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818 성령강림후 10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9. 8. 17. 18:20
성서일과
본문 #1 이사야 5:1 ~ 7
#2 히브리서 11:29 ~ 12:2
#3 누가복음 12:49 ~ 56
응송 시편 80:1~2, 8 ~ 19
음성파일 : https://drive.google.com/open?id=1air30D9dXbOGIAWkJpV157NnWU5Vipa-
영상파일 : https://youtu.be/qPDzuvMpMYU = '클릭' 하시면 설교영상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좋은 나무인 '지금'
1
책장을 정리하다가 낡고 투박한 성경책 한권을 찾았습니다. 정성껏 한장 한장 넘겨봅니다. 기특하고 대견한 기억들이 묻어 있습니다. 처음 말씀에 은혜 받고 밤을 지세우며 읽었던, 힘들고 두려움 몰려올 때마다 붙들었던, 손떼가 묻어 본래 제 모습보다 터무니 없이 부풀어 오른 성경책이 그때 주님 은혜 앞에서 눈물지으며 감격하던 날들의 ‘나’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끼니를 놓쳐도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도 풍성했던 때가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한절 한절 주어진 말씀에 감동하고, 그 말씀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때문에 몸부림치던 그때의 내가 보기에 지금 목사가 되고 난 이후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지 않은가?’ 싶으니, 지금의 내 모습에, 주님 없이도, 은혜 없이도 충분히 살아가는 자신이 두려워집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존재라고 하지요? 사람이란, 금새 지나온 걸음을 잊고 마는, 얼마나 놀라운 삶을 통과해 왔는지, 얼마나 엄청난 은혜가 있었는지와 관계 없이 받은 것을 잊어버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때로는 살만해서, 때로는 너무나 바빠서, 때로는 기억이 나질 않아서, 때로는 삶의 문제에 채여서 우리의 구원이신, 아니 내가 나일 수 있게 하신 주님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하나님을 놓치고 살때, 삶 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때, 인간이 얼마나 타락하는지,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지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찾지 않아도, 우리 삶에서도 충분하게 공감이 될만큼 아픈 시간들을 우리는 지나왔습니다. 바라건데 절망의 날을 소망으로 바꾸시고, 억압받고 압제에 눌려 사는 인생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내가 바로 성도임을,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하늘 백성임을 기억하는 믿음이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2
오늘 성서 일과에서 주어지는 본문은 꽤나 부담이 됩니다. 친절하고, 상냥한, 언제나 기다리고 참아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모습에 익숙한 우리에게 본문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낯설기만 합니다.
1독서 이사야서는 극상품 포도나무였던 유다가 온갖 정성에도 불구하고 쓸모없는 들포도만 맺고 마는 것에 실망한 포도원주인이 포도나무가 발에 밟히도록 내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포도원 주인이 하나님이라 소개하고 있으니, 결국 우리는 제대로된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를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지 못해 버려버리는 하나님앞에 서게 됩니다.
3독서 누가복음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모습도 낯설기만 합니다
제자들에게 전하시던 말씀의 말미에 예수님은 무척 당혹스러운 말씀을 던지십니다 49절에서 주님은 ‘나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고 자신의 사명의 본 목적을 선언하십니다
병든자를 돌보시고, 아픈자, 상한 자를 끌어안아주시며,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에게 기대되지 않던 무척이나 과격한 말씀입니다. 같은 말씀을 마태는 10:34절에서 ‘검’을 주러 왔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선하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올 말씀이라면, 평화를 주러 오셨다거나 서로가 화목하게 하려고 오셨다! 정도가 되어야 할 터인데, 주님의 말씀은 이런 우리의 기대를 터무니 없이 깨트려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앞에 낯설고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3
그렇지 않아도 성경에는 쉽게 읽혀지지 않는 본문들은 많습니다. 시대적 상황이나 문화적 차이로 읽혀지는 것들은 그나마 그렇게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처럼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혹은 예수님은 당신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이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지만, 하나님 당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믿어야만 하는지 시험에 들고 넘어질 법한 말씀들도 많습니다. 이방 민족들을 다 멸하라시거나, 이방여인을 향해 ‘개들’이라 말씀하시는 내용들도 그런 부류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은 특별히 사랑하고 복주시고, 그렇지 않은 이 민족들을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가축까지라도 다 진멸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이실까요 ? 결국은 인간에 의해 더럽혀지고깨어진 세상을 포기하고 파괴하시기로 결정하고 마는 분이실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주님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다, 나는 모르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 라고 수긍해버릴 수 있으십니까 ?
그러나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속에 그런 하나님을 마주치고 공포에 질리거나, 낙담하거나, 문자주의에 사로잡혀, 버려진 죄인을 위해 피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내 하나님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본문의 말씀속에서도 일그러진 시선이 아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수고해야만 합니다.
4 하나님을 읽다 !
이스라엘 ( 특히 유다백성 )은, 본문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전해 들은 이 말씀 ( 포도원의 노래 ) 을 들었을 때, 너나 없이 역사속의 '출애굽의 날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오늘 응송인 시편 80편 말씀에도 포도나무가 등장합니다. 80편 8~9절은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가져다 손수 심으신 포도나무로 상징됩니다.
탐욕의 총체인 물질과 권력으로 표상되는 제국주의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삶이 짓눌러 오는 무게에 신음하던 사람들입니다. 전혀 바뀔 것 같지 않은 그들의 매일, 그들의 운명, 그 서러운 노예로서의 매일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눈물을 짓고, 다시금 찾아올 내일이 두려워 좌절하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괴롭고, 비참한,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세상은 잘 못된 것입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더 나아지거나 조금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망해야할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갖지 못하고, 힘이 없고, 서러워 아파하고 눈물 짓는 이들을 타박하고 함부로 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절규, 그들의 눈물을 ‘이럴 수는 없습니다 !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라는 하늘을 향한 외침으로, 이런 세상과 반대되는 이런 절망과 다른, 이런 저주의 날들과는 다른 하나님 당신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향한 선택과 갈망으로 들으시고, 받아주셨습니다. 기꺼이 이 세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그들의 왕,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로 작정하셨고, 마침내 그들을 애굽의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서슬퍼런 바로의 제국을 흩어버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손이 그들을 그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들, 이스라엘은 그들의 편이 되어주시고, 부모가 되어주시고, 왕이 되어주시기로 작정해서 건져내신 하나님 손에 들리운 포도나무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그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렇게 소중히 당신에 품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그들을 발에 밟히도록 내어버리시겠다고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대체 왜 ? 무엇이 하나님이 그들을 포기하시게 만들었습니까 ?
7절입니다.‘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애당초 그들은 포학과 불의에 짓눌렸던 이들,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던 이들이었기에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이 되셨던 것인데, 그러므로 마땅히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 처럼 정의와 공의를 따르며 살아야 할 그들이, 이제는 어느새 포학과 불의함으로 대변되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제국의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던 원수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택함받은 백성이었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이제는 철회하고 폐기하시겠다는 선언은 서글프기만 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는 순간, 극상품 포도나무를 돌보기 위해 가꾸었던 포도밭의 운명은 끝장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소망이 되었던 그곳은 황무지로 변할 것입니다. 무엇도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없고, 누구도 이 포도원을 아름답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곳에서는 어떤 열매도 맺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5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가복음 12장에서 ‘천지의 일기는 분간하면서, 시대와 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세상에 불을 주러 오셨다는 주님, 그가 바라보고 계시는 시대와 때는 무엇입니까 ? ‘불’이나, 마태복음에서 사용된 ‘검’은 모두 ‘심판’과 연관된 단어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은 심판의 때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3:18에서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라고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찾아오신 예수님의 삶은 오롯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주님의 삶은 빛이 되셔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그릇되고, 타락했고, 썩어 있으며, 포도원지기가 버리고, 발에 밟히게 되어버렸음을 드러내어주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비로서 우리는 ‘아~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구나 ! 이렇게 사는 것이 죄구나 !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심판앞에 있는 것이구나 !’ 라는 것을 비로서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이렇게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신들의 걸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지금 건강하고 바르게 살고 있는지 조차 분간하지 못합니다. 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더 두려운 것은, 그러면서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돈 몇푼에 사람이 죽어나가고, 자유를 찾아 귀순했던 모자가 굶주려 죽는 세상인데도, 돈만 많이 벌면, 배불리 먹을 수만 있으면, 그럭저럭 살고 있으면 괜찮은 삶이라고, 괜찮은 세상이라고 여깁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벗어내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간간히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될까 ? ‘라는 말이 들리기는 하지만, 모두의 이야기속에 묻히고 맙니다. 이 걸음은 결국 ‘심판’의 때가 올때까지는 멈추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주님을 잘 못 알고 있고, 성경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전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통치자이십니다. 그의 의지로 생명을 붙드시고, 그의 뜻대로 세상을 닫으실 분이십니다. 주님은 상냥하고, 친절하시고, 한 없이 좋은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이를 부모나 형제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합당하지 않은 상을 뒤엎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성경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옳은 것, 의로운 것이 복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별일 없으니 잘 살고 있다고, 괜찮다고 말하며 삽니다. 심판이 없으니 잘하고 있는 거라고 안심하려고만 합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라며 살아갑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 당신도 지금 좋은 것이 좋으십니까 ?
6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셨는지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기도에서 보여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예수님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우리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땅의 모든 것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인지, 우리가 원수처럼 여기는 이들인지와 관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온 땅의 아버지, 모든 살아있는 이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계십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악인과 의인을 가리지 않고 내리시는 아버지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버리시겠다? 혹은 평화하게 하는 것니라, 불을 주고 검을 주려 하신답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시선으로 하나님을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찌 아버지를 바라보시는지, 자기 백성을 향해 외치시는 아비의 음성이 무엇인지 엿보아야 합니다.
애당초 이 포도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어진 곳입니다. 이 세상은 주님의 자비하심에 잇대어 존재합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내것이라고, 내뜻대로 될 것이라 말하지만, 애당초 주님의 은혜로 주어져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살게 되었고, 하나님 때문에 생명을 누리고, 자유하고, 풍성하고, 복됩니다.
그런데 유다는 스스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는 나무 자체가 존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아비가, 왕이 되어주셨기에 극상품 포도나무인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익숙한 삶’이 깨어지고 터지는 것은 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안에 존재되어지는 것이 복입니다. 너희를 버리겠다는 말씀이나, 예수님이 던지시는 불, 주님이 내미시는 검은, ‘복’입니다. 좋은 것이 아니라, 마땅하고 의로운 길을 선택하라는 초대입니다.
7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사람들이어야만 합니까 ? 극상품 열매는 맺어내는 좋은 포도나무는 어떻게 될 수 있습니까 ?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12:2 믿음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만을 향하며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라 칭하며 거짓 영광으로 대할 때에도, 원수들의 조롱과 시험이 밀려올 때에도, 배신과 상처와 죽음의 위협앞에서조차, 아버지를 믿으며 걸어간 그의 십자가는 꺽어지지 않았습니다. 아픔 속에서도 더욱 오롯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늘을 지향하시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의 끝에 부활의 열매를 틔우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을 때에만, 하나님께 붙어있을 때에만 좋은 열매를 맺는 극상품 포도나무 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어떠한지, 평화한지, 별일 없는지, 살만 하다 말해왔던 걸음을 돌아보십시오. 지금 내가 어디를 향해,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지, 무엇을 삶의 축으로 삼으며 나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메마르지 않은 기름진 산에우리를 심고,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망대를 세우고, 술틀을 파며,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내 인생과 삶을 아름다운 열매로 일구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
8
히브리서 기자는 외칩니다 ! 그리고 이제 우리도 그 외침에 동참합시다 !
38절 허다한 무리의 증인들처럼,
39절 믿음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
세상이 자랑하는 권세와 명예와 부를 제시하는 달콤한 유혹앞에서도,
압제와 폭압, 두려움과 공포 앞에서라도,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그럴 듯한 이야기들 속에서도,
마땅한 길, 생명의 길, 하나님을 바라보셨던 주님처럼,
이제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걸음으로 살아갑시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셨던 주님,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신 주님을 향하는 걸음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며 나아갑시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주님 손에 들리워진 아름답고 소중한 포도나무입니다.
시련과 역경속에서도 마르지 않는 은혜로 채우시며, 반드시 열매맺도록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걸음을 이끄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0901 성령강림후 12주 (0) 2019.08.31 190825 성령강림후 11주 / 왕국절 (0) 2019.08.24 190811 성령강림후 9주 (0) 2019.08.10 190804 성령강림후 8주 (0) 2019.08.03 190728 성령강림후 7주 (0) 2019.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