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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6 부활절 3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4. 23. 11:45
성서일과
1독서 사도행전 2:14a, 36 ~ 41
응 송 시편 116:1 ~ 4, 12 ~ 19
2독서 베드로전서 1:17 ~ 23
3독서 누가복음 24:13 ~ 35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open?id=1BL6Jl86P4-b4r9yubC6wf3pgxBYnpEOI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NZUbHAPHjnU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자넷 부룩스 게릴로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_1992
외젠 뷔르낭,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 _1898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려거든 ...
1
이번주일 교회 블로그에 두 장의 그림을 올려 놓았습니다. 첫번째 그림은 독일화가 자넷 부룩스 게를로프의 1992년 작품인 ‘엠마오로 가는 길’입니다. 힘없이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어렵게 삶의 자리를 버텨내고 있는 우리들의 뒷모습 같아 보이니 더 안쓰럽기만 합니다. 본문은 ‘그 날에 그들 중에 둘이’(13절)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날’은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무덤이 비었음을 제자들이 알게 된 날이며, 엠마오로 향하고 있던 이 둘은 그곳있던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인지 살길을 찾아 떠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잔뜩 풀이 죽어 예루살렘을 등진 채 걷고 있습니다.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 곳에 있었음에도 그들은 왜? 부활하신 주님을 찾거나 기다리지 못하고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는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뜬 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한채 낙망했던 것일까요 ? 여하튼 믿음이 없어지고 나니 주님께서 잡혀 죽은 예루살렘은 을씬연스럽기만 했고, 그곳에 머문다는 것은 더 없이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떠난 길임에도 예루살렘에서 멀어지는 걸음 걸음, 그들은 여전히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2
한참을 걷다보니 언제부터인지 그들 곁에 동행이 생겼습니다. 상심하고 실망한 이야기, 아프고 속상한 이야기를 싫은 내색 없이 다 들어줍니다. 그러던 그가 한순간 이야기에 끼어들더니 순간 대화의 주체가 되어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경험했던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모세의 책들과 예언서 전체를 아울러 풀어주기 시작합니다. 성경에 대단히 해박한 사람인가 봅니다. 그의 말은 부드러웠고, 이상하리 만큼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새 밀려왔던 두려움에 움츠려든 마음이 서서히 풀리고, 낯설은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들은 함께 식탁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동행했던 그 이가 식탁에 놓인 떡을 들고 축복하고 떼어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순간 제자들의 눈이 떠지면서 그이의 얼굴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스름했던 어둠이 가리고 있던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기쁨과 환희에 사로잡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함께 함’만으로도 그토록 따듯하고 소망이 될 수 있는 이는 예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예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헛것을 본 것이었을까요 ? 그럴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말씀을 나눌 때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던 그 식탁은 우리에게도 특별한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그 마지막 식사의 자리에서 떡과 잔을 떼어주시며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전 11:24~25)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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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음을 곁에서 목격한 이후 찾아온 황망함과 두려움과 공포는 그 동안 주님이 말씀하셨던 모든 말씀을 잊어버리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현실앞에서 ‘부활’의 가르침은 허튼 소리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이 무력했습니다. 그렇게 살길을 찾아 등을 돌린채 떠나버렸던 제자들의 모습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혹은 세상이 너무 커보이는 순간,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형편없는 실패처럼 여겨지고, 그래서 그때마다 무너지고 말았던 우리네 모습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나온 이곳 엠마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들은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하나 둘, 그렇게 예수님이 철저히 부정되고 죽임당했던 그곳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서워 도망쳤던 베드로는 어느새 그들앞에서 당당히 외치고 다녔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비겁한 겁쟁이 베드로를 기억하고 조롱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스승의 죽음에 미쳤버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성령의 충만을 경험한 이후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습니다. 그의 설교가 계속되면서 모여들었던 이들의 조롱과 비웃음은 어느새 무겁고 비통한 침묵으로 바뀌어 갑니다. 급기야 부끄러움과 황망함에 휩쌓이던 군중들이 사도들을 향해 절규하듯 애타게 외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37절)
들으면 들을 수록, 마치 당신의 아들을 잡아 죽였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계신다는 하나님의 고발로 들리우기 시작하니 가슴을 찌르며 들어오는 부끄러움과 낭패감을 견딜 수가 없었을 겁니다. 유독 오늘 만큼은 베드로의 설교가 살아있는 칼날처럼 가슴을 파고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민망하게도 엠마오로 향하던 믿음에 실패한 그날 밤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왜 그때와 달리, 지금은 들리고, 지금은 볼 수 있게 된 것일까요 ? 또 어떤 사람들은 듣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보게 되는 것일까요 ?
주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고, 애써 믿는다 해도 이제는 별 수 없다는 무력감에 쉽게 사로잡혀버리는 우리에게는, 오늘도 여전히 말씀은 가슴을 찌르지 못한 채 헛돌 뿐, 여전히 부활하신 주님이 멀게만 보이는 삶이 반복되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을까요 ?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왜 이리 마음이 무딘 것이냐?’던 주님의 말씀이 너무나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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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믿는 대신에 두려움에 무너지고, 마치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전능하신 능력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는 것처럼 믿지 못하는 이상한 ‘믿음’?을 고집하고, 증거가 없으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신앙은 어디서부터 잘 못된 걸까요?
성경은 ‘조상들이 물려준 헛된 행실’ (벧전 1:18) 이나, ‘썩어져가는 옛 구습’ (엡 4:22),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대별되는 본받지 말아야 하는 ‘이 세대’(롬 12:1)로 이처럼 변화되지 못하고 자꾸만 어제로 되돌아가는 우리 모습을 정의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늘 이 세상의 방식에 익숙해져있고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하나님 없이 나 혼자 살던 방식과 삶에서 벗어나는 것임에도, 여전히 세상에서 어떻게 성공하고, 어떻게 잘 살것인지 이전까지 하나님 없이 살던 삶, 세상이 이야기하는 방식에만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예전의 삶은 고스란히 그대로인 채, 믿음과 신앙, 부활하신 예수님 마져 덧붙이려고 합니다.
그 날 그곳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 이들은 삼천이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붙들었던 그들은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사는 삶에서 벗어나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신 하나님의 능력에 잇대어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와 예배에 참여하며, 수 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전혀 변화하지 못하는 우리네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 보입니다.
엠마오로 가고 있던 제자들은 뭐가 특별했을까요 ? 우리들 기준으로 보면, 오히려 예루살렘을 떠나던 이들은 믿음에 낙오한 실패자들 일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서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아닌, 이렇게 깨어지고 상하고 두려움에 짓눌린 삶 때문에 눈물을 지워내지 못하는 연약한 이들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이들은 늘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곁을 찾아가셨고, 어느새 그들의 길벗이 되어계셨습니다. 그들이 했던 것이라고는 단 한가지 뿐입니다. 주님께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한 대화를 나눈 것 뿐입니다. (14절) 세상에서 패망한 것처럼 보였던 예수님인데, 속절없이 깨어진 꿈이었는데 여전히 그들이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런 세상에도 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엿보았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
정말 그러한지, 그런 꿈이 온전히 이루어질 날이 과연 올 것인지의 여부와 관계 없이 마음이 자꾸만 예수님을 향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제는 어찌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애당초 몰랐다면 몰라도, 희미하게 나마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했던 것은 오직 예수님과 함께 했던 때 뿐이었으니 예수님외에 다른 것은 이제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 밖에는 다른 답이 없으니 ‘갈급함’이라고 해야겠지요. 산해 진미가 있어도 물을 마셔야만 갈함을 씻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바른 신앙의 모습이 이런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주목하는 믿음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믿음은 흔들림없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비틀거려도 생명을 살려내고, 부활을 경험하게 하는 믿음이란 예수 부활의 사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무섭고, 허무함앞에 흔들거리기도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이시니, 포기할 수 없어 꾹꾹 마음에 담아내며 그 안에서 사는 것 아닐까요 ?
베드로의 설교는 유대인들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예수님도 책망하시기 위해 엠마오를 향해가는 그들을 찾아오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틀거리는 믿음의 수준이나 모습은 관계 없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향하여 살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지난 한주간 여러분 마음에 무엇을 담고 사셨습니까 ? 대부분의 시간 우리의 생각은 무엇을 조준하고 있었을까요 ?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을 향해 우직하게 걸어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안에만,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생명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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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회개했고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은 마음이 뜨거워졌다는데, 과연 우리가 다시 주님을 향한 ‘갈급함’,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삶의 목적과 방향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 방법은 한가지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단순히 성경을 잘 읽고, 제자교육 잘 받으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토록 우리가 보고 싶하고, 듣고 싶어하고, 이루고 싶어하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 베드로의 설교에 등장하던 회개하는 것과, 죄 사함, 그리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에 마음을 담고 사셨나요 ? 눈물 겹도록 주님의 나라를 그리워하시며 살아왔는지,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며, 어떻게 하면 어둠과 싸워이기며 살아갈 수 있을지 절절하셨는지요 ? 혹여, 주일 예배가 마쳐지는 순간 이런 것들은 살아가는 문제와는 전혀 관계 없는 것처럼 무관심하셨던 것은 아니시지요 ?
누구나 본다고 보게 되고, 듣는다고 듣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날 무엇이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이들의 마음을 열어 놓았을까요 ? 자신을 뒤돌아 떠나는 두 제자를 타박하지 않고 찾아가신 이가 누구십니까 ? 제자들은 또 언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까 ? 말씀을 풀어주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는 이전처럼 뵐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말씀안에서만 현현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는다고 다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이냐 ? 라고 되묻고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성경의 말씀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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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설명드렸던 자넷 부룩스 게를로프의 ‘엠마오로 가는 길’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볼까요? 축 쳐진 모습으로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은 여전히 자신들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몰라봅니다. 그래서 화가는 예수님을 함께 하고 있으나 없는 사람처럼 투명하게 그려놓았습니다. 곁에 계시는데도 그들이 볼 수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였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곁에 있다고 누구나 만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신기한 현상이나 숭고한 모습, 혹은 눈에 보이는 그럴 듯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말씀안에 현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거짓 주인들이 우리 마음을 온통 휘져어 놓고마는 세상속에서도 여전히 주님을 귀히 보는 눈이 띄어진 이들만 만날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말씀을 들을 때 눈이 띄어져 주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십자가 죽음을 납득할 수 없어 낙담하던 제자들에게,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신비한 구원계획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눈이 띄어지고, 귀가 열린 이들에게 찾아오는 위로와 희망의 말씀은 지금도 교회안에서, 성찬과 말씀의 예전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야하고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어느 순간 두 제자들처럼 지금 내 곁에 길벗이 되어 함께 걸어가시는 주님의 현존으로 가슴이 뜨거워질런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블로그에 담긴 두번째 그림은 외젠 뷔르낭의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작품입니다. 앞선 작품과는 분위가 서로 다르지요 ? 뷔르낭의 작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고 있는 두 제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경이로움과 알 수 없는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얼굴도 이와 같은 표정이 아니었을까요 ?
오늘 우리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요 ?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 사는 것이야말로 절망적인 삶일 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셔 들이지 않는 한, 그분은 언제나 우리 곁을 지나치는 낯선 이로 남아 계실 뿐입니다. 이제는 삶의 방향을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듣는 곳으로 향하십시오. 어느 한날 꽃망울이 터지듯, 눈이 열리며 우리의 곁을 지키고 계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도 같은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그분이 길에서 우리와 대화하며 성경을 풀어 주실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 ' _ 눅 24:32 _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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