가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전적으로 나는 무능하고, 나는 절대로 무능하고, 오직 예수 안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까지 내가 주인되었던 삶의 태도와 방식, 사고 모든 것이 버려져야만 합니다

    강을 건너온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예수를 믿기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다시금 이전과 같아 지지 않기 위해 버려야할 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오늘 성서일과 2독서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바울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까지 거칠게 폭로합니다

    음란, 부정, 사욕, 욕망, 탐욕이 우리의 옛 자아를 지배하는 죄들인데, 그 중에 가장 근저에 있는 기저가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이성에 대한 탐심이 음란이고, 돈이나 명예에 관한 탐심이 부정과 사욕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바울이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까지 몰아가는 것은 지나친 비약은 아닐까요 ?

    # 07

    성서일과 3독서 누가복음 12장에는 예수를 만났던 형과 유산을 나누기를 원했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의 내용만으로는 이 사람은 별스런 잘못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모님이 죽기 이전에 재산상속을 꽤했던 것도 아니고, 형의 재산을 받으려고 했던 것도 아닌 것 같으니 그러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형에게 유산을 나누게 해달라는 사람에게, 나는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하는 이가 아니라면서, 도리어 탐심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무엇이 ‘탐심’입니까 ? 자신에게 주어진 분깃을 요구하는 것을 탐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어쩌면 유산 상속을 게을리하는 형이 잘못일지도 모릅니다 주어진 본문의 정보만으로는 적어도 이 사람은 잘못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예수의 말씀은 타박처럼 들립니다 !!!

    15절에 생명이 그런 것에 있지 않다고 하시는 말투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타박은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으라"고 채근하는 예수의 마음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 ‘복음’은 세상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좋은’ 분이십니다 )

    # 08

    재물에 대한 관심을 버리라고 채근하시는 주님은 말씀의 말미인 21절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20절)의 예화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결론을 내리시는데,

    다시 정리하면,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며, 하나님께 대하여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가난한 이들을 구제한다거나, 사회사업을 하라거나 복지에 신경을 쓴다거나 박애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섣부르게,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는 사람’의 반댓말이 바로 곧장 ‘타인을 위해 재물을 쌓아두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곤란해 보입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과연 ‘하나님께 대하여는 어떤 사람인가?’ 에 대한 물음이어야 합니다

    # 09

    ‘탐심’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봐야겠습니다

    본문의 말씀대로라면 버려야할 탐심인 어리석은 행위가 바로 ‘자기만 위하여 쌓아두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한 모든 것이 ‘탐심’입니다 자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기주의’를 죄의 근원으로 상정합니다

    그렇다면, 왜 ?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천착하게 될까요 ?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은, 타인속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홀로 있을 때에는 사람은 스스로를 바라보지 않고,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타인과 나를 구분 지은 사람, 타인과 하나될 수 없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타인과 나의 ‘차이’입니다 타인과 나의 차이는 그와 나의 자리를 자꾸만 ‘비교’하게 만듭니다

    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면 우쭐하게 되고, 덜 가지게 되면 우울하게 됩니다

    세상은 이런 차이를 자꾸만 보여줍니다 그리고 경쟁하게 하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는 자리에 서라고 합니다 상대와 나의 ‘차이’를 벌리는 것을 성공이라고 가르칩니다 ‘누구보다 더 많이’라는 차이의 강요는 우리를 탐심에 물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결국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10

    ‘탐심'은 더 가난하고, 더 배고프고, 더 조급하고, 더 초조하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돈의 경제아래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 ! 이것이 세상의 질서이며, 가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원래 세상은 이런 곳입니다 ! 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탐심을 버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탐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

    다시, 눅 12:21 말씀으로 돌아가봅시다 본문에서 주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함’을 언급합니다 우리중에 누가 하나님 보다 부요할 수가 있겠습니까 ? 대체 이 말은 어떤 뜻일까요 ?

    이 땅에 ‘부요하다’라고 칭함을 받은 사람이 딱 한명 있습니다

    (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예수님입니다 ! 우리중 누구도 당시의 예수보다 가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성경은 예수를 부요하다고 말씀합니까 ? 예수는 자기를 위해 무언가를 쌓아두거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늘 가난한 이들을 먹였고, 아픈 자를 낫게 했고, 귀신들린 자를 고쳤으며, 죽은 자를 살려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는 세상의 가치안에서 가난한 이였지만,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 나누고, 먹이고, 입히고, 살리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만 온전했고, 하나님과만 소통했고, 하나님만을 가졌으며, 하나님안에만 계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의 본문은 헬라어로 ‘에이스 테온 플루톤’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하여 부요한’ 이라는 뜻이 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가 아닌,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이 부요한 사람입니다 예수가 부요한 것은 그는 늘 하나님만을 조준하며 살아갔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 11

    GNT 성경은 21절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And Jesus concluded, “This is how it is with those who pile up riches for themselves but are not rich in God’s sight”’

    ‘하나님께 대하여’를 ‘하나님의 시선에, 하나님이 보시기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는 이들이 극복하고 경쟁해야할 ‘차이’로만 보이는 세상은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고, '내가 보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를 적용하는 순간, ‘차이’로만 보이던 세상은 온통 풍성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이 되어집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안에 수렴되니, 너무나 풍성한 하나님 안에서 부족함은 사라지고, 비교될 대상도 무의미해집니다 비로서 우리는 ‘차이’를 극복하기 위하였던 본능과도 같은 ‘탐심’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에 대하여도 ‘하나님을 조준’하는 적극적인 신앙의 태도입니다 그러고 보니 ‘탐심’은 ‘하나님' 없이 바라보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고, 내몰아 넣어 우리 모두를 파괴하고 마는 ‘탐심’이 우상숭배라는 바울의 말은 옳습니다

    # 12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성도의 삶에 대하여 말했던 2독서 골로새서 2장이 끝마쳐지는 자리에서, 3장을 ‘위의 것을 바라보라’는 강권의 어투로 시작합니다 예수와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위의 것’을 바라보며 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조준하며 사는 것은 어떤 삶입니까 ? 주어진 오늘의 삶에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지를 적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땅을 기어다니며 ‘차이’를 발견하는 눈이 아닌, 하늘을 올려다보며 ‘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채우고도 남음이 있는 은혜를 갈망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불가능을 보는 것이 아닌, 가능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보는 눈이 다른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10절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새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예수처럼 하나님만을 조준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결론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타자를, 나를 향하던 눈을 돌려, 새 사람 예수처럼 하나님만을 조준하며 살아가는 것이 복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 삶이 조준하고 있는 하나님은 ,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 (시편 107편 9절) 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으로 풍성하고,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부요한 삶을 살아내는 성도의 삶이 되기를, 그렇게 채우실 은혜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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