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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19 부활후 2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0. 4. 16. 14:42

    성서일과

                 1독서 _ 사도행전 2:14a, 22~32

                 응 송  _ 시편 16

                 2독서 _ 베드로전서 1:3~9

                 3독서 _ 요한복음 20:19~31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open?id=1K0vyGnrvx3y6fF8neu_jGAzTW7nm_tMI = '클릭'하시면 설교 음원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설교파일

    https://youtu.be/BwZY0BT4-is = '클릭' 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보는 것', 그리고 ’믿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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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를 생각하다

    코로나가 엄습해 이후 예배, 교회의 모습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 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낯설은 예배의 모습과 성찬, 공동체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내야만 하는 숙제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으며, 코로나 이후 우리는 계속해서 교회란 무엇인가?’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교회를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밖으로라는 뜻의 에크와부르다 뜻의 칼레오가 합해진 것으로, 그대로세상밖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교회의 뜻은 동안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 세상이 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또한 그리스도만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초대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핵심은 재론의 여지 없이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역시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 말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지간히 믿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교회안에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실재로 죽었던 것이 아니라 가사 상태에 있다가 서늘한 동굴에서 나중에 깨어난 것이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고,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쳐간 것이라는 주장이나, 예수는 죽었고 그를 따르던 이들안에서 예수의 가르침이 새롭게 깨달아졌을 예수가 부활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예수 정신을 따르며 어디서든 예수가 그러했듯 약한 이들을 돌보고 자비와 선행을 실천하며 의롭고 정의롭게 살자는 말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따르게 되면 결국 기독교 신앙은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며 사는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생명을 얻고 인간 해방과 구원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천년 교회 역사는 포기함없이 손바닥에 못자국이 새겨지고, 옆구리에 창자국이 선명했던 예수 부활의 경험, 부활하신 예수님만을 굳게 믿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였음을예수 부활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방식안에서 발견했으니, 오직 사실에 운명을 걸고 달려온 셈입니다. 

    예수께서 명령하셨던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나, 신앙생활, 교회 생활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교회가 하는 많은 활동과 사역도 실은 이것을 경험하고 증언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만일예수 부활 통해 하나님만이 구원이시라는 믿음과 은총의 경험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면, 교회는 친목모임이나, 사회단체가 되고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그를 살리신 하나님의 구원만 믿는 겁니다. 

     

    # 믿음 없는 도마

    오늘 요한의 복음서의 내용은 안식후 첫날, 부활하신 그날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등장인물은도마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당시에 그곳에 함께 하지 못했던 제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이들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그럴 만한 일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여하튼 부활을 믿을 없었던 도마를 우리도의심많은 도마라고 핀잔을 줍니다. 첫번째 제자들앞에 현현하신 이후 여드레가 지나 다시금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고, 그때는 도마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손과 옆구리 상처를 보이신 주님앞에서 도마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요한복음 28

    답변을 들으신 주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 29

     

    어떻게 들리시나요 ? 삼년이나 함께 했음에도 ~ 허니 단단한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고마는 도마의 모습을 타박하시는 걸까요 ?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던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지만,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는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증언했던 이들이 이미 하나 세상을 떠난 이후였습니다. 당시의 교회의 현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이 아닌, 목격자들의 증언을 전해들어야만 했던 이후의 세대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했던 상황입니다. 아마도 본문속의 도마는 이처럼 주님을 직접 뵙지 못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부활을 전해들어야만 했던 후기의 성도들의 신앙의 자리를 대변하고 있음이 분명해보입니다. 그러고보면 지금 도마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의심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불안한 삶의 정황속에서 신앙을 지켜내고 있던 성도들을 향해 그들이야 말로 하늘의 복이 있다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로 들리게 됩니다.

     

    하지만 2천년전에 일어났던 너무나 놀랍고 납득하기 어려운 부활을 눈으로 적이 없기에, 여전히 어떻게 ? 보지 않고도 믿을 있는 것인지, 믿을 있는 이가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체 보지 않고 믿을 수가 있을까요 ?

     

    # 보는 , 믿는 , 잃은

    부활을 부정하는 세상에서 예수를 죽은 가운데서 살려내신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믿을 것인지도 아득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물질 문명에 경도된 삶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자본주의가 싹튼 이후로, 우리는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하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 산다라는 것이어떻게 사람답게 것인가 ?’ 질문하던 때와 달리, 이제는 얼마나 좋은 집에 살고, 얼마나 부유한지를 뜻하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꿈이라고 하면, 직업이나 돈벌이 이상을 생각해 없게 되버린 이후부터 사람들은 꿈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름밤에 듣던 달나라에 방아를 찧는 토끼 이야기는 움푹 파인 표면을 마치 옆에서 보듯 익숙하게 커가는 아이들에게는 터무니 없는 거짓말일 뿐입니다. 하늘의 주인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이야기도 우주 밖에는 어둠 뿐임을 목격한 이후로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우리에게부활이라는 사건은 시대에 맞지 않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과연 보여지는 것이 믿을 만한 진실을 담보하고, 우리는 정말 있어야만 믿을 있는 걸까요 ?

     

    과학의 발전으로 우주를 관찰하게 되고, 반대로 인간 세포 하나하나를 살펴볼 있게 되었지만 우주의 끝은 여전히 미지일 뿐이고, 무엇이 생명 현상은 이루어지게 하는가?라는 물음앞에 말을 잃고 마는 것이 우리입니다. 없을 때에는 우주의 끝이라던가, 별의 갯수가 얼마인지, 유전자 배열이나 복제인간의 윤리성 여부와 같은 것은 몰라도 되었었는데, 눈으로 보게 이후부터 모르는 것이 많아 것만 같습니다. 많은 것을 있게 수록 많은 것을 알게 되어야만 하는데, 오히려 마땅히 알아야할 것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달에 가서 보니 토끼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대신에 우리는 하늘의 달도 품을 있었던 마음을 고스란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늘 위에 올라보니 아무것도 없더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제멋대로 땅위의 주인행세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불의를 저지르고, 타인을 해코지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기형적 인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삶에 영향력을 끼치거나 바꾸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을 바르고 정직하게 살면서 세상을 밝게 비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기도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면서도 뻔뻔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모두가 불편해 합니다. 하지만 감동을 주는 사람처럼 살고, 불의한 사람처럼 살지 않느냐? 질문앞에서 우리는 자유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말하는보여지는 것만을 믿겠다 말은, 사실은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 그런 가치들은 선택하고 싶지 않아서 포기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감추는 과장된 빈말일 뿐입니다.

     

    요즘은 뉴스 조차도 진짜인 것처럼 조작되고 위조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보이는 것만 믿는다고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만 살아가는 이런 세상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진실은 묻혀지고, 거짓에 눌려있는 이들은 고통받을 밖에 없습니다.

     

    #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 부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 ‘믿는다 것은 보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았느냐 않보았느냐에 지배를 받지 않는 겁니다. 실재로 생명, 자유, 평화, 사랑처럼 중요한 것들 중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에 반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은 봄날 한철의 벚꽃처럼 아무리 화려해도 사라지고 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이해는 되지만 닿지는 않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부부 사이를 지탱하는 근거는사랑입니다. 서로에 대한사랑 어떻게 드러날까요 ? 사람들은 상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자꾸만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젊은 연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특별한 이벤트나 선물을 통해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자꾸만 크고 그럴듯해 보이는 것으로 확인받고 싶은 조바심도 커져 갑니다. 그러니하늘의 별을 따다 주면 사랑한다고 믿을께 같은 터무니 없는 말도 나오게 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찾다보면, 오히려 그것에 마음마져 빼앗겨 그의 인품, 그의 마음, 그의 사랑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부쩍 선물도 많이 하고 친절해졌다고 좋아라 하다가 나중에야 상대편이 외도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드라마는 전혀 허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드디어 도마는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초기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며, 부활을 경험한 모든 이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이라는 헬라어퀴리오스 당시 로마 황제에게 전속되어 있던 칭호였다고 합니다. 그는 살아있는 ,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 절대의 패권자입니다. 그가 주인된 세상이니 그를 따르면 살고, 그를 거부하면 죽습니다. 살고 죽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세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 황제에게 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초기 교회 공동체는 황제를 향하던 주님의 칭호를 거부하고 도마의 고백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께로 돌렸습니다. 그러니나의 주님이라는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서슬퍼런 황제의 세상에서 목숨 조차 포기하겠다는 고백인 셈입니다. 무게감이 닿으시나요 ? 

    오늘 시대에 우리의생사여탈권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신앙의 고백이 일상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을까요 ? 기업의 오너나 권력자, 정치인들, 돈이 많은 사람앞에 주눅들고, 힘있는 사람앞에서 자꾸만 왜소해지고 비굴해져갑니다. 개인이나 공동체 뿐만이 아닙니다. 국가 간에도 강대국의 힘앞에 약소국의 정의는 처참하게 깨어지고, 그들의 힘이 정의가 되는 세상입니다. 예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부활하신 예수만이 땅의 주님으로 삼으며, 부활이 하나님만이 하실 있는 일이라는 , 생과 사의 결정권이 하나님께만 속해 있음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이것을 경험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다면 세상일 때문에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인이 아니니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나 복을 따라가지도 않습니다. 주인이 아니니 마땅합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힘이고, 권세고, 실재로 지금 삶의 주인인 것은 분명합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하는 세상을 향해, 나의 생명은 주님께 있으니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이 증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도마가 예수의 말씀대로 손바닥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았을까요 ? 만약에 손가락을 넣어보았다면 부활을 실재로 보았다는 것이 그의 고백의 근거가 겁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도마의 고백이 부활의 목격자들이 사라진 교회 공동체의 고백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의외로 분명해집니다. 도마는 보았다고 하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자신 앞에 계신, 지금 자신앞에 스스로를 드러내신 그분이 지난 삼년간 그가 삶을 걸고 따랐던 그분, 십자가에 달려 죽음 가운데에 내던져졌던 주님이셨기 때문에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 눈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경험하느냐 보다는, 과연 자신 앞에 드러내신 그분을 부활하신 주로 믿을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전에 죽어서 장례까지 마친 것을 보았던 어떤 이가 지금 우리 가운데 나타난다면 과연 우리가 살아돌아왔음을 믿고 반길 있을까요 ? 아마도 모두가 귀신이 나타났다고 도망치고 말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부활의 목격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부활 목격했기 때문에 믿게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었으니부활 목격하게 되었다는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

     

    # 복이 있는 사람

    오늘 성서 일과의 응송은 다윗이 지었다고 하는 시편 16편입니다. 피난처를 찾고 있는 이의 노래입니다. 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를 지켜 주소서 죽을 힘 다해 주님께 피합니다 

    피난처를 구하고 있다는 것은 현실에 문제나 환란이 찾아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무력한지를 실존적으로 깨닫게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괴로워는 하지만, 그런 염려와 근심에 내몰려 대한 실존적 한계와 부딪혀보지 못하고 맙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 그런 자신을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런 절망의 상황속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잠잘 때에도 내 마음 굳게 붙듭니다 나, 밤낮 하나님을 붙들겠습니다 귀한 것 주시는 주님을 절대 떠나지 않겠습니다’ | 16:7-8 (메시지)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인간을세계안으로 던져진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던져져 황망하기만 실존의 허무안에서 포기하거나 무너지는 것이 아닌, 주님을 붙잡았습니다. 의지할 것도, 기댈 것도, 소망도 없는 삶에서 하나님이시라면 영혼이 평안하고, 그분이시라면 나를 구원하실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순간 버려진 것만 같은 허허로운 생의 광야에서 평안이 그의 영혼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시인에게 주어진 평안이 부럽기만 합니다. 대체 시인은 어떻게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있었을까요 ?

     

    부활하신 예수는 도마에게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 말씀하셨습니다. , 그렇습니다. 자신 앞에 있는 그가 예수님이 분명했기에 부활이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믿을 있게 되었습니다. 믿어지게 되는 ! 보지 않고도 믿어지는 놀라운 일을 누가 하신 걸까요 ?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은혜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에 거져 주시니 우리는 하늘의 받은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 봄으로 믿는 것이 아닌, 믿으니 보이는 것이 예수 부활입니다. 우리야 말로 보지 않고 믿는 복된 사람들, 주님의 교회입니다. _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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