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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 부활절 넷째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4. 29. 22:10
성서일과
| 1독서 사도행전 2:42 ~ 47
| 응송 23
| 2독서 베드로전서 2:19 ~ 25
| 3독서 요한복음 10:1 ~ 10
설교 음원
https://drive.google.com/open?id=1jWNtIBtTQIuxbc-Rab2tQe6-K5xz0Esm = '클릭' 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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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 괜찮습니다
|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23편은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듯해 집니다. 전적으로 목자를 신뢰하는 이가 누리는 여유와 평안함은 곁에서 바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오월의 첫주를 맞이하는 우리들 삶의 형편들은 여유로운 시인의 낭만적? 노래를 맘 편히 감상하지 못하게 합니다. 한가로운 들판을 어슬렁 거리는 양떼들, 하늘에 뜬 구름, 그 평안속에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라는 시인의 고백이 참말임을 알지만, 너무나 비현실적인 꿈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 우리는 부족함이 많고, 지금 우리의 영혼은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되묻게 됩니다.
‘시인의 목자되시는 하나님, 당신은 오늘 우리들의 목자이시기도 하신 겁니까 ?’
| 시인은 하나님을 목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양을 치시는 목동이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시인 자신이 목자이다보니, 양을 돌보듯 자신을 돌봐주시는 하나님이 공감되었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목자’의 이미지는 돌보고 책임지는 이입니다. 고대 중근동에서 ‘목자’라 불리우던 사람들은 주로 ‘왕’이나 유력한 권력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재미난 것은 목자로 대변되는 왕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멜렉크’인데, 여기에서 모음자 하나만 바꾸게 되면 사람을 희생제물로 받는 이방신 ‘몰렉’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양들을 먹일 멜렉크가 되라 말씀하셨는데, 제게 맡겨진 양을 도둑질하고 재물로 먹어 삼키는 몰렉이 되고 만 왕들이 즐비한 세상입니다. 그래서인지 요한복음은 왕, 제사장,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에 걸맞는 목자로서의 책임을 매섭게 추궁합니다.
| 도시문명이 고도화되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는 ‘목자’ 이미지가 가져다주는 이미지가 그닥 선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야 말로 ‘목자이시다’라고 하는 시인의 고백이 깊이 공감되지 않는가 봅니다. 그렇지만 따지고보면, 신앙의 유무와 관계 없이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목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길을 이끌어가고, 또한 우리가 따르는 대상으로 말입니다.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고, 저마다 자신의 인생이라 말하며 살고는 있지만,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선택을 하고, 또 저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모두 무엇인가 우리를 이끌어온 결과들입니다. 과연 그 목자는 누구일까요 ?
| 목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양들을 생명처럼 돌보고 지켜내야합니다. 예수님은 양을 위해 제 목숨도 내어줄 수 있어야 ‘목자’라고 할 수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목자가 모두 그렇게 선한 것은 아닙니다. 삯군이라 불리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목자와 너무나 똑같이,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유능하고 멋져보이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삯군은 목자와 쉽게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유일한 차이는 목자는 양을 위해 사는데, 삯군은 제 자신을 위해 산다는 것 뿐입니다. 자신만 위하는 삯군에게 ‘양’은 그져 저를 살찌울 수단일 뿐이니, 양을 서슴없이 잡아 먹습니다. 삯군에게 속한 양들은 자꾸만 몸이 상하고 야위어가기 마련입니다. 삯군의 관심이 양에게 없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 삶의 경이로움과 기쁨이 새롭습니까? 아니면, 상실감과 좌절에 눌리고, 감사가 아닌 불평에 사로잡히고 있습니까 ? 지금 답하셔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목자는 누구입니까 ? 아니, 당신이 목자 삼고 따르고 있는 이가 누구입니까 ? 정말 주님이 여러분의 목자이십니까 ? 그는 인도하시고,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고 있습니까 ?
| 삯군은 어떤 방식으로 양을 다룰까요 ? 삯군은 양들을 돌보지 않고, 양을 몰아 세웁니다. 양이 야위는 것은 많이 먹지 않은 양탓일 뿐입니다. 삯군이 요구하는 방식은 ‘소유’입니다. 소유란 ? 눈에 보이는 것들로 평가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삯군은 살이찌고 기름이 흐르고 번식을 잘하는 양만을 돌봅니다. 더하면 더했지 사람을 대할 때에도 똑 같습니다. 더 많이 가져야만 행복할 것이라는 마음을 불어 넣습니다. 하지만 더 많이 채워야한다는 말은 결국 그 만큼 더 비어있는 존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삯군은 이런 소유, 즉 눈에 보이는 것들을 채울 것을 끊임없이 요구함으로 우리 스스로는 결핍과 부족만 보게 합니다. 부족함만 보게 되니 불안하고, 불행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채워내야하는 조급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것이 율법주의, 업적주의 입니다. 이런 업적주의를 따르게 되면 결국 자기 연민과 자기 중심주의만 강화될 뿐입니다. 비어있음을 채워야하는데 채울 방법은 모르고, 채울 능력도 없으니 괴롭습니다. 결국 자신안에는 없는데 채워야하니 남의 것을 빼앗아 올 수 밖에는 없는데, 그것을 ‘탐욕’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삶에는 ‘감사’란 사치일 뿐입니다. 그럴 수 밖에요. 늘 결핍만 보이고 나만 못해 보이는데 감사가 될리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간은 늘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늘만큼, 땅만큼 가지고 있어도 불행할 뿐입니다.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이런 방식을 거부하고 이런 삶에서 빠져나오는 것 뿐입니다.
| 탐욕은 지나침이 있는 욕심, 가지고 있음에도 더하여 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목마르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괜찮아. 난 이런 것 없어도 돼 !’ 이렇게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삯군의 세상에서 벗어나, 사랑의 관계안으로 불러주시는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없어도 되고, 않해도 되는 것, 그래도 괜찮은 것 ! 더 이상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야말로 ‘충만’이고 ‘풍성함’인데, 이것은 더 함이 없는 그런 존재를 만나고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런 존재가 어디에 있을까요 ? 비어있는 모든 것을 채우고도 남을 이가 누구이십니까 ?
교회공동체는 그 답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이야 말로 선한 목자라고 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야 말로 목자이며, 그의 양이 바로 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복되게 들리시나요 ? 어디서든 늘 소유의 대상이나 소유하도록 하는 도구로만 대해지던 우리를, 주님은 당신과의 ‘관계’안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세상의 ‘그것’이 하나님의 ‘너’가 되고, 하나님의 ‘우리’, 고귀하신 하나님의 식구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차별을 건너 나와 동등해지고 하나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삯군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모두가 늘 고독할 뿐입니다. 관계가 단절되고 깨어져 사람은 없고 도구만 남게 되니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늘 ‘관계’로만 이해하시고 바라봐 주십니다. 그렇게 인간을 회복시키고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이 선택하신 관계의 방식이 바로 ‘사랑’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 10:10 b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고 나면 다른 부족함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용납을 경험하고 나면 세상의 차별이나 소외가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생명을 풍성하게 경험하게 해주심으로 우리를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조금 있다가 사라지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는 손님이 오시면 머리에 기름이나 향유를 찍어주었다고 합니다. 기름이 발라져있으면 주인에게 귀한 손님인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름을 내 머리에 부어주신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서로 다른 번역본으로 5절을 읽어볼까요 ?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5절b) _ 개역개정
‘축 처진 내 고개를 세워주시니 내 잔에 복이 넘칩니다’ _메시지 성경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_새번역성경
지금 하나님께서 기름을 찍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타고 흐른 기름이 내가 가지고 있는 잔 까지도 채우고 남을 만큼 부어주신다는 시인의 고백대로라면, 모든 기름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계시는 하나님께 여러분은 얼마나 존귀한 자입니까 ? 주님이 여러분의 고개를 세워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실감이 나십니까 ?
| 주님안에 이런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구원을 경험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담겨 있는 생명 경험, 하나님 경험말입니다. 오늘 본문속에서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시인의 호칭이 다르다는 겁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을 4, 5절는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천지의 주재이며, 경외함으로 가득하신 공식적이고 신비로운 하나님이, 어느새 시인에게 ‘나의 주님’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라는 호칭 자체가 이미 시인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온 인류의 목자이시라는 성경의 진술이 머리로는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내 영혼의 평안과 구원은 그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신 주님’이라는 경험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나의 목자되시는 주님을 경험할 때에만 결핍이 가져다 주는 불안감과 자기 소외, 자존감의 상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님이 되실 때에만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하던 시인의 고백을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온전해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양을 치는 목자가 부족함이 없겠습니까 ? 신명기 2:7을 보면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광야에서 사십년을 사는 이들이 부족함이 없었겠습니까 ?
결핍이 있어도, 부족함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주안에 있을 때는 부족함을 보던 눈이 감기고 대신에 족하고 충만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 입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니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고후 6:8b ~ 10
바울의 고백은 허튼 소리가 아닙니다. ‘나의 목자이신 주님’을 만나고, 생명을 경험하면 세상의 다른 것으로는 그것을 대체할 수가 없는 기쁨이며 충만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머리가 아닌 하나님의 풍성하신 용납과 환대를 경험했을 때에야 비로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때에 비로서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는 존귀한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 ‘참목자’ 되시는 주님을 경험한 이런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요 ? 사도행전 본문은 초대교회가 시작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놀랍기만 합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롤 따라 나눠주고, 함께 모이기를 힘쓰고 예배하며, 또한 그렇게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반드시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뭘하면 좋을까요 ? 사랑하며 살자고 외치면 될까요 ? 행사를 하고, 교제를 하면 될까요 ?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모습은 섣부른 선동이나 무의미한 구호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교회를 이렇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요 ?
베드로전서는 더 놀라운 말을 전해줍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 벧전 1:18
베드로사도는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선한 이들 뿐 아니라, 까다롭고 부당하게 대하는 이들에게도 그리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리할 수 있을까요 ? 참을성이 있고, 품성이 고운 사람되라는 말씀일까요 ?
이걸 따라 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사람들앞에서는 그런 척하지만 결국 내면안에서 변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정죄감만 더 쌓이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의 모습이나, 베드로사도가 전하는 성도의 모습은 모두 부활하신 예수 경험, 즉 선하신 목자되신 예수님을 경험한 이들이라면 그렇게 살게 되는 모습입니다.
| 양의 생명은 양이 얼마나 부지런했는지, 잘나고, 뛰어난지에 있지 않습니다. 양의 운명은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내가 따르고 있는, 나를 먹이고 있는 목자가 선한 목자인지 아닌지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선한 목자라면 사망의 길을 가고 있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삯군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지만 양이 목자를 찾는 것이 아니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양은 배가 고프면 먹을 것에 마음을 잃고, 두려우면 혼비백산해서 정신을 놓고 헤매이며 제 살길로 흩어지고 맙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는 제 목숨을 다해 양을 찾아가고, 양을 지켜냅니다. 그러니 그와 함께 있으면 두렵지 않습니다. 그와 함께하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임마누엘의 주님은 지금 여기에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목자는 늘 양의 곁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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