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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1 성령강림후 9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9. 8. 10. 18:48
성서일과
# 1 이사야 1:1, 10 ~ 20
# 2 히브리서 11:1~ 3, 8 ~ 16
(본문) # 3누가복음 12:32 ~ 40
# 4 시편 50:1 ~ 8, 22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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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믿음의 한걸음 !
1
한일 갈등의 문제가 날로 뜨거워가고 있습니다 양국가 간의 긴장감 못지 않게, 우리안에서도 이런 형국을 바라보는 태도는 나뉘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함께 마음을 모아 어려움의 때를 잘 지나가자는 편과, 앞으로 더 힘들어질테니 큰 일 났다고 지레 겁을 먹는 편으로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백색국가 제외선언이 있고 난 이후 벌써 우리 주변에는 경제가 파탄나지는 않을지에 대한 걱정이 두려움의 양상을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가 망하게 되었다는 공포분위기를 조장하며, 이 모든 것이 우리 정부의 잘못이고, 도리어 일본에 사죄하여야 한다는 식의 뜨악한 이야기들도 들립니다 모두다 주지의 경계의 대상인 불확실성을 불안감으로 조장하는 어리석은 일들입니다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골드만삭스에서는 이번 한일 갈등의 문제를 통해 직접적인 피해보다는 ‘불확실성’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개인적인 삶에서도 이런 불확실성에 의한 두려움의 문제들은 반복됩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구원으로 믿고 사는 신앙인들의 삶도 예외는 아닌 것같습니다 한 사람이 평상시에 어떤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인지 알수 있게 되는 것은 위기가 닥쳐왔을 때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아무래도 내면의 무게가 바람처럼 가벼워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리저리 휘둘리며 일희일비하는 모습이 자꾸만 우리 안에서 발견되어집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는 말씀에 신념과 믿음의 닻을 내려 오롯한 걸음으로 걸어갈 수 없을까요 ? 반석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든든한 자세로 태풍앞에 맞서고 있는 등대처럼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요 ?
2
오늘 성서일과에서 주어진 본문들은 모두 이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실천적 삶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믿음없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도 살아낼 수도 없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지만, 한편으로는 믿음만큼 어렵고, 구원을 찾는 개개인의 신앙의 길을 마치 미로속으로 몰아넣는 것같은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잘 믿고 있는 것 같다가고, 어느 순간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우리네를 보면, 내가 붙들고 있던 ‘믿음’은 대체 무엇이었던가? 라는 반문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그렇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같기만 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그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구속의 은혜를 누림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세상의 불의와 불법과 맞서 온전히 이루실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라는 종말의 때에 이루어질 것도 믿고 있습니다 사실 종말을 잃어버리면 매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살게 되고 그때부터 매일의 일상은 퇴락과 부패로 치닿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고 있는 종말론적인 긴장감이 우리를 진부해지지 않도록 돕습니다
많은 것을 하고,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허무와 공허 가운데 있는 사람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유유자적하며 살지만 믿음안에서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 이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당신께 나아가는 이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은 우리 삶에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구원을 가능케 해줍니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 ‘믿음’은 종교적 의무감이나 강압의 도구가 아니며, 그렇게 되어서도 않된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않됩니다 믿음이 종교적 강압이 되는 순간, ‘믿음’은 자유를 잃고 긴장과 두려움, 정죄와 폭력으로 드러나 자기를 망치고, 타인을 해치는 흉기가 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어렵게 느껴집니다
4
1독서 이사야서에의 분위기는 사뭇 엄중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겁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견딜 수가 없다고, 그들의 가증함과, 거짓됨을 참아낼 수가 없다고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어떠했기에? 그들이 드리는 제물이나, 안식일의 예배, 성회, 절기를 지키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모든 것을 견딜 수가 없다고 받지 않으시겠다고, 견딜 수 없는 짐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
하나님이 고발하시는 그들의 위선적인 행위는 15~17절 피묻은 손이며, 악행을 행하고, 불법을 행하고, 학대받는 이들, 고아와 과부같은 연약한 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진실되지도 정직하지도 않았기에 하나님이 받으시길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들은 말씀은 거룩하고, 선행을 베풀고, 정의로우며, 자비와 인애를 베풀라는 것인데,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앞에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들의 삶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배드리고 있는 하나님이 그들의 일상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
5
3독서로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 본문의 이야기에는 지난주에 이어, 주님이 소개하시는 비유의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주인과 종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진행은 실제로 있던 이야기가 아닌, 만약에 라고 하는 가정으로 만들어진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야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의 말씀 뒤에 이어지는 44절에 주인이 자기의 모든 것을 맡겼다는 사실을 보면, 이 종은 주인이 있을 때 매우 신실했던 사람이었을 것임을 넉넉히 유추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집을 비우면서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종의 생각에 문제가 생긴것입니다 종이 생각하기에 집을 떠난 주인이 늦게 돌아올 것만 같은 것입니다 ( 45절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일단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종의 숨겨져있던 내면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는 주인이 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합니다 다른 이들을 타박하고 주인처럼 행세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생각이 느슨해 지기 마련이고, 느슨한 생각을 틈타 부정하고 바르지 못한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은 주인이 더디오리라고 했던 그의 오판은 집주인이 도둑처럼 돌아오면서 낭패로 끝나고 맙니다
앞에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없을 때에는 다르게 말하는 사람을 진실한 사람이라 할 수 없고, 그런 사람을 믿을 만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 그는 믿지 못할 사람이고, 그는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5
그렇게 보면, 주인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은 모습은 거짓되지 않은 진실된 모습입니다 또한 본문의 말씀이 결국은 ‘깨어있으라 깨어있는 이가 복이 있다’라고 갈무리되어지는 것임을 감안하고 보면, ‘믿음’이란 단순히 예배 잘 드리고 신앙생활 잘하고 있으라는 차원이 아닌, 하나님앞에서 사는 것처럼 진실되고 신실하게 살아가고 있느냐?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믿음’은 바로 지금, 어디에서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 것처럼 주님의 현존 안에 살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있는 사람들은, 주님앞에 진실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을 귀히 여기고, 타인을 사랑하며, 함께 하는 세상에 관심을 가지며 살아갑니다
옛 사람들은 이런 삺을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지지 않게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로 사는 것이라 하여 ‘신독’이라고 부르고 귀한 가치로 삼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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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 혹은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마다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아멘’은 히브리어로 ’아만’에서 파생된 단어로 에문, 에무나, 에메트와 어근이 같습니다 믿다, 의지하다, 그렇다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진실’이라는 의미가 주된 단어입니다
신앙은 진실해야만 하고, 진실된 것이야말로 신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성도의 ‘믿음’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앞에서의 우리의 ‘아멘’은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은 ‘진실되며 진리입니다’ 라는 고백이며, 또한 하나님 말씀앞에서 말씀을 듣는 우리 역시 진실될 것을 고백하는 예배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들리울 때마다, 가슴을 진동시킬 때마다, ‘아멘’으로 응답하시고, 아멘으로 받아들인 말씀이 여러분 안에 들어가서 살아계신 말씀으로 역사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아멘’에 담겨있는 ‘신실함’ 또는 ‘진실함’이 ‘믿음’의 핵심이라면, ’믿음’은 믿는 그대로 살아가는 실천적 모습으로 읽혀져야만 합니다 만약 종이 주인을 정직하게 믿었다면, 주인을 진실하게 대했더라면, 주인이 없을 때에도 주인이 여기에 있는 것처럼 진실하게 준비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한결같았겠지요 사람들이 없을 때 슬그머니 드러나는 밑천이야말로 그사람의 됨됨이,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판단해도 무방합니다
7
어떻게 우리가 눈에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안에 머물며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 것처럼 한결같이 진실되고 정직하게 살 수 있을까요 ?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 이라고 정의합니다 많은 경우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의 바람, 꿈, 소망으로 대체하곤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믿음’의 눈으로 보이는 실상처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계시는 것처럼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앞에 진실되게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절의 시작을 ‘에스틴 데 피스티스’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현재의 믿음’을 말합니다 어제까지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살다가, 오늘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은 정직하지도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믿고 구원받았다고,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살아가겠다고 불타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살아있는 것처럼 ‘말씀’을 대하며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진실함은, 정직함은, 믿음은 ‘바로 지금’의 믿음입니다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어제까지 무너지고, 어제까지는 믿음없음의 삶이었으나, 주님은 ‘바로 지금’ 하나님앞에서의 진실됨만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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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약본문 이사야서에서는 10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19 즐겨 순종하는 것이 ‘진실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뭐라 말씀하시든 듣지 않겠다! 는 마음으로 강팍해졌습니다 아니 실은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이 계심을, 그들 가운데 계심을 전혀 믿고 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은 그가 계신 것을 믿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겠지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꿈이나 소망, 욕망이나 탐욕을 투사시키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있게 만드신 그분이, 종말의 심판주이신 그분이 지금 여기에 계심을 믿는다면 이렇게는 살 수 없다 ! 교회 세습이라던가, 횡령, 성폭력, 탐욕과 부패, 신앙의 게으름은 하나님이 여기에 계심을 믿고 있지 않은 삶의 모습입니다
제가 예전에 집에서 편히 있으면서 티비를 보고 있다가도 담임목사님의 전화를 받게 되면 어느새 바로 앉아서 지금 여기에 계신 것처럼 전화를 받았거든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있음을 믿고, 그분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고, 그분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함이 정직하고 진실하다면, 여기에, 내 삶에 함께 하심을 정말 믿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도의 삶은 늘 말씀을 들었으니 들은 말씀대로 살아야하고, 예배하였으니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하고, 기도하였으니 기도한 대로 믿으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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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이 여기에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아는 것일까요? 여기에 하나님이 계심을 잘 믿으며 살 수 있을까 ? 몽골 사람들의 천막처럼 짓는 집을 ‘게르’라고 합니다 양떼를 끌고 수시로 이동해야하는 그들의 게르는 설치하는 대 3시간이면 된다고 합니다 철거하고 이동할 때도 3시간이면 족합니다 이들의 홀가분한 삶이 부럽기만 합니다 그들은 홀가분해서 자유한데,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에 자유롭지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계심을 정직하고 진실되게 바라보며 사는 ‘믿음’은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의 일에 대하여 홀가분할 때 더 깊어집니다 땅에 뿌리내린 것이 작아야 하늘을 올려다보기가 쉽습니다
믿음의 결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신앙의 출발과 끝, 그의 신앙의 정체성은 ‘하늘 가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전 삶은 그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삶이 모두 그렇습니다 땅의 일에 홀가분해질 수록, 하늘이 더욱 눈에 들어옵니다 하늘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나라의 실재를 믿으며 살아갈 수록 땅의 일에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서 모든 타락과 탐욕과 쓰러짐과 나태함과 무너짐과 연약함, 사탄의 공격에서 이기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주님을 믿습니까 ?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있습니까 ? 우리의 삶이 무너지고, 우리의 오늘이 퍽퍽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 정말 돈이 없어서, 건강이 않좋아져서, 상황이 나빠져서, 세상이 험해져서입니까 ?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 힘든겁니다 ‘하늘’이 아닌, ‘땅’을 향하고 있는 눈을 거두지 못하고 주님이 여기 내 삶에 함께 하심을 정직하고 진실되게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지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께 진실되어야 하고, 말씀앞에 정직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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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더 좋은 곳을 바라보던 사람들’ 성경에서 주목하는 믿음의 사람들, 그들의 정체성인 ‘믿음'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이 계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기 계시는 것처럼 살지 못하는 것은 주님이 계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꾸만 속으로 움츠러드는 마음을 추슬러 세우면서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고 나아가십시오. 예수를 경배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말고 그분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기 위해, 그분의 임재안에 거하기 위하여 오늘도 깨어나십시오. 성령께서 주 계신 곳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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